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왜 ‘가장 슬펐던 공주’로 기억되고 싶었을까?
“엄마, 나 걱정이 있어.” 아이의 이 한마디에 잠들지 않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이에게 그림바카라을 읽어 주기 시작한 이후로 열한 살이 된 지금까지 함께 누워 바카라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 시간은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에 자주 그림바카라의 주제를 벗어나 수다를 나눌 때가 많다. 무슨 걱정이냐고 물어보자, 아이는 친한 친구와 놀이 중에 생긴 불편함에 대해 토로했다. 그러고는 무엇이 서러웠는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아이가 흘리기 시작하는 눈물에 내 마음도 시큰거렸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아이에게 내색하지 않고, 나를 보며 우는 그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아이가 말하기 시작하고, 나는 듣기 시작한다. 아이가 말하고, 나는 듣고, 생각을 얘기한다. 아이가 말하고, 나는 듣고, 생각을 얘기하고, 멈춘다. 아이가 말하고, 나는 듣고, 생각을 얘기하고, 멈추고, 듣는다. 이 과정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아이의 고민 상담사가 된 지 10년 차에 접어드니 나도 제법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아이의 말과 눈물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날 밤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상담이 끝나서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대뜸 “엄마, 상담 센터 해 봐. 잘할 거 같아.”라며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웃음이 났다. 그동안의 노력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가 그만큼 성장한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걱정을 털어내고 잠든 아이의 모습이 그저 평온해 보여서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아이와 함께 콩알만 한 걱정이 커다란 슬픔으로 변해 버린 공주의 이야기를 담은 안 에르보의 《콩알만 한 걱정이 생겼어요》를 읽었을 때에도 “이 공주는 너랑 비슷한 것 같아.”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조심성이 많았던 아이는 말도 많았다. 그래서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에 대해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서 이야기해 주니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하는 말 중의 대부분은 엉뚱한 걱정들이었고,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한도였다. 하지만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던 그 걱정들은 곧잘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곤 했다. 아이가 여덟 살 때, 방과 후 활동 공개 수업 시간에 같은 반이었던 아이에게 얼굴을 맞아서 담임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본다고 했다. 하교 후, 아이에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다른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사과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원했던 방법이 아니었는지 선생님에게 말하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나도 그랬다. 이 사건 이후로 아이의 문제에 나서지 않기로 결심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을 찾는 것은 아이의 몫으로 남겨 두자고 생각했다. 그 후로도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상을 이야기한다. 넘쳐나는 이야기에 나의 걱정도 함께 넘쳐나곤 한다. 하지만 자신의 걱정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저 슬픔에 빠져있는 공주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온 세상이 잠겨버릴 만큼 슬퍼하는 공주를 보면서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든지 말하지 않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정작 그녀의 걱정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사람이 없기에, 그녀가 그렇게 눈물만 흘리고 있는 걸까. 하지만 눈물로는 걱정을 해결할 수 없다. 들어주는 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마저 포기하면 애초에 자신의 걱정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음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어릴 적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던 부모님에게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마음을 털어놓았던 날, 그것을 깨달았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누군가가 묻지 않아도 먼저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런 면에서 아이는 재능을 타고났다. 점점 아이가 말하는 속도를 따라가기 벅차서 몇 번 되묻곤 한다. 그런 내 태도에 실망하며 말하기를 포기할 법도 한데, 아이는 기어코 말하고 만다. 나 역시 듣기를 거부할 법도 한데 기어코 듣고야 만다. 다행히 나는 듣는 재능을 타고난 것 같다. 종알종알 말할 때마다 움직이는 아이의 양 볼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매번 궁금하다. 하루는 아이가 바카라을 다 읽고는 나에게 “자, 이제 나한테 궁금한 거 물어봐 봐.”라고 동그랗게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엄마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자신이 있다는 당당함이 보였다. 어린 시절 내가 하지 못했던 것을 하는 아이가 그저 부럽기도 했다. 나에게 걱정이 있다며 울었던 다음 날, 아이에게 걱정은 잘 해결했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오늘도 그냥 놀았는데?”라며 웃으며 말했다. 역시, 걱정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날 밤, 아이가 나의 상담에 만족했던 것도 어쩌면 마지막 눈물까지 기다려 준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 이야기 나눈 그림바카라
콩알만 한 걱정이 생겼어요(2007)
안 에르보 지음, 양진희 옮김, 함께자람(교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