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지금까지 살면서 내 인생에 이런 유쾌한 경험은 처음이였어요.
오늘을 선물해 준 곰돌이 푸우, 고마워요.
토요일 오후 2시에 만난 푸우는 예나 지금이나 늘 한결같다. 굳이 우리에게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동안 세상살이를 배우며 나이를 조금 먹었다는 것뿐....
푸우를 알게 된 지가 어느 덧 25년째이다. 나는 지금도 푸우를 만나면 2001년의 대학시절로 향하는 타임머신에 오른다.
우리는 2년간 대학시절을 공유했었는데, 푸우의 따뜻했던 시선이 여전히 내 마음에 머무는 이유는 20대의 순수하던 우리의 청춘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대학 2학년이었을 때 이미 대학원 1학년이던 94학번 푸우는 같은과 학부생들에겐 매우 엄격하고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수업 과제를 부여하고, 실험실 수업에 조교 활동을 하던 푸우가 학부생들에게는 친절했을리가 만무하다. 그럼에도 푸우는 철딱서니 없고 심지어 타과생이던 나를 결코 밀어내지도 않고, 무생물(컴퓨터/기계/나사/인두기)과 남자만 가득하던 LAB실을 활짝 오픈해주며 언제든 나의 방문을 환대해줬다. LAB실에 놀러가면 의자 하나를 꺼내어 자리를 마련해 줬고, 심지어 LAB실 안에 대학원생과 학부생들 모두 연구중이라 해도 나에겐 들어오지 말라는 저지 한번이 없었다. 가끔 늦은 밤시간 LAB실 대항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열리는 날이면 게임에 젠병인 나도 끼워줬고, LAB실 멤버들의 아지트인 학교 앞 'Last Exit'로 맥주 한잔하러 오라며 수시로 나를 챙겨줬다. 그 때의 내 남자친구는 LAB실 막내 학부생으로 선배들을 하늘처럼 대하는 중 이었지만, 철부지였던 나에게 푸우는 조건없이 다정했고 여동생처럼 품어주던 무한정 좋은 대학원생 오빠였다.
푸우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학교를 졸업했고, 오랫동안 사랑해오던 이와 결혼을 해서 가정도 이뤘고, 그 이후 다른 전공길을 선택하며 지금은 의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수천 아니 수만명의 아픈 환자들의 수술을 바카라임지고 있어 병원 내에서 상당히 실력좋은 의사로서 명망도 높았다.
그토록 바쁘기만 하던 푸우가 나와 자신의 직속 후배인 내 남편을 위해 쪼개기도 아까운 귀한 시간을 냈다. 후배의 건강 적신호에 몹시 마음 쓰여하는 푸우는 우리에게 여행을 제안했고, 그의 마음 씀씀이에 깊이 감사하며 흔쾌히 여행을 떠났다.
"오빠, 왕산 해수욕장 어때요? 의정부에서 영종도까지는 한 시간쯤 걸리니깐 동해바다보다 훨씬 가깝고 바다 보기에도 괜찮치 않을까요?"
푸우의 오케이 사인에 우린 최초 목적지 동해안을 과감히 포기하고 인천 영종도로 차를 몰았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래전부터 한 두달 간격으로 이 곳을 찾았다는 푸우는 왕산해수욕장부터 용유도해변과 마시안해변, 구읍포구까지 영종도의 숨은 명소를 샅샅이 알고 있는 영종도 현지인 이상의 탐험가였다. 함께 찾은 왕산해수욕장 카페에서 음료 한잔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고, 구읍포구에서는 유람선에 차를 실어 노을지는 하늘 배경에 갈매기에게 새우깡도 줬다. 영종도 건너편 월미도에 가서는 풍족하리만큼 융숭한 저녁을 대접받았고, 인형뽑기에서는 5만원이나 들여 내 손에 작은 토끼 인형 두개를 쥐어줬다. 월미도 광장 의자에 앉아 편의점표 맥주도 마시고, 12만원짜리 거대한 폭죽을 서해 밤하늘에 쏘아 올리며 우리의 하루 일정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그 날의 모든 경비를 전폭 지원하면서 많은 것을 베풀어주던 푸우는 자신의 후배가 느끼고 있는 상심을 깊이 위로했고, 푸우 역시 반나절을 오롯히 우리와 함께 보내면서 스스로의 아픔을 크게 위로하는 듯 보였다.
우리는 모두가 많이 아픈 사람들이었다. 몸도 많이 아프고, 마음은 더 많이 아프고,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수많은 이해타산에 치여 곳곳에 상처가 남아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보다 조금 더 어른이었던 푸우는 40대 중반 언저리에서 길을 헤메는 나와 남편을 학창시절처럼 따뜻하게 품어줬고, 그도 우리를 향해 많이 웃었으며, 내 남편은 푸우 덕분에 더 많이 그리고 더 크게 웃었다.
어린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은 나에게 타임머신과 같다. 어린 시절(굳이 시기를 지정한다면 대학시절까지)의 한 부분을 공유했던 그들을 다시 만나면 나는 언제나 우리의 옛 모습이었던 그 날로 돌아간다. 푸우와 함께 있는 순간에도 그러하다. 푸우의 눈빛과 음성을 마주할때면 94학번 대학원생이던 풋픗한 푸우가 눈앞에 서있다. 남의 LAB실을 시선의식 없이 내맘대로 드나들며 어리광 부리던 철부지 대학생 시절의 나, 아마 마냥 귀엽지만은 않았을터였을텐데 그저 철없게 봐주고 무한정 예뻐해주던 LAB실 캡틴 푸우가 한없이 고마웠다.
푸우를 다시 의정부 집 앞으로 잘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오늘 너무 행복했어. 형이랑 같이 시간을 보낸게 말도 못하게 좋았어. 여행 같이와줘서 고마워. 나 이제 좀 괜찮아 진 것 같아. 형이 내가 받아온 약 보고서 걱정말래, 이 약들은 함량이 아주 낮은거라 의존적이지 않다고... 밥 잘 먹고 약 잘 챙겨먹으면 괜찮아 질꺼래.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형 얘기를 들으니깐 나 이제 좀 마음이 놓여"
푸우에게 이 고마운 마음을 어찌 갚아야 할까. 남편은 오늘의 여행이 너무 좋았다며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즐거움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앞으로도 약 잘 먹고 잘 쉬고 아픈 것도 잘 나아서 다음에도 푸우랑 함께 또 여행오자. 다음번에는 우리가 전폭적으로 비용을 지원할테니 꼭 오셔서 함께 타임머신 타고 대학교 때로 여행가자고. 의대 뒤뜰 잔디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러 가자고, 학교 복도에서 탁구도 치고, LAB실에서 스타크래프트도 하고, 밤샘 연구를 마치면서 김치 사발면 끓여먹고, 밤새 술마시고 새벽부터 찾아가 선지해장국 먹던 그 시절로 함께 여행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