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털실 상자

나는 무엇으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을까?

by수키

어느 날이었어요

어디를 보아도 내가 찾는 그곳이 보이지 않는

무표정의 사람들과 회색의 콘크리트로 꽉 막혀 있는 건물 안에서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몰랐어요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나는 바깥으로 나와 우두커니 서서 건물 안으로도, 빗속으로도

뛰어들지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서 망설이고만 있었어요


자주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미궁을 헤매다 놀라 깨곤 한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예민한 기분에 사로잡혀 더욱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날은 도서관에 신청해 놓은 글쓰기 수업을 듣는 날이었다. 동네 도서관에서 상주 작가 프로그램으로 작가와 함께 에세이를 쓰는 수업이다. 요즘 글쓰기 의욕이 떨어진 터라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나긴 방학을 보낼 것 같은 예감에 고민 없이 선택했다. 아침부터 비가 많이 왔다. 무겁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도 무거워졌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왜 꿈속에서조차 빗속으로 뛰어들지 못했을까. 가까스로 수업을 마치고 동네로 돌아와서 재택근무 중인 남편과 밖에서 점심을 먹었다.


— 당신은 꿈을 잘 꾸는 편이야?

— 꾸지. 그런데 잘 까먹어.

— 나는 안 까먹어. 잘 꾸는데, 그 꿈이 늘 생생하니까 피곤해.


우연히 유튜브에서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을 봤다. 모든 사람은 꿈을 꾸지만, 다 기억하지 못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유독 꿈을 잘 기억하는 사람들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에 놀라 깬 날이면 더 피곤했던 거구나. 조금이라도 고민되는 일이 있으면 그 마음은 꿈이 되어 나타났고, 그런 꿈은 며칠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얼마 전에 꾸었던 그 꿈 역시 그랬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내 발목을 꽉 붙들고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바카라방에서 읽었던 그림바카라이 떠올랐다. 맥 바넷과 존 클라센의 그림바카라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의 주인공 애너벨은 어느 날 갖가지 색깔의 털실이 들어 있는 상자를 발견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자신의 스웨터를 만들고, 남은 털실로 강아지, 친구, 선생님까지 모두에게 스웨터를 만들어 주었다. 계속 스웨터를 만드는데도 털실은 끊임없이 나왔고, 새하얀 눈과 굴뚝에서 나온 까만 검댕밖에 보이지 않는 작고 추운 마을은 애너벨이 만든 스웨터로 뒤덮였다. 그리고 ‘애너벨은 행복했답니다’ 하고 이야기를 마친다. 세상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털실로 포근하게 감싸 준 애너벨처럼 ‘나는 무엇으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마도 그건 글쓰기일 거라고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내가 글쓰기에 대해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글쓰기는 재밌다’라는 단순한 마음 때문이었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에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뒤엉켜 있는 머릿속 단어들을 원하는 모양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려웠다. 생각을 한 올 한 올 풀어 보고, 쓰고, 지우고, 고치고 다시 엮었다. 처음부터 나에게 딱 맞는 글을 완성할 수는 없었지만 그 과정이 나를 설레게 했다. 재미있는 글쓰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서 교육봉사로 아이들에게 그림바카라을 읽어 줄 때마다 함께 글쓰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제법 글을 잘 썼다. 나에게 주어진 수업 시간은 40분이었는데, 그림바카라을 읽다 보면 정작 아이들이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아이들에게 글을 써 보자고 하면 어렵다고, 무얼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막막해했다. 무슨 내용이어도 된다고, 그저 쓰고 싶은 걸 쓰면 되고, 쓰고 싶은 데까지만 써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슨 내용을 쓸까 고민하기도 하고, 자신이 쓴 글을 서로 읽어 주며 깔깔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글쓰기에 대해 더 잘 알려 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나를 현재로 이끌었다. 내가 빗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은 것은 어쩌면 조금 더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한 마음의 무게일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을 새롭게 알아 가고 있다. 한 코 한 코 꿈을 엮어 나가는 중이다. 재미로 글을 썼을 때는 마음대로, 원하는 만큼 쓸 수 있어서 좋았던 글쓰기가 막상 배우고 나니 내 글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흔히 이런 시기를 ‘내 글 구려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글을 많이 쓰지 않았다. 그 병에 걸리기에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글쓰기는 자신만의 털실로 스웨터를 뜨는 것과 닮았다. 한 올 한 올 털실로 스웨터를 엮듯,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엮어 나만의 글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내 스웨터를 만들고 나면 남아 있는 털실로 또 다른 누군가를 따뜻하게 감싸 줄 스웨터를 만들어 주어야지.





+ 이야기 나눈 그림바카라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Extra Yarn, 2012년)

맥 바넷 글, 존 클라센 그림, 홍연미 옮김, 길벗어린이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