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적 관객과 수동적 관객
요즘 전시장에서 많이 보는 관객유형은 전시 인증샷 찍고, 다음 전시방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죠. 그 사이에 가끔, 그림 앞에 가만히 서서 오래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이런 분류의 관객을 '진짜 관객'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뭔가 전시 인증샷이나 사진만 찍고 지나가는 쪽은 뭔가 가볍고, 멈춰 서 있는 쪽은 진중하게 느끼는 거겠죠.
사례로 드는 전시가 대표적이지는 않지만, 서울 워커힐의 몰입형 전시 '빛의 시어터' 공식 소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관람객은 수동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관람하며 몰입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수동적 감상을 '뛰어넘어야' 할 것으로 놓는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전시장 안에서는 멈춰 서서 보는 사람이 진짜 관객 대접을 받는데, 소개문 안에서 보기만 하는 관람은 넘어서야 할 과거입니다. 어느 쪽이든 관객의 몸짓을 두고 좋은 관람과 나쁜 관람을 가르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비숍은 『인공지옥』 서론의 마지막에서 이 판정의 축 자체를 버립니다.
지금 이 담론은 '능동' 관객과 '수동' 관객이라는 무익한 이분법을 너무 자주 맴돈다. […] 이 바카라의 중심 과제는 과정에만 매달리는 대신, 참가예술이 생산해 내는 의미에 초점을 맞춰 그것을 설명할 길을 찾는 것이다.
At present, this discourse revolves far too often around the unhelpful binary of 'active' and 'passive' spectatorship. […] The central project of this book is to find ways of accounting for participatory art that focus on the meaning of what it produces, rather than attending solely to process.
클레어 비숍, 『인공지옥』 서론 중에서
여기서 눈여겨볼 단어는 '무익한(unhelpful)'입니다. 틀렸다(wrong)는 의미가 아니라,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관객이 몸을 움직였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순간 비평이 끝나버리고, 그렇게 되면 질문이 사라지게 되죠.
이 표현 뒤에는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해방된 관객』(2008)이 있습니다. 랑시에르의 주장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보는 것 자체가 이미 능동이다. 관객은 보면서 비교하고, 해석하고, 자기 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니 "수동적인 관객을 활성화하겠다"는 기획은 도와주겠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관객이 수동적이라는 전제를 먼저 깔아야 성립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활성화라는 선의가 불평등을 전제하는 구조가 돼버립니다.
비숍이 여기에 보태는 고유한 개념이 '2차 관객(secondary audience)'입니다. 어떤 참가예술도 참여자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장에 없던 사람들은 그 작품을 사진으로, 기록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로 만납니다. 그리고 수로 따지면 언제나 이쪽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비숍은 서론을 이 문장으로 닫습니다.
관객은 지워 버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서 거기 존재한다. 그러므로 관객성의 정치는 분석을 요구한다.
참가예술이 그 사실을 부인하려 할 때조차, 아니 바로 그럴 때 더욱 그렇다.
…the historical fact of our ineradicable presence requires an analysis of the politics of spectatorship, even – and especially – when participatory art wishes to disavow this.
- 클레어 비숍, 『인공지옥』 서론 중에서
어떻게 보면 저도 2차 관객이 되는 거죠. 티라바니자의 팟타이도, 시에라의 보를 지고 선 사람들도, 전부 사진과 글로 만났으니까요. 그런데 그 2차 관람이 저를 움직여서 이 글을 쓰게 만듭니다. 보기만 한 것치고는 많은 일이 일어난 셈이죠. 이렇듯 능동과 수동의 축으로는 이 일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 관객이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를 묻는 대신, 그 전시가 관객을 어디에 놓도록 설계됐는가를 물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전시가 관객을 존중하는 전시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거꾸로 가만히 서서 보는 관객만이 진지하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인증샷이든 전경이든 사진을 찍고 지나가는 사람을 가벼운 관객으로 판정하는 것도, 결국 같은 축 위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다만 이 구분을 버리고 나면 문제가 하나 남습니다. 그럼 전시가 좋은지 나쁜지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할까요? "인공지옥"의 서론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클레어 비숍은 역사로 들어갑니다. 100년을 가로지르며 비숍이 보여주려는 것은 하나입니다. 같은 '참여'가 시대와 체제에 따라 정반대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겁니다.
다음 글에서는 어느 시기의 어떤 장소에서는 저항이었던 참여가 어디서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