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반이 되자, 나를 둘러싼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늘 같이 연습실에 앉아 악기를 불던 선배들은 하나둘 유학 이야기를 꺼냈고, 동기들 역시 독일이니 미국이니 하며 오디션 준비를 시작했다. 음대 특유의 공기다. 겉으로는 “잘 되겠지” 웃고 있지만, 사실 모두가 알고 있다. 결국 살아남는 사람은 몇 안 된다는 것을.
나 역시 장래를 고민했다.
악기 실력은 그럭저럭이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압도할 만큼 뛰어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알고 있었다. 무한경쟁 슬롯인 대한민국에서 연주 실력만으로 그 친구들을 이길 자신이 없다는 걸.
그때 내가 가진 건 교직이수를 통해 얻은 음악 교원자격증 하나였다.
그래서 임용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음악대학 후배 몇 명과 스터디 그룹도 만들었다. 문제는, 우리 중 누구도 제대로 시험을 준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음악대학 안에서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정보도 없었고, 방향도 없었다. 누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마치 지도 없이 밤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처럼 문제집만 붙들고 있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불합격이었다.
그때 나는 나름 머리를 썼다. 경쟁률이 낮아 보이는 지역을 골라 지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험은 잔머리로 되는 게 아니었다. 결국 얻은 건 “실력이 중요하다”는 너무도 당연한 교훈뿐이었다.
그리고 유난히 추웠던 어느 12월이 찾아왔다.
졸업은 다가오는데 갈 곳은 없었다. 주변 친구들은 대학원 진학을 하거나 고시를 준비했고, 누군가는 유학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백수’라는 단어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냥 쉬었음.’
나중에 이력서에 그렇게 적히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냥 고시생’으로 남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간제 교사 자리를 닥치는 대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기간제 교사 카페가 거의 유일한 정보 창구였는데, 매일 공고 게시판을 새벽까지 뒤적였다.
원서를 스무 군데쯤 넣었던 것 같다.
결과는 처참했다.
아무 데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겁도 없었다. 서울에 있는 사립학교 정교사 채용에도 지원하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늘 비슷했다. 1차에서 떨어지거나, 면접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경력도 없는 졸업 예정자였고, 자기소개서조차 어설펐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늘 하던 것처럼 기간제 교사 공고 게시판을 뒤적이는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글 하나가 있었다.
‘중국 칭다오 국제학교 교사 모집’
원래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모집 과목에 ‘음악’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이상하게 손이 멈췄다. 학교 소개를 읽어보니 한국 교육부 인가는 받지 않았지만, 중국에 체류하는 한국 학생들을 위한 국제학교였고, ‘한국부’가 따로 운영되고 있었다. 숙소도 제공한다고 했다.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중국어를 단 한 마디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고민했다. 아무 경력 없는 졸업 예정자를 뽑아줄 리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자꾸 흔들렸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중국’이 아니라, 어디든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를 원했던 것 같다.
결국 지원서를 냈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계속되는 불합격에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고 혼자 기차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목적지도 없이 표를 끊고, 창밖만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기차가 천안쯤 지나고 있었을 때였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서류 합격을 축하합니다. 면접은 부산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으로 ‘학교에서 일하기 위한 면접’을 보게 되었다.
부랴부랴 여행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 시절 연주회 때마다 입던 검은 정장을 꺼내 다림질했다. 정장은 조금 촌스러웠고, 어깨도 어색하게 컸다. 하지만 그 옷을 입고 면접을 보면 교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계속 혼잣말을 했다.
‘제발 뭐라도 되게 해주세요.’
면접장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은 생각보다 따뜻한 분위기로 나를 대해주셨다. 나는 최대한 밝고 긍정적인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과할 정도로 웃었던 것 같다. 실제로 성격은 아주 내향적인데 말이다.
그리고 며칠 뒤, 합격 연락이 왔다.
그 겨울,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다음 해 2월, 나는 김해공항에서 칭다오행 비행기에 올랐다. 커다란 이민가방 하나와 적당한 크기의 캐리어 하나가 내 전부였다. 비행기가 이륙하던 순간의 기분을 아직도 기억한다. 두려웠고, 막막했고, 이상하게 설레기도 했다.
칭다오 류팅공항에 도착하자 학교 행정직원 한 분이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서툰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고, 커다란 짐을 차에 실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처음 보는 중국의 풍경이 펼쳐졌다. 오래된 건물들과 번쩍이는 신도시가 한 화면 안에 함께 있었다. 낡은 자전거 옆으로 외제차가 지나갔고, 이름 모를 중국어 간판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리고 그 낯선 도시에서, 내 첫 교직생활이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참 서툴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끔 그때가 그립다. 아무것도 가진 건 없었지만,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고, 실패하면서도 계속 다음 문을 두드리던 시절.
아마 그래서인지, 나는 당분간 그 시절 이야기를 조금 더 꺼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