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칭다오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다.
공항에서 처음 숙소로 들어왔을 때의 낯섦은 이제 조금씩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살게 된 아파트는 한국에서 어릴 적 보던 주공아파트를 떠올리게 했다. 방 세 개에 화장실 하나, 그리고 거실이 계단처럼 반 층씩 나뉘어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처음에는 왜 굳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싶었는데, 사람은 참 신기하다. 한 달도 안 돼서 그 계단에 앉아 양꼬치를 배달시켜 먹으며 TV를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같은 숙소에는 국어 선생님이 함께 살게 되었다. 나보다 열 살은 더 많으셨는데, 첫 만남부터 형처럼 대해주셨다. 해외 생활 경험도 있었고 성격도 호탕해서, 낯선 중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밤이면 둘이 칭다오 맥주 한 병씩 들고 창밖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쌤, 중국은 적응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거에요."
그 형님의 말이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아파트 단지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내가 살던 곳이 38동이었는데, 끝까지 가보면 50동이 넘게 있었다. 동과 동 사이의 거리는 한국 아파트 단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광장도 여러 개 있었는데, 아침마다 풍경이 달라졌다.
잔디 광장에서는 개를 산바카라시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무대가 있는 광장에서는 태극권 수련이 한창이었다. 시멘트 광장에는 아침 시장이 들어섰다. 출근길에 옥수수 한 개와 따뜻한 콩국물 한 봉지를 먹고가곤 했는데, 그 맛이 꽤 괜찮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 아침 공기와 옥수수 냄새는 칭다오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 중 하나다.
그렇게 조금씩 중국 생활에 적응해가던 어느 날.
드디어 업무분장이 발표되었다.
교사에게 업무분장은 일종의 운명과도 같다. 어떤 학년을 맡느냐, 어떤 업무를 맡느냐에 따라 1년의 행복이 결정되기도 한다.
교감 선생님이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며 업무를 발표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다.
"하 선생님."
"네."
"5학년 담임입니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5학년?
처음에는 중국의 학제가 한국과 다른 줄 알았다. 고등학교 2학년쯤 되는 학년을 5학년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음대를 졸업한 중등교사였다. 대학 시절 실습도 고등학교에서 했고, 교생실습 때 만난 학생들도 모두 고등학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열두 살짜리 초등학생 담임이라니.
거기에 병설 유치원 음악수업 두 시간.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전 학년 음악수업.
지금이라면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진심으로 멘붕이었다.
그 시절에는 '멘붕'이라는 말이 참 유행했는데, 그 단어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교무실을 몇 바퀴나 돌며 선배 선생님들에게 물어봤다.
"저... 중등교사인데 초등 담임도 가능한 건가요?"
"가능하니까 시켰겠죠."
"그래도 법적으로..."
"여기는 중국이잖아요."
한 방에 정리되는 답변이었다.
그랬다.
여기는 중국이었다.
한국 교육부가 아니라 중국 교육당국의 인가를 받은 학교였다. 한국의 제도와 기준을 들이밀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행히 젊었다.
젊음의 가장 큰 장점은 적응력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나는 교직 인생 첫 담임 학급을 맡게 되었다.
학생 수는 열다섯 명.
그리고 남학생 세 명, 여학생 열두 명.
이 숫자를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교사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 열두 명이 모여 있는 교실은 생각보다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매일이 사건의 연속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교무실 문이 열렸다.
"선생님!"
그리고 또 다른 아이.
"선생님!"
그리고 또 다른 아이.
"선생님!!"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말을 들었다.
"선생님, ○○가 제 필통 만졌어요."
"선생님, ○○가 아까 저를 째려봤어요."
"선생님, ○○가 단체 사진에서 저만 안 예쁘게 나왔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당황했다.
이게 정말 상담할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에게는 모두 중요한 문제였다.
어른의 기준으로 보면 사소한 일도, 열두 살 아이들의 세상에서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나는 매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토라졌고, 누군가는 화가 났다.
그리고 나는 하루 종일 중재자가 되었다.
어느 날은 점심시간에만 세 명이 울었다.
한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으면 또 다른 아이가 와서 말했다.
"선생님, 저도 할 말 있어요."
그 시절 나는 음악교사보다 상담교사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 피곤했는데, 아이들이 싫지는 않았다.
늘 교무실까지 찾아와 고자질을 하던 아이들.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 업어주세요!" 하며 등에 매달리던 아이들.
숙제를 안 해놓고도 해맑게 웃던 아이들.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은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중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한국 아이들.
친척도 없고, 친구도 자주 바뀌고, 부모님은 대부분 회사 일로 바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방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스승과 제자라기보다는 같은 배를 탄 동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돌이켜보면, 그 열다섯 명의 아이들이 내 첫 제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들을 통해 교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
지식을 전달하기 전에 마음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
칭다오의 작은 교실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다.
아마도 진짜 교직생활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