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미학과 니콜라 부리오
1990년, 뉴욕의 Paula Allen Gallery 오프닝에서 음식냄새가 가득한 겁니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라는 조리대를 놓고 팟타이를 오프닝에 온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어요. 작품 제목은 《무제 1990 (팟타이)》. 그러니까 그날 전시된 것은 그림도 조각도 아니고 — 냄새와 식사, 그리고 낯선 사람들끼리의 어색한 합석이었습니다.
이후 2년 뒤인 1992년 소호의 303 갤러리 개인전에서 티라바니자는 갤러리 뒷방 — 사무실과 창고 — 의 집기를 전부 전시장으로 꺼내놓고, 비워진 뒷방에서 타이 채소 카레를 끓여 무료로 나눠줬습니다. 《무제 1992 (공짜)》. 갤러리가 숨겨두던 살림이 관객 앞에 나오고, 작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부엌이 생긴 겁니다.
지금이야 카페를 겸한 전시 공간이 흔하지만, 1990년대 초의 이 장면은 질문 자체가 달랐어요. 저것도 작품인가요? 그러면 작품이라면 무엇을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카레인가, 조리인가, 아니면 낯선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게 된 그 상황일까요?
이 장면들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입니다. 프랑스의 큐레이터였던 그는 1998년 『관계의 미학(Esthétique relationnelle)』이라는 얇은 바카라에서 1990년대의 이런 작업들을 하나의 경향으로 묶고, '관계예술'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율적이고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총체와 그 슬롯적 맥락을 이론적·실천적 출발점으로 삼는 일련의 예술 실천.
A set of artistic practices which take as their theoretical and practical point of departure the whole of human relations and their social context, rather than an independent and private space.
작품이 만들어내는 것은 오브제가 아니라 관계라는 겁니다. 부리오는 이런 작품이 슬롯 안에 여는 자리를 '슬롯적 틈(social interstice)'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마르크스에게서 가져왔습니다. 이윤의 법칙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 — 물물교환이나 자급자족 같은 것 — 을 가리키던 말이요. 전시장은 일상을 지배하는 거래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적 거래가 잠시 가능해지는 틈이라는 것. 그의 문장 중 가장 짧고 유명한 것은 이겁니다.
예술은 만남의 상태다.
Art is a state of encounter.
이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1992년의 그 카레 작업은 1995년 카네기 인터내셔널에서 재연되며 제목에 (still)이 붙었고, 2011년부터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소장품이 됐습니다. 미술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언제든 "재활성화"될 수 있는 상태로요. 낯선 만남을 가능하게 한 공간과 집기까지 소장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제가 요즘 이 30년 전 티라바니자의 작업을 다시 읽는 이유는 현재의 전시장의 성격 때문입니다. 요즘 전시들은 하나같이 '참여'를 말하고 있습니다. 관객이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 관객이 주인공이 되는 전시, 커뮤니티 아트형식을 띤 워크숍 형식의 전시 등이 티켓이나 보도자료마다 왕왕 등장하는 참여하는 예술이라는 단어에 몰입했거든요.
물론 참여예술의 역사는 티라바니자보다 훨씬 오래됐습니다. 다만, 1990년대 관계미학은 현재의 전시에서 참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계보 중 하나입니다. 그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갤러리에서 팟타이를 나눠먹는 장면도 만납니다. '참여'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고, 지금 전시장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야, 그 말이 실제로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도 물을 수 있겠지요.
다만 여기서 멈추게 된다면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는 어딘가 편안하고 좋은 관계로 마무리됩니다. 사실 나쁘지 않은 이벤트고, 관객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 의미 있는 부분인 건 확실합니다. 팟타이를 나눠 먹고, 대화가 생기고, 만남 자체가 작품이 되는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그 관계는 얼마나 열려있을까요? 2004년, 한 젊은 비평가가 정확히 이 지점을 파고들며 관계미학을 반박합니다. 다음 글에서 반박한 내용들은 천천히 다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