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상상할까?
‘세상을 잘 보기 위해서는 맑은 눈으로 봐야 한다고 하지만 가끔은 흐린 눈으로 바라봐도 좋지 않을까?’ 하고 그림바카라 《마일로가 상상하는 세상》을 보며 생각했다. 주인공 마일로는 지하철을 타고 가며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 그림을 그리다 도착지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자신이 왕자님일 거라 짐작했던 아이가 자신처럼 교도소에 있는 엄마를 만나러 온 처지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을 판단할 때 그 사람에 대해 보던 것을 알기도 전에 지레짐작을 판단할 때가 많다. 나 역시 그런 실수를 자주 범했다. 어릴 때에는 또래 아이들 모두가 친구였다. 몇 살인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상관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점차 나와 ‘맞는’ 사람을 곁에 두려 했다. 몇 마디 대화에서 취향이 비슷하면 금세 거리를 거리를 좁혀서 다가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얄팍한 믿음은 늘 깨지기 쉬운 살엄음과 같아서 잘 미끄러지고, 쉽게 부서졌다. 어떻게 하면 관계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지난 상반기에 서울장애인복지관에서 들었던 <시민옹호활동가> 교육의 오리엔테이션 일정이 드디어 9월에 잡혔다. 짝꿍이 누구일지 기대하며 복지관으로 찾았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수줍은 눈인사를 나누었다. 첫 만남인 만큼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이름과 나이, 좋아하는 음식과 취미 그리고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하면서 보내는지 등의 다양한 질문들이 오갔다. 짝꿍에 대해 알게 된 정보는 그날의 대화가 전부였다. 나보다 다섯 살이 어리고, 카페에서 커피 마시기를 즐기며, 수세미 만들기와 그림 그리기, 물건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도 웃으면서 휴대폰과 종이에 글씨를 써서 보여주는 다정한 사람이다. 다음 만남은 짝꿍의 어머니와 상의해야 한다고 했기에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카지노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사실 내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가 어떤 장애를 갖고 있는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활동 시 주의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미리 걱정하고 앞서 계획하려 애썼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알아가고 싶었다. 오리엔테이션 당시에 짝꿍에게 좋아하는 것에 대해 묻다가 문득 짝꿍이 싫어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짝꿍은 계단을 싫어한다며, 특히 버스 계단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럼, 제 손을 잡고 내려가는 건 괜찮아요?”라고 묻자 짝꿍의 표정이 다시 밝아진다. 이렇게 한 걸음 가까워진 걸까. 짝꿍의 미소에 그만 몇 계단을 훌쩍 뛰어올라갈 뻔했지만, 오늘은 딱 한 계단만큼의 거리를 좁힌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음 만남에서는 함께 반찬 만들기를 하기로 했다. “어머님, 복지관에서 반찬 만들기 행사를 하는데 ○○씨가 좋아하는 활동이면 참여해 볼까요?” 하고 메신저로 묻고 난 후, 일정을 잡았다. 우리가 누군가를 통하지 않고 연락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짝꿍이 언젠가는 내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날이 올까. 이름으로 혹은 언니라는 호칭으로 편하게 이름을 불러도 된다는 내 이야기에 짝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달 장애인의 경우 친구보다는 활동가 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호칭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고 교육 내용이 떠올랐다. 짝꿍도 시민옹호활동이 처음이라고 했으니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시력이 점차 나빠져 첫 안경을 맞춘 날, 안경사는 처음 맞춘 렌즈는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아이들이 잘 보이는 게 어떤 건지 처음에는 잘 모르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6개월 뒤, 아이는 다시 새 렌즈로 교체했다. 그동안 뿌연 안경을 끼고도 잘 보인다고 말했던 아이는, 새 렌즈로 바꾸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세상이 너무 잘 보인다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세계가 아닌,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흐린 눈’을 경험해 보는 것도 필요하겠다고. 지레짐작과 편견이라는 도수 높은 안경을 잠시 벗어두고 조금 흐릿하게 상대를 바라볼 때, 오히려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 이야기 나눈 그림바카라
마일로가 상상한 세상 (Milo Imagines the World, 2021)
맷 데 라 페냐 글, 크리스티안 로빈슨 그림, 김지은 옮김, 북극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