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유난히도 우리 문화에 관심이 많으셨다. 아버지가 방송 쪽 일을 하시며 문화유산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에 자주 참여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 문화라는 말과 꽤 가까운 환경에서 자랐다. 국악, 한복, 사찰, 탈춤, 문화재 같은 단어들은 또래 아이들에게는 낯선 것이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주말 나들이나 가족 대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말들이었다.
물론 그 영향이 언제나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은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한창 개량한복이 유행하던 시절, 아버지는 내게 개량한복을 입고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지금도 그날 아침을 생각하면 등줄기에 작은 소름이 돋는다. 사춘기에 막 들어서던 남자아이에게, 교실 문을 열고 개량한복 차림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공개 처형에 가까운 일이었다. 친구들의 눈빛, 킥킥거리는 웃음소리, 누군가의 “야, 너 오늘 무슨 날이냐?”라는 말까지. 그래서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한복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과 한복에 대한 트라우마는 내 안에서 아주 평화롭지 못한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우리 문화 사랑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 일도 있었다. 개량한복 사건이 일어나기 몇 년 전, 나는 나를 포함한 남자아이 네 명과 함께 사물놀이를 배우러 다녔다. 정식 사물놀이 학원은 아니었고, 탈춤 전수관에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전통예술을 하는 분들이 대개 그렇듯, 그곳의 선생님은 탈춤만이 아니라 장구, 꽹과리, 북, 징까지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분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남 사물놀이 한 바탕을 배웠다.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에게 사물놀이는 매력적인 활동이었다. 일단 마음껏 두드릴 수 있었다. 그것도 그냥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세게 두드려도 혼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힘 있게 치라는 말을 들었다. 사춘기 직전의 남자아이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예술교육이 있을까. 북채를 잡은 손에는 땀이 찼고, 꽹과리 소리는 귀를 찔렀으며, 장구 가죽을 때릴 때마다 몸 안에 숨어 있던 이상한 에너지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 열정은 중학교에 가서도 이어졌다. 나는 직접 사물놀이부를 만들어 공연을 했고, 나중에는 퓨전국악 비슷한 장르에도 도전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전통예술이 무엇인지 깊이 알았다기보다, 그냥 그 소리의 힘을 좋아했던 것 같다. 사물놀이는 몸으로 먼저 이해되는 음악이었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고, 설명보다 장단이 먼저 들어오는 음악이었다.
이 이야기가 칭다오 국제학교 연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아주 큰 상관이 있다. 내가 칭다오에서 했던 음악수업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물놀이였기 때문이다.
교사라면 누구나 정규수업 외에 하나쯤 동아리를 맡게 된다. 동아리 담당 교사의 유형을 나누자면 여러 종류가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는 방치형, 필요할 때만 도와주는 지원형,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판을 짜고 함께 뛰어드는 적극 개입형.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 유형에 가까웠다.
칭다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에는 전임 선생님이 운영하던 사물놀이 동아리가 있었다. 내가 음악교사이고, 어릴 때 사물놀이를 배운 경험도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그 동아리는 내 몫이 되었다. 누가 강제로 떠민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선생님, 사물놀이 동아리는 선생님이 맡으시면 되겠네요.”
“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는 걱정보다 기대가 더 많았다.
우리 동아리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름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냥 ‘사물놀이 동아리’였다. 하지만 교내에서는 나름 엘리트 동아리였다. 악기를 배우겠다고 모인 아이들답게 쾌활했고, 에너지가 넘쳤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나이가 내가 사물놀이를 처음 배웠던 때와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내가 겹쳐 보였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아이들에게 장단을 가르쳤다. 덩, 덕, 쿵, 따. 말로만 하면 이상하게 들리지만, 장구 앞에 앉으면 그 소리들은 금세 몸의 언어가 되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박자를 놓치고, 서로 다른 곳을 치고, 웃다가 다시 틀렸다. 그래도 좋았다. 장단은 틀려도 다시 돌아오면 되었다. 사물놀이에는 관대함이 있다. 조금 흔들려도, 다시 함께 맞추면 그만이었다.
연습이 거듭될수록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악기를 놓지 않았다. 장구끈이 흘러내리면 다시 고쳐 매고, 꽹과리 소리가 귀 아프다면서도 서로 치겠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안에서도 오래된 흥이 꿈틀거렸다.
‘여기서 멈추기엔 아깝다.’
사물놀이는 기본적으로 앉아서 연주한다. 그래서 흔히 ‘앉은반’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보고 싶어졌다. 풍물놀이처럼 악기를 메고, 걸으며, 돌며, 몸 전체로 장단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마침 우리 학교에는 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주변에 주거시설도 거의 없었다. 한국 같았으면 민원 전화가 빗발쳤을 법한 소리도, 이곳에서는 드넓은 중국 땅 위로 조금은 너그럽게 흩어질 수 있었다.
“얘들아, 우리 밖에서 해볼까?”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밖에서요?”
“응. 앉아서 치는 것 말고, 악기 메고 걸어 다니면서.”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그럼 우리 농악하는 거예요?”
“비슷하지. 그런데 선생님도 잘 몰라. 같이 만들어보자.”
이 말은 솔직한 고백이었다. 나는 사물놀이의 악기 장단은 어느 정도 칠 줄 알았지만, 악기를 메고 밖에 나가 진을 짜고 대형을 만드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했다. 일주일 가까이 인터넷으로 논문과 자료를 찾아보았다. 풍물놀이 대형 그림을 출력해놓고, 동선을 그려보고, 아이들의 이동 경로를 상상했다. 놀라운 것은 악기를 어떻게 메는지, 상모와 채를 어떻게 다루는지까지 정리해놓은 연구 자료가 있었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는 신명으로 노는 일을 학문으로 정리해두었고, 칭다오의 한 초보 교사는 그 덕분에 아이들과 운동장으로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봄과 여름 사이, 매주 두 번씩 운동장에 나갔다. 햇볕은 점점 뜨거워졌고, 아이들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장구를 멘 아이들은 처음엔 비틀거렸고, 북을 든 아이들은 걷는 박자와 치는 박자를 자꾸 헷갈렸다. 꽹과리를 맡은 상쇠 아이는 바카라임감에 어깨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선생님, 제가 틀리면 다 틀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네가 중요한 거야. 그런데 틀려도 괜찮아. 다시 잡으면 돼.”
그 말을 하면서 나도 속으로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 선생님이 틀리면 다 틀리는 거잖아. 하지만 교육이라는 것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완벽하게 알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앞서 걸으며 같이 길을 찾는 일 말이다.
우리의 공연 날은 5월 체육대회였다.
나는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예전 한국의 학교 체육대회는 마을 잔치 같았다고 들었다. 가족들이 도시락을 싸 오고, 동네 사람들이 모이고, 운동장 한가운데에서는 아이들이 뛰고 웃었다고 한다. 잔치에 풍물이 빠질 수는 없다. 체육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사물놀이만 한 것이 또 있을까.
그날 칭다오의 하늘은 맑았다. 햇볕은 뜨거웠고, 운동장 흙바닥에서는 열기가 천천히 올라왔다. 아이들은 각자의 악기를 메고 줄을 섰다. 장구끈을 다시 조이고, 북채를 손에 쥐고, 꽹과리를 든 아이가 내 쪽을 바라봤다.
“선생님, 시작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첫 꽹과리 소리가 울렸다.
깽—
그 소리는 중국 산동성 청도시 어느 학교의 운동장 위로 날아올랐다. 대한민국도 아니고, 고향도 아닌 낯선 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운동장 전체가 우리 마당이 된 것 같았다.
아이들이 행진을 시작했다. 장구 소리가 따라붙고, 북소리가 땅을 두드렸다. 징 소리는 느리게 공간을 채웠다. 덩, 덩, 덩. 장단은 뜨거운 공기를 흔들며 퍼져나갔다.
담장 너머 공장에서 일하던 중국인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멈춰 섰다. 어디선가 아이를 업은 현지 아주머니가 나와 우리를 바라봤다. 땟국물이 묻은 아이는 어머니 등에 업힌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직도 선명한 그 날의 장면. 우리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지, 저 사람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리는 설명 없이도 사람을 붙잡는 힘이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아이들은 더 신이 났다.
원래 약속은 한 장단을 여덟 번 반복한 뒤 다음 장단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쇠 아이가 흥이 올랐는지 여덟 번이 지나도 신호를 주지 않았다. 열 번, 열두 번, 아마 그보다 더 많이 반복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이제 넘어가야지! 넘어가야지!’
하지만 아이들은 지치지 않았다.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장구를 멘 아이들은 이를 악물고 따라갔고, 북을 든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연습한 대로만 움직이는 학생이 아니었다. 정말로 놀고 있었다.
장단 안에 들어가 있었다.
교육자로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어쩌면 바로 그런 때다. 아이들이 내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힘으로 움직이는 순간. 교사가 만든 틀을 넘어 아이들 스스로 음악 안에서 살아나는 순간. 그것은 몰입의 경험.
그날의 공연은 완벽하지 않았다. 대형은 조금 흐트러졌고, 장단도 몇 번 흔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공연만큼은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 가장 선명한 무대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중국 하늘 아래에서 울린 우리 장단. 아이들의 땀과 웃음, 담장 너머 낯선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던 뜨거운 5월의 공기.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학생들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친다. 물론 지금 근무하는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운동장에 나가 진을 짜며 풍물놀이를 하기는 어렵다. 학교는 아파트 숲 한가운데 있고,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민원이 걱정된다. 흔히 학교 근처에 있는 아파트는 좋은 아파트라고 말하지만, 아파트 근처에 있는 학교가 늘 좋은 학교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음악교사에게는 참 조심스러운 환경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사물놀이가 좋은 음악수업이라고 믿는다.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아도, 말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장단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소극적인 아이도 북채를 잡으면 달라진다. 평소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아이가 장구를 치며 자기 박자를 찾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물놀이는 혼자 잘한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옆 사람의 소리를 듣고, 함께 숨을 맞추고, 같은 장단 안에서 서로를 기다려야 한다. 그 안에는 음악보다 큰 배움이 있다.
가끔 수업 중 아이들이 장단을 맞춰 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칭다오의 그 운동장이 떠오른다. 중국인들이 담장 너머로 바라보던 그날, 아이들이 약속보다 오래 장단을 이어가던 그 순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뛰던 젊은 교사였던 나.
그 모든 시작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개량한복을 입고 학교에 가라던 아버지의 무모한 우리 문화 사랑. 어린 나를 탈춤 전수관에 데려가 사물놀이를 배우게 했던 그 선택. 그때는 잘 몰랐지만, 결국 그 경험은 아주 먼 곳에서 다시 나를 찾아왔다. 칭다오의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아이들의 장단 속에서, 나는 오래전 아버지가 내게 심어준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오늘은 전화를 한 통 드려야겠다.
“아버지, 그때 저 사물놀이 배우게 하신 거요. 생각보다 오래 써먹고 있습니다.”
아마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실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어떤 장단은 한 번 배워두면, 아주 먼 곳에서도 다시 울린다는 것을.
여담
유치부 아이들에게는 장구를 가르쳤었는데
아이들은 재미있어했지만, 나는 아직까지 다시 경험한 적 없는 가장 힘들었던 수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