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후에 만나자

국제학교라고 하면 왠지 여유 있는 집 아이들이 다닐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해외에 살고, 외국 학교에 다니고, 부모님은 해외에서 사업을 하거나 주재원으로 근무하는 그런 그림 말이다. 실제로 우리 학교에도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고, 학업도 안정적이고, 외국어도 능숙한 아이들.


하지만 모든 아이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 반에도 여러 사정 속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어떤 아이는 아버지가 중국인이었는데, 출생신고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학교 안에서는 이름이 있고, 학년이 있고, 담임이 있고, 친구들이 있었지만, 국가라는 큰 시스템 안에서는 그 존재가 희미한 아이였다. 어린 나의 눈에도 그것은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교실에서는 분명히 내 앞에 앉아 웃고 떠드는 아이인데, 서류상으로는 어디에도 단단히 묶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다연이(가명)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어머니가 중국인이셨고, 한국어를 쓰고 읽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지만 학업 능력은 3학년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대화를 나눌 때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그 눈빛을 보면 답답함보다 먼저 미안함이 들었다. 아이가 게으른 것이 아니라, 그동안 충분히 배우고 익힐 기회를 얻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주변 선생님들이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하 선생님, 기초 학습이 부족한 아이들 데리고 방과후 수업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그 말은 단순히 공부를 더 시키자는 뜻만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집에 일찍 돌아가도 제대로 돌봄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있으니, 학교에서 조금 더 머물며 어른의 눈길 안에 있게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교사로서의 사명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냥 그 아이들이 조금 마음에 밟혔다.


그렇게 작은 방과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학생은 딱 세 명이었다. 우리 반 5학년 여학생 두 명, 그리고 3학년 남학생 재영이(가명). 재영이는 얼굴이 하얗고 몸집이 작은 아이였다. 귀여운 외모와 달리 수학 앞에서는 금세 얼어붙었다. 기본적인 사칙연산도 자주 헷갈렸고, 다연이는 분수 개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수학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문제는 나 역시 학창 시절 소문난 수포자였다는 점이다.


수학은 나의 인생에서 늘 멀리 있는 과목이었다. 음대 입시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고, 완벽에 가까운 문과 체질이었던 나에게 수학은 정복해야 할 산이라기보다 피해 가도 되는 거대한 벽에 가까웠다. 그런 내가 중국의 한 국제학교 교실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처음에는 나도 은근히 긴장했다. 혹시 아이들이 물어보는 문제를 내가 틀리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도 다행히 어린 시절 끊임없이 풀었던 눈높이 학습지의 기억이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다. 분수는 피자 조각으로 설명하고, 나눗셈은 사탕을 나눠주는 이야기로 풀어갔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제법 진지하게 문제를 풀었다. 하지만 그 집중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선생님, 오늘 우리 반에 무슨 일 있었는지 아세요?”


“선생님, 재영이 누나가 누군지 아세요?”


“선생님, 저 어제 엄마한테 혼났어요.”


문제집은 펼쳐져 있었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자꾸 옆길로 샜다.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많이 끊었다. 방과후 수업도 수업이니까. 약간의 돈을 받고 하는 수업이었기에 이 시간의 목적은 공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이것부터 풀고 이야기하자”라고 말하며 다시 연필을 쥐게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문제풀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국어 시간은 더 어려웠다. 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오래 지낸 아이들은 한글을 읽고 쓰는 데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자음과 모음의 개념도 명확하지 않았고, 글씨를 쓰는 획순도 제각각이었다. 특히 받침은 거의 난장판이었다. ‘밥’을 ‘바’로 쓰고, ‘꽃’을 ‘꼬’처럼 읽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살아온 나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다. 그래서 더 자주 답답해했고, 더 쉽게 혼냈다. 한글을 읽고 쓰는 일은 삶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 아이들에게는 언어가 곧 정체성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국어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조금 엄격했다. 지금 돌아보면 미안한 장면도 많다. 아이들의 부족함을 보며 그 아이가 걸어온 시간을 먼저 상상했어야 했는데, 나는 자꾸 결과만 바라보았다.


그 방과후 수업은 반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학습 능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을까.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었지만, 교사의 욕심만큼 빠르게 변하지는 않았다. 거북이처럼 앞으로 가고 있었지만, 멀리서 보면 제자리걸음처럼 보였다. 숫자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고, 받침을 조금 덜 틀리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큰 성장을 말했다면 과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간은 실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방과후 수업은 공부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문제집 옆에 자기 마음을 슬쩍 올려놓기 시작했다. 가정 이야기도 나왔고, 친구 관계 이야기도 나왔다. 중국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외로움, 한국말을 잘 못해서 생기는 부끄러움, 부모님의 바쁨 속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들. 초등학생에게도 고민은 참 많았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작아 보여도, 아이들에게는 자기 세상 전체를 흔드는 문제들이었다.


정해진 수업 시간이 끝나도 우리는 바로 헤어지지 않았다. 매점에 가서 과자를 사 먹기도 하고, 빈 교실에 앉아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차피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셔틀버스를 타려면 5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교무실에 가면 괜히 뭔가 일을 해야 할 것 같았고, 그럴 바에는 아이들과 앉아 있는 편이 더 좋았다. 젊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상담이라는 말을 잘 몰랐다. 전문적인 기법도 몰랐고, 아이들의 마음을 분석할 능력도 없었다. 그저 많이 들어주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웃고, 때로는 “그랬구나”라고 말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그 단순한 반응만으로도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수업시간에는 말이 없고 친구들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방과후 교실에서는 누구보다 활발해졌다. 재영이는 문제를 풀다가 갑자기 자기 집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다연이는 한글 받아쓰기를 틀리고도 웃으며 다시 쓰겠다고 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이상하게 벅찼다. 아이들은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아직 마음 놓고 배울 자리를 충분히 가져보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방과후 수업은 학습 보충 시간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간은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연습을 하는 자리였고, 누군가와 마주 앉아 끝까지 대화해보는 자리였고,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고 느끼는 자리였다. 수학 문제는 많이 못 풀었지만, 아이들은 그 시간 속에서 자기 삶을 조금씩 설명하는 법을 배워갔다. 나 역시 교사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지식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갔다.


나이가 들수록 더 자주 느낀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결국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하고, 공동체 안에 속하고 싶어 한다. 학교가 해야 할 일도 어쩌면 그 지점에 있다.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이가 자기 이야기를 꺼내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곳. 누군가 자기 말을 끝까지 들어준다는 경험을 만들어주는 곳.


요즘은 그런 시간을 만들기가 참 쉽지 않다. 업무는 많아졌고, 학생과 따로 시간을 내어 오래 이야기하는 일에 대한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나에게 방과후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처럼 마냥 학교에 남아 아이들과 과자를 먹으며 수다를 떨 수는 없다. 그래서 가끔은 그 시절이 더 그립다.


고요하던 학교 건물 안, 몇 명의 아이들과 나만 남아 있던 교실. 문제집 위에 연필 자국이 남고, 과자 봉지가 바카라상 한쪽에 놓이고,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가 저녁까지 이어지던 시간. 그곳에는 분명 교육이 살아 있었다. 시험 점수로 증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이들과 내가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이제는 그 아이들이 어떻게 컸는지 궁금하다. 아직 중국에 살고 있을까.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결혼을 했을까. 누군가의 부모가 되었을까. 혹시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묻고 싶다.


“그때 방과후 수업 기억나니?”


그리고 아이들이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어쩌면 그 시간은 나에게 더 오래 남은 수업이었으니까.


나를 조금 더 교사답게 만들어준, 그 조용한 방과후 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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