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이(가명)는 첫 제자였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또래보다 훨씬 성숙한 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키도 컸고, 생각도 깊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경계쯤에 서 있는 아이 같았다.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기였기에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지만, 이상하게도 반 친구들은 그런 수빈이를 잘 따랐다. 우리 반의 중심에는 늘 수빈이가 있었다.
다행히 그 중심은 좋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상담을 핑계 삼아 수빈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사실 상담이라고 해도 거창한 내용은 아니었다. 중국 생활은 어떤지, 한국에 가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은 무엇인지, 요즘 좋아하는 연예인은 누구인지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대화들이 쌓이면서 나는 수빈이와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봄이 지나고 여름이 가까워졌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교실에 들어가 조회를 하려는데 빈자리가 하나 눈에 띄었다.
수빈이 자리였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몸살이라도 걸렸나 싶어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수빈이 오늘 아프다고 들은 사람 있니?”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별일 아닐 수도 있었다. 담임교사는 작은 이상 신호에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교무실로 돌아와 곧바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렸다.
그리고 연결되지 않았다.
중국어는 잘 못했지만, 부재중 안내 메시지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업체를 운영하고 계셨기에 평소 연락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중국어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옆자리 국어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중국인 아내와 결혼해 오랫동안 중국에 거주하신 분이라 중국어가 원어민 수준이었다.
잠시 듣고 계시던 선생님이 말했다.
“전화기가 꺼져 있네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 연락 없이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학생.
연결되지 않는 부모님.
그리고 꺼져 있는 휴대전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곧바로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께 보고드렸다. 교민 슬롯에 인맥이 넓으셨던 교장선생님은 알아보겠다고 하셨고, 우리는 일단 연락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당시 칭다오에는 15만 명이 넘는 한국 교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교민 슬롯의 결속력도 강했다. 금세 소식이 들릴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나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갔다.
유치원 수업에서 아이들과 장구를 치며 웃었고, 점심도 평소처럼 먹었다. 매점에서 탄산음료를 사 마시며 잠시 쉬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의 호출이 왔다.
교장실 문을 열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교장선생님은 잠시 말을 고르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하 선생님... 수빈이네가 한국으로 들어간 것 같아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교감선생님이 덧붙였다.
“공장 정리하고 야반도주했대요.”
그제야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당시 중국에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값싼 인건비를 찾아 중국으로 진출했던 한국 기업들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인건비는 오르고 기술 격차는 줄어들었고, 사업 실패로 큰 빚을 떠안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수빈이 얼굴이었다.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떠나야 했던 그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 연락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 쫓기는 상황이라면 친구와 연락하는 것조차 부담이 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인생 첫 제자 한 명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허탈했다.
하지만 슬퍼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남은 열네 명의 담임교사여야 했다.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의 눈높이로.
그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결국 거짓말을 했다.
“수빈이네가 한국으로 급하게 이사를 가게 되었대. 여러분한테 인사도 못 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하더라.”
곧바로 질문이 쏟아졌다.
“선생님, 그럼 이제 못 만나는 거예요?”
“연락도 못 해요?”
“왜 갑자기 간 거예요?”
나는 대부분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 아무것도 못 해주고 보냈잖아요.”
그리고 이어진 말.
“편지 쓰면 전달해 주실 수 있어요?”
순간 울컥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대답해버렸다.
“응. 선생님이 전달해 볼게.”
그날 방과 후.
내 바카라상 위에는 열 통이 넘는 편지가 쌓였다.
예쁜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글씨들.
‘한국 가서도 행복해야 돼.’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보고 싶을 거야.’
‘우리 잊지 마.’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순수한 방식으로 이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결국 그 편지들은 보내지 못했다.
주소도 몰랐고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그 편지들을 버리지 못했다.
십오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우리 집 창고에 그 편지들이 남아 있다.
가끔은 내가 그날 거짓말을 한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편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어쩌면 순간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때의 아이들에게는 진실보다 위로가 필요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지금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어느 날, 정말 우연히 수빈이가 내 앞에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교감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사실은 소문에 불과했으면 좋겠다.
수빈이는 어디선가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그 편지를 전해줄 날이 오기를.
나는 아직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내 첫 제자였던 그 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