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재료? 참가예술과 클레어 비숍
참여예술 100년 사를 다룬 바카라의 제목이 왜 하필 "Artificail Hells, 인공 지옥"일까요? 클레어 비숍은 직접 답을 적어뒀습니다. '인공지옥'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 1921년 봄 파리에서 벌어진 '다다 대시즌(Grande Saison Dada)'을 결산하며 쓴 글의 제목을 가져옵니다. 아시듯이 다다의 이벤트들은 관객을 편안하게 하는 행사가 아니었어요. 관객을 도발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야유와 투척을 유도하는 소동이었습니다.
비숍은 여기서 참여의 다른 면을 봅니다. 참여는 처음부터 화합이 아니라 불편에서 출발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제목은 참가예술에 대한 칭찬이자 부정적인 면으로도 동시에 쓰이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이 바카라의 제목 '인공지옥'은 참가예술에 대한 긍정적 기술이자 부정적 기술로 함께 읽히도록 의도됐다.
The book's title, Artificial Hells, is intended to serve both as a positive and negative descriptor of participatory art.
2004년의 논문이 하나의 전시 경향을 겨눈 저격성글이 었다면, 2012년의 이 바카라은 100년 참여예술 계보를 정리한 역사서로 볼 수 있습니다. 클레어 비숍은 참여예술의 분출을 세 개의 연도에 묶습니다. 1917년(러시아혁명), 1968년(68혁명), 1989년(현실슬롯주의 붕괴)로 참여가 유행한 시기는 예술 내부의 사정이 아니라 정치적 격변의 시기와 겹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집단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했던 순간마다 예술이 관객을 불러들였다는 겁니다.
알프레도 자르는 카라카스의 주민들에게 일회용 카메라를 나눠주고, 빅 무니스는 리우의 파벨라 아이들을 위한 미술학교를 세우는 이런 사건들을 논평 없이 쏟아집니다. 처음 읽을 때는 왜 이렇게 시작하나 싶었는데, 지금은 이 형식 자체가 진단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참여는 이미 범람이라서, 하나하나 논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문장의 속도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목록 다음에 비숍이 하는 일이 이 바카라에서 제가 가장 오래 들여다본 대목입니다. 이름 정리입니다.
스튜디오를 벗어난 이 실천들은 지금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슬롯참여예술, 커뮤니티 기반 예술, 실험적 공동체, 대화적 예술, 리토럴 아트, 개입주의 예술, 참가예술, 협업 예술, 맥락 예술,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소셜 프랙티스. 나는 이 경향을 '참가예술(participatory art)'이라 부르겠다. '상호작용(interactivity)'이 가리키는 일대일 관계와 달리 여러 사람이 관여한다는 뜻을 담고 있고, '슬롯 참여'라는 말의 모호함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This expanded field of post-studio practices currently goes under a variety of names: socially engaged art, community-based art, experimental communities, dialogic art, littoral art, interventionist art, participatory art, collaborative art, contextual art and (most recently) social practice. I will be referring to this tendency as 'participatory art', since this connotes the involvement of many people (as opposed to the one-to-one relationship of 'interactivity') and avoids the ambiguities of 'social engagement'.
열 개의 이름. 한 분야에 이름이 열 개라는 건,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아무도 합의하지 못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숍은 그 난립을 먼저 보여주고 나서 자기 용어를 말하고 있어요. 여러 사람이 관여하는 것(참가)과 한 사람이 시스템을 상대하는 것(상호작용), 즉 이름을 고르는 행위가 곧 이론의 시작이라는 걸 이 대목이 보여줍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자꾸 요즘 전시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의 그 전시들도 이름이 많거든요. 미디어아트 전시, 컨버전스 아트, 디지털 아트, 몰입형 전시, 이머시브 등 티켓과 보도자료마다 다른 이름이 붙습니다. 이름이 많다는 건 여기서도 같은 뜻일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 아닐까요?
따라서 이 바카라은, 연극과 퍼포먼스가 그렇듯 사람이 중심 매체이자 재료가 되는 참여의 정의를 축으로 짜여 있다.
This book is therefore organised around a definition of participation in which people constitute the central artistic medium and material, in the manner of theatre and performance.
사람이 재료라는 표현이 재미있는데, 그림이나 조각에 비교하면 물감이나 대리석의 자리에 사람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동사를 보면 비숍이 고른 말이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작품에 참여'하게 되는(become)'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작품을 '구성한다(constitute)'는 것.
관객이 나중에 초대되는 손님이 아니라, 관객이 없으면 작품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질료라는 겁니다. 지난 글의 시에라를 떠올리면 이 정의가 왜 무서운지 보입니다. 보를 지고 선 사람들이 없으면 그 작품은 존재하지 않고, 재료가 된 사람에게는 임금이 지급됩니다. 어쩜,
그렇다면 요즘 전시장의 관객은 어느 쪽일까요. 몸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고, 화면이 반응하고, 티켓에는 "당신이 주인공"이라고 적혀 있는 그 전시들에서 관객은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일까요? 아니면 완성된 시스템의 사용자일까요? 비숍의 구별을 빌리면 전자는 참가이고 후자는 상호작용인데, 지금의 저는 요즘 전시들의 많은 수가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구별이 그렇게 깔끔하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관객은 비용을 지불하고, 전시를 구성하는 재료로서 작용되고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클레어 비숍은 서론에서 선언을 하나 더 합니다. 능동적 관객과 수동적 관객이라는 구분 자체가 무익하다고요.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는 관객은 정말 수동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