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뒷방 ② Claire Bishop

적대와 관계미학

byWenza

2004년 가을, 미국의 미술 이론지 『옥토버(October)』 110호에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 논문이 실립니다. 「적대와 관계미학(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의 저자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은 영국 출신의 젊은 미술사학자였습니다. 부리오의『관계의 미학(Esthétique relationnelle)』을 저격하듯이 쓴 글이었죠. 하지만, 부리오의 글을 무너뜨리기보다, 그에 대한 존중이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비숍은 부리오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부리오의 바카라은 동시대 미술의 최근 경향을 식별해 낸 중요한 첫걸음이다.
Bourriaud's book is an important first step in identifying recent tendencies in contemporary art.


더불어 비숍은 큐레이터의 현장 감각으로 쓰였다는 점도 인정하면서 시작합니다. 비숍이 문제 삼은 것은 진단이 아니라, 진단 다음에 와야 할 질문이 빠져 있다는 거죠.


'관계미학'에서 그 관계들의 질은 한 번도 검토되거나 의문에 부쳐지지 않는다.
The quality of the relationships in "relational aesthetics" are never examined or called into question.


작품이 관계를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그 작품은 어떤 관계를 말할까요? 부리오의 틀 안에서는 대화가 생기기만 하면 그 관계는 자동으로 민주적이고, 따라서 좋은 것이 됩니다. 이 부분에는 비숍은 바로 그 자동 승인을 끊고 질문을 다시 씁니다.


어떤 유형의 관계가, 누구를 위해, 왜 생산되고 있는가?
What types of relations are being produced, for whom, and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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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비숍(우측) 니콜라 부리오(좌측)

이 질문을 들고 비숍은 지난 글의 그 장면 — 티라바니자의 303 갤러리 — 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전시에 대해 비숍이 찾아낸 실질적인 기록은 단 하나, 『아트 인 아메리카』에 실린 제리 솔츠(Jerry Saltz)의 리뷰뿐이었습니다. 그 리뷰에 적힌 테이블의 얼굴들은 이렇습니다. 폴라 쿠퍼, 리사 스펠먼, 데이비드 즈워너 — 아트 딜러들과의 식사가 이어지고, 오가는 것은 업계 가십과 전시 뒷얘기와 추파들이었죠. 비숍이 보기에 이 리뷰가 증언하는 것은, 작품이 좋다고 평가되는 이유가 결국 미술계 사람들끼리의 네트워킹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만약 그 공간에 진짜 '망명(asylum)'을
구하는 사람들이 들이닥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image.pngRirkrit Tiravanija untitled 1990 pad thai


4년 뒤 쾰른에서 티라바니자는 한 걸음 더 나간 버전을 만듭니다. 자기 뉴욕 아파트를 쾰른 쿤스트페어라인 안에 실물 크기로 재현하고 24시간 개방한 것(《무제 1996 (내일은 또 다른 날) Untitled (Tomorrow Is Another Day)》). 사람들이 부엌에서 밥을 해 먹고, 욕실에서 씻고, 침대를 차지했습니다. 지역 신문은 이 작품을 "모두를 위한 일종의 '망명처(asylum)'"라고 불렀어요. 비숍은 바로 그 문장을 받아칩니다 — 그런데 여기서 '모두'란 누구인가? 티라바니자의 미시유토피아는 공공 문화를 바꾸겠다는 야심을 접고, 그 범위를 갤러리에 다니는 사람들끼리의 사적인 즐거움으로 줄인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괄호 안에 짓궂은 상상 하나를 접어 넣습니다. 만약 그 공간에 진짜 '망명'을 구하는 사람들이 들이닥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여기서 비숍이 꺼내는 개념이 '적대(antagonism)'입니다. 정치철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샹탈 무페(Chantal Mouffe)에게서 가져온 말인데, 요지는 이렇습니다. 민주주의는 갈등이 사라진 화합의 상태가 아니라, 갈등의 전선이 계속 새로 그어지고 드러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등 없이 화기애애한 관계만 만드는 예술은 민주적인 게 아니라,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지운 예술이 됩니다. 비숍이 대안으로 드는 작가들 —사람을 고용해 그들 자신으로서 수행하게 하는 산티아고 시에라(Santiago Sierra), 토마스 히르쉬호른(Thomas Hirschhorn)— 의 작업을 그는 '관계적 적대(relational antagonism)'라 부릅니다. 화합 위에 서는 게 아니라, 화합처럼 보이기 위해 눌러둔 것을 드러내는 데서 출발하는 작업인 것이죠.


image.png《벽에 수평으로 지탱되도록 제작된 600×57×52cm의 오브제》(2001)

위 사진의 작품은 《벽에 수평으로 지탱되도록 제작된 600×57×52cm의 오브제》(2001)입니다. 목재와 아스팔트로 만든 보의 한쪽 끝은 벽에 걸쳐져 있고, 반대쪽 끝은 고용된 노동자들이 두 명씩 교대로 어깨에 지고 버팁니다. 시급은 20 스위스프랑, 약 12달러였습니다. 노동자들은 고용되어 노동을 하면 되고, 관람객은 노동하고 있는 사람을 관람하게 됩니다. 그런데 취리히에서 이 보를 지고 서 있던 사람들은 지역 당국을 통해 고용된, 서로 다른 나라 출신의 정치 난민들이었습니다. 비숍이 괄호 안에 접어 넣었던 바로 그 사람들, 티라바니자의 식탁에는 끝내 오지 않았던 '망명'을 구하는 사람들이, 시에라의 전시장에서는 임금을 받고 작품의 무게를 지고 서 있는 겁니다. 산티아고 시에라의 작업은 아래의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aoYNgnDUl8


그렇다면, 비숍은 '더 착한', '더 좋은' 예술을 말하고 있을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비숍은 관계예술이 국제 테러리즘에 관한 게시판 작품을 만들거나 난민에게 공짜 카레를 나눠주는 식으로 슬롯적 양심을 키워야 한다고 제안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갈등을 품을 수 있는 구조인가, 지우는 구조인가' 이죠.


그런데 이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서 제게 남은 인상은, 반박문이라기보다 계승문에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리오는 바카라에서 이미 "작품이 생산하는 관계를 판정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공존의 기준(criteria of co-existence)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두고요. 그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 정작 부리오 자신이 아니라 비숍이었던 겁니다. 비숍은 논문 말미에서 자기 과제를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동시대 미술이 관객을 어떻게 호명하는지 분석하고, 그것이 생산하는 관객 관계의 질을 평가하는 것'이죠.


2006년 겨울, 『옥토버』 115호에 반박이 실립니다.*쓴 사람이 부리오가 아닙니다. 관계미학의 대표 작가로 거론되던 리암 길릭(Liam Gillick)이 대신 응답했고, 비숍은 같은 호에서 "사실관계 정정은 받아들이지만 내 논증의 이론적 기반은 건드리지 못했다"고 재응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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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am Gillick, Pinboard Project(1992) 중 일부

부리오는 비숍에게 공개적으로 답한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몇 년 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비판에는 공개 응답문을 썼습니다. 철학자에게는 답하고 비평가에게는 답하지 않은 이 비대칭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지금의 저는 전시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부리오 쪽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말이 오가고, 그 자리가 작품이 되는 걸 저는 여전히 믿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 세어보라는 비숍의 요구를 들은 뒤로는, 제가 만들어온 자리들이 예전처럼 편안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약을 먹은 것처럼요.


클레어 비숍은 이 논문(「적대와 관계미학(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을 8년 동안 키워서 2012년에 바카라 한 권으로 냅니다. 제목이 살벌합니다. 『인공지옥(Artificial Hells)』입니다. 참여예술의 100년 사를 다룬 바카라의 제목이 왜 지옥인지 — 그 바카라의 첫 페이지를 여는 것이 다음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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