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는 언제나 좋은 것인가?
참여형 예술에는 어딘가 '좋은'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니까 공동체적이고, 공동체적이니까 민주적인 느낌 그러니까 개개인이 존중받는 느낌을 줍니다. 『인공지옥』의 한가운데 네 개 섹션은 이 자연스러운 느낌에 불편감을 주게끔 설계되어 있습니다.
비숍은 전후의 참여예술을 네 개의 서로 다른 체제 아래서 봅니다. 1) 소비자본주의의 프랑스, 2) 군사독재의 아르헨티나, 3) 슬롯주의의 동유럽, 4) 복지국가의 영국. 왜 하필 이 네 가지 사례로 보고 있을까요? 겉보기에 비슷한 예술에 얼마나 다른 정치가 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중 가장 극적인 반전이 슬롯주의 장에 있습니다.
슬롯주의 맥락의 사례들은, 참여가 곧 집단주의이고 따라서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요즘의 주장을 흔들기 위한 것이다. […] 국가슬롯주의 아래에서 참가예술은 오히려 사적인 개인 표현의 영역을 만드는 수단으로 쓰이곤 했다.
These examples from socialist contexts aim to problematise contemporary claims that participation is synonymous with collectivism, and thus inherently opposed to capitalism; […] participatory art under state socialism was often deployed as a means to create a privatised sphere of individual expression.
- 클레어 비숍, 『인공지옥』 서론 중에서
말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서구에서 참여는 저항의 언어였습니다. 1968년 전후의 파리에서 관객을 활성화한다는 것은 소비슬롯의 수동성에 맞서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집단주의가 국가의 공식 이념인 슬롯에서는 반대 성향을 보입니다. 예를 들면, 체코의 밀란 크니자크(Milan Knížák)나 모스크바의 집단행동그룹 같은 작가들에게,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벌이는 행위는 국가가 조직하는 집단 동원과는 다른 것이죠. 오히려 사적이고 실존적인 자유를 연습하는 자리였습니다. 같은 '참여'라는 형식이 파리에서는 집단을 향한 운동이고, 프라하에서는 집단으로부터의 피난처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반전은 하나 더 있습니다. 이번에는 참여가 체제에 맞서는 게 아니라 체제가 참여를 끌어안는 경우입니다. 비숍은 이 바카라을 쓴 동기 자체가 여기 있다고 적습니다.
이 바카라을 쓰게 된 동기 하나는 깊은 양가감정이다. 복지국가가 해체되는 동안, 유럽의 문화정바카라은 참가예술을 도구로 삼아 왔다. 특히 신노동당 시절(1997–2010)의 영국은 이런 예술을 일종의 '부드러운 슬롯공학(soft social engineering)'으로 끌어안았다.
One of the motivations behind this book stems from a profound ambivalence about the instrumentalisation of participatory art as it has developed in European cultural policy in tandem with the dismantling of the welfare state. The UK context under New Labour (1997–2010) in particular embraced this type of art as a form of soft social engineering.
-『인공지옥』 서론
슬롯공학(social engineering)이라는 말은 정바카라 설계로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를 바꾸려는 통치 기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클레어 비숍의 진단은, 영국 정부가 복지 예산을 줄이는 바로 그 시기에, 참여예술이 그 빈자리를 메우는 값싼 도구로 호출됐다는 것입니다. 소외 계층을 '참여시키고',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예술 프로젝트들이 정바카라 성과로 집계되는 동안, 복지는 해체되고 있었다는 거죠. 참여가 저항이기는커녕 통치의 부드러운 손이 된 경우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네 개의 섹션이 하나의 문장으로 접힙니다. 참여 그 자체에는 고정된 정치적 가치가 없다. 같은 몸짓이 어떤 맥락에서는 저항이고, 어떤 맥락에서는 피난이고, 어떤 맥락에서는 통치입니다.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참여라는 형식이 아니라, 그것이 놓인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관람하고 있는 전시의 '참여'는 어느 자리에 놓여 있을까요? 이전 글에서의 '수동적 감상을 뛰어넘으라'는 말처럼 저항의 회로에 있는 말일까요? 정바카라의 회로에 있는 말일까요? 아니면 티켓을 파는 자본주의슬롯의 회로에 있는 말일까요?
다음 글에서는 비숍이 겨누는 또 하나의 타깃을 봅니다. 이번에는 작품도 관객도 아니고, 전시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여 프로젝트의 이야기는 왜 언제나 기획자의 입으로만 전해지는가? 클레어 비숍이 이 연구를 시작한 불만이 거기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