중국 국제학교에서 근무하던 1년 동안, 나는 주말마다 또 다른 일을 했다.
말하자면 부업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돈을 벌기 위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과 체력을 따져보면 손해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일을 하게 된 것은, 나밖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의 나는 그런 말에 약했다. 누군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면서도 도망치지 못했다.
그 일은 한국 교민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플루트 레슨이었다.
계기는 다른 국제학교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음악 선생님의 권유였다. 당시 칭다오에는 한국 교민이 몇 십만명이나 있었다. '한국식 중화요리'집도 엄청 많았다. 중국 안에 작은 한국이 하나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작은 한국에도 늘 부족한 것이 있었다. 문화였다. 정확히 말하면, 문화예술을 안정적으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이었다.
“선생님, 혹시 플루트 레슨 가능하세요?”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조금 망설였다.
“제가요?”
“네. 여기 플루트 전공한 한국 선생님 찾기가 정말 어려워요. 다들 배우고 싶어 하는데 마땅한 선생님이 없어요.”
칭다오에도 음악대학이 있었을 것이고 중국인 연주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교민들 입장에서는 언어와 교육 방식이 익숙한 한국인 전공자를 원했다. 아이가 무슨 소리를 내는지, 어떤 자세가 잘못되었는지, 입시를 생각한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한국말로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쉽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마음 한편에는 찜찜함이 있었다. 한국 학교에서 근무한다면 겸직 문제는 꽤 엄격하게 따져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한국 교육부 인가 학교가 아니라 중국 현지 교육당국의 인가를 받은 학교였다. 월급도 위안화로 받았고, 중국 은행 통장으로 들어왔다. 그렇다고 중국 교육부 소속 학교의 겸직 규정을 내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아주 편리한 결론에 도달했다.
‘한국이라면 안 될 수도 있지만, 여기는 중국이니까.’
지금 생각하면 꽤 허술한 자기합리화였지만, 그때의 나는 그 정도로 세상을 넓게 해석하며 살았다. 낯선 땅에서는 규정도 조금 느슨하게 느껴지고, 양심도 약간 여행자처럼 굴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페이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플루트 레슨을 하면 적어도 시간당 3만 원 정도는 받았다. 그런데 칭다오에서는 한 시간에 100위안 정도였다. 2012년 환율로 계산하면 대략 17,000원쯤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칭다오는 넓었다. 아주 넓었다. 지도를 보면 분명 같은 도시인데, 실제로 이동해보면 도시와 도시를 건너는 기분이었다.
레슨을 하러 가려면 택시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40분씩 이동하는 일이 흔했다. 택시비가 한국보다 저렴하다고는 해도, 이동 시간과 체력을 생각하면 결코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시작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나는 돈보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낯선 도시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따뜻한 일이었다.
레슨은 모두 네 군데였다.
처음 나를 소개해준 음악 선생님의 고등학생 딸, 칭다오에서 큰 한국 학원을 운영하던 학원장님의 딸, 목욕탕을 운영하던 한국인 가정의 딸, 그리고 정확히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몰랐지만 엄청난 저택에 살던 부부의 딸.
네 집은 칭다오 지도를 기준으로 점을 찍어보면 거의 사각형을 이룰 만큼 각기 다른 방향에 있었다. 그래서 토요일에 두 집, 일요일에 두 집을 도는 일정이 만들어졌다. 어떤 날은 토요일 저녁 레슨을 마치고 숙소까지 돌아가기 어려워 근처 찜질방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다른 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지금의 나에게 그렇게 살라고 한다면 절대 못 한다. 주말이면 가족과 쉬고 싶고, 몸도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활마저 재미있었다. 슬롯에 처음 나와 일을 한다는 사실이 좋았고, 내가 번 돈으로 택시를 타고 카페에 가고, 찜질방에서 자고, 다음 날 다시 악기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서는 일이 왠지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졌다.
레슨을 마치고 나면 가끔 해변 근처 보사노바 카페에 들렀다. 어둑한 조명 아래 앉아 커피를 마시면, 하루 종일 등에 매달려 있던 플루트 가방의 무게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커피잔 너머로 보이는 칭다오의 밤은 낯설고도 다정했다. 나는 그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주 생각했다.
늦은 밤에는 중국식 찜질방으로 갔다. 그곳은 한국의 찜질방과는 스케일부터 달랐다. 궁전처럼 넓은 로비, 끝없이 이어지는 휴게 공간, 커다란 수면실. 나는 귀한 플루트를 사우나 캐비닛에 넣어두고 식혜 비슷한 음료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참 대바카라 없는 일이었다. 전공자의 악기를 사우나 캐비닛에 두고 잠을 자다니. 하지만 그때의 나는 불안보다 자유가 더 컸다.
네 명의 학생들은 모두 착했다. 중국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아이들이라 한국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한국말은 익숙하지만 한국 학교 문화는 낯설고, 중국에서 살지만 완전히 중국인도 아닌 아이들. 플루트를 불다가도 우리는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 한국 학교는 진짜 야자 해요?”
“응. 하는 학교도 많지.”
“매일 밤까지요?”
“응. 매일 밤까지.”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한국 가면 못 살 것 같아요.”
그러면 나는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해.”
한 시간짜리 레슨은 종종 90분이 되었고, 어떤 날은 두 시간이 되기도 했다. 악보를 보다가, 소리를 내다가, 한국 이야기와 중국 이야기 사이를 오갔다. 나는 아이들에게 플루트를 가르쳤지만, 아이들은 내게 해외에서 살아가는 한국 아이들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가끔 저녁 시간이 겹치면 학부모님들이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했다. 나는 주요 과목 과외 교사도 아니고, 집에 상주하는 가정교사도 아니었다. 그저 주말마다 잠깐 와서 플루트를 가르치는 젊은 선생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식탁에는 한국 음식이 차려졌고, 학부모님들은 나를 자연스럽게 앉히셨다.
“선생님, 혼자 계시잖아요. 밥은 먹고 다녀야죠.”
그 말 앞에서 괜찮다고 끝까지 사양하기는 어려웠다.
그 밥상에는 단순한 호의 이상의 것이 있었다. 외국에서 만난 한국인끼리의 마음 같은 것. 낯선 땅에서 어린 선생이 혼자 살고 있으니 챙겨주고 싶은 마음. 나 역시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어느 순간부터는 감사히 밥을 먹었다. 칭다오에서 얻어먹은 따뜻한 한국 식탁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김치찌개 냄새, 갓 지은 밥의 김, 식탁 위에 오가던 고향 이야기들. 어떤 음식은 배보다 마음을 먼저 채운다.
레슨은 늦은 봄에 시작해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겨울까지 이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꽤 특별한 추억 하나를 남겼다. 네 명의 학생이 모두 같은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즈음해 학교 축제에서 함께 플루트 중주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 학교는 내가 근무하던 학교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내가 있던 학교가 ‘국제학교’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실상 한국부 중심의 한국학교에 가까웠다면, 그곳은 진짜 국제학교에 가까웠다.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였고, 학생들도 정말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복도를 걸으면 영어가 공용어처럼 흘러다녔다. 피부색도, 머리색도, 점심 도시락에서 나는 냄새도 모두 달랐다. 아이들은 각자의 나라를 들고 와 같은 교실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축제 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한국 학교의 축제는 대개 정해진 부스와 무대, 프로그램 순서표 안에서 움직인다. 몇 시에 무엇을 하고, 어디에서 무엇을 체험하고, 누가 담당하는지가 비교적 분명하다. 그런데 그 학교의 축제는 달랐다. 물론 기본적인 안내는 있었지만, 학교 전체가 하나의 열린 무대처럼 보였다. 복도, 계단, 벽면, 교실 앞 빈 공간까지 모두 학생들의 아이디어로 채워져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계단 옆에서 작은 게임을 진행했고, 어떤 아이들은 복도 한쪽 벽을 전시장처럼 꾸몄다. 누군가는 쿠키를 팔고, 누군가는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주었다.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이는 축제가 아니라,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아이들에게 학교 전체가 자리를 내어준 느낌이었다.
나는 그 풍경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학교가 이렇게도 될 수 있구나.’
우리가 준비한 플루트 중주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정식 무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적당해 보이는 장소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아이들과 함께 캐럴을 연주했다. 말하자면 버스킹이었다. 한 번 연주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옮겨 한 번 더 연주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멈춰 섰고, 학부모들이 미소를 지으며 영상을 찍었다. 누군가는 박수를 쳤고, 누군가는 작은 돈을 기부함에 넣었다.
그날의 연주는 완벽하지 않았다. 네 명의 호흡이 조금씩 어긋나기도 했고, 긴장한 아이의 손끝이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떨림마저 음악의 일부 같았다. 낯선 나라의 학교 복도에서, 크리스마스 장식 아래 울려 퍼지던 플루트 소리는 맑고 가벼웠다. 겨울 공기 위에 얇은 은빛 선을 긋는 것 같았다.
연주가 끝난 뒤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 우리가 받은 기부금을 아이들이 직접 정리하더니, 그 돈을 중국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보내는 프로젝트로 연결하겠다고 했다. 그 일을 어른이 시킨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의 아이들이 스스로 이야기하고, 정리하고, 추진했다.
“선생님, 이거 그냥 우리가 갖는 게 아니라 기부하면 좋을 것 같아요.”
“어디에?”
“중국 아이들 도와주는 데요. 여기에도 어려운 아이들 많잖아요.”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아이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자랐고, 미국식 국제학교에서 배웠고, 영어로 친구들과 대화했다. 그리고 그날 자신들의 음악으로 모인 작은 돈을 중국의 어려운 아이들에게 보내자고 말했다. 그 장면은 내게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꽤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다.
교사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지시해야만 교육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아이들에게 공간을 열어주고, 경험을 만들어주고, 그다음은 스스로 의미를 찾도록 기다리는 것이 더 큰 교육일 수 있었다. 그 학교의 축제는 내게 그런 사실을 보여주었다.
나는 생애 처음 교사가 되어 외국에서 일하고 있었고, 아직 머리가 딱딱해지기 전이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교사란 이래야 한다, 학교 행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 학생은 여기까지만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굳어지기 전에 그런 장면을 보았으니 말이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그 크리스마스 축제는 내 교직 생활에 작은 균열을 낸 경험이었다. 그 균열 사이로 새로운 가능성이 들어왔다.
네 명의 여자아이들과는 지금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마 누군가는 한국에 돌아왔을 것이고, 누군가는 여전히 해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어와 한국어와 중국어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세계 곳곳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그 아이들이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인재로 자라는 길에, 내가 한 스푼 정도는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거창한 공헌은 아니었다. 주말마다 플루트 가방을 메고 칭다오의 넓은 도로를 건너간 일. 아이들의 입 모양을 고쳐주고, 호흡을 잡아주고, 캐럴 몇 곡을 함께 연주한 일. 그리고 가끔 식탁에 앉아 한국 학교와 중국 생활 이야기를 나눈 일.
그 정도였을 뿐이다.
하지만 교육은 원래 그런 작은 것들이 쌓여 만들어지는지도 모른다. 한 시간짜리 레슨이 두 시간이 되고, 짧은 연주가 기부로 이어지고, 한 아이의 경험이 또 다른 아이의 세계를 넓히는 일.
그때 칭다오의 겨울 복도에 울리던 플루트 소리가 아직도 가끔 들리는 것 같다.
얇고 맑고, 조금 서툴렀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던 소리.
아마 그 소리처럼 우리 모두도 조금씩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