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받아주는 곳이라면

귀촌체험

by서윤재

아직 온라인 게임에 다니고 있을 무렵,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살이 20년 차가 다 되어가는 친구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현실적인 여건만 받쳐준다면, 지방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고, 아니 살고 싶다고 했다. 특히 지리산 부근의 산청이라는 지역이 참 좋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곳에 예쁜 카페가 하나 있는데, 거기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는 산청이라는 지역명도 낯설었는데, 그 친구의 마음속에 산청이라는 곳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다가왔다. 서울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 언젠가 살아보고 싶은 곳을 마음 한구석에 쉼표처럼 하나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지방의 인구소멸지역에 가면 숙소도 지원해 주고 지원금도 준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는 그런 것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며 아쉬워했다. 그 이야기는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지내고 싶은 곳을 스스로 정해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서 온라인 게임을 다녔으니, 내게 중요한 것은 직주근접이었다. 하루를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출퇴근에 드는 에너지를 줄이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일은 너무나 고됐고, 온라인 게임과 가까운 곳에 사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싼 월세를 내면서까지 회사 바로 앞에 살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 근처였기 때문에 내가 살고 싶은 장소를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가진 예산 내에서 최선의 주거를 찾은 것이었다.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내가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한 어렴풋한 기준이 생겼지만, 실제로 내 기준을 충족시키는 공간에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조용하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살고 싶었지만, 좋은 조건에는 늘 그만한 경제적 대가가 따랐다.




유튜브에서 내 또래의 여자들이 시골에 내려가서 혼자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그런 삶을 살아보리라 꿈꾸었고, 최소한 50대에는 그렇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시골집에서 혼자 살아보는 것을 동경하면서도 온라인 게임에 다니고 있으니 선뜻 시골집에서 살아보겠다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골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프리랜서로 일하는 듯해서, 나도 언젠가 작가가 된다면 시골집에 내려가 글을 쓰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여자 혼자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것에 대한 슬롯적 인식이 부정적임을 알고 있다. 여자 혼자라는 조건과 별개로 시골살이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있고, 두 조건이 겹치면 부정적인 시너지 효과가 커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뉴스나 유튜브에서는 시골살이를 하면서 겪을 수 있는 텃새며 주민들의 사생활 침범 등에 대해 경고하고 있었다.




시골에 사는 가까운 친척 어르신이라도 한 분 계셨다면 유년 시절 방학 때 시골 생활을 경험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만약 시골에 사는 지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시골 생활에 대해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런 기회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도시를 떠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평생 서울에서 살 것만 같았다. 언젠가 나이가 들면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시골살이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했다. 그런 내가 시골에서의 삶을 상상할 때면 좋아하는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오르곤 했다.




《리틀 포레스트》는 시골살이나 시골에서 해 먹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자신이 살아갈 곳을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이치코는 도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고향인 작은 산골 마을 코모리로 돌아와, 농작물을 기르고 사계절의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살아간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시골살이가 어떤 문제의 해결 수단으로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시골살이를 무작정 미화하거나 낭만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육체노동의 고됨과 시골 슬롯 특유의 답답함, 시골살이의 현실을 마주하며 겪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도 드러낸다. 시골 역시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노동의 현장이며, 그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고 해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육체노동에 진저리를 치다가도 묵묵히 밥상을 차려 먹는 일상 속에서, 인생이란 어디에 있든 고되고 불완전하다는 것, 그럼에도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메시지가 좋았다.




이 영화가 인상적인 건 주인공이 시골에 정착해 행복해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을 안은 채 마을을 떠나는 모습에서 오히려 마음 깊이 공감했다. 시골에 남든 도시로 떠나든 어느 쪽에도 완전한 답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다음 걸음을 내딛는 주인공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영화 속 주인공은 직접 만지고 느끼며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간다. 그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내가 원하는 삶을 머릿속으로만 고민하기보다 직접 경험하며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에서 사는 것이 꿈의 완성이나 결론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알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퇴사를 하게 되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커리어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문득 이제는 시골에 가서 살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시골에서 살아보는 것만큼은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이전 업계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였지만, 서울에서는 도저히 그 용기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은 모든 게 멈춰 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방부 처리된 채 시간이 박제된 듯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야속하리만큼 빨리 흘러갔다.




어떤 성장은 삶의 터전을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기도 한다고 믿는다. 어차피 온라인 게임 때문에 서울에서 살았고, 온라인 게임은 내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온라인 게임이 사라지니 서울이라는 바다에 내렸던 닻과 나를 묶어두던 고리가 끊어진 셈이었다. 이제는 어디로든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자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시골에서 생활하는 아는 사람도 없고, 지방에 사는 친척도 없었다. 시골살이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나는 뉴스에서 보았던 지자체의 인구 유입 정바카라을 떠올렸다. 숙소와 정착 지원금을 제공한다는 이야기에 관련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바로 ‘그린대로’였다. 이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운영하는 공식 귀농·귀촌 통합 플랫폼으로, 귀농·귀촌 준비 단계부터 농촌 정착까지 필요한 정바카라, 주거·농지, 일자리, 교육 등의 정보를 한 곳에서 제공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살아보기로 하더라도 어느 지역으로 가야 할지, 그곳에 가면 머물 곳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혼자 시골에 가서 지내는 일은 막막하고 두려웠다. 그래서 정부가 제공하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바탕으로 시골살이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그린대로의 살아보기 프로그램은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들이 이주 전에 관심 지역에서 일정 기간 직접 거주하며 농촌 생활과 일자리를 체험하고, 주민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었고,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혼자 텃밭을 가꾸는 정도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귀농보다는 귀촌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찾아보았다.




어디에서 살아보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를 받아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보자는 생각이었다. 부부 단위로 신청을 받는 경우가 많아 1인으로 지원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기에, 지원 가능한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지원해 보기로 했다. 우선 모집 중인 두 곳에 지원했는데, 한 곳은 강원도 양양군이었고, 다른 한 곳은 전라도 보성군이었다. 둘 중 어디라도 선발되면 가겠다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중, 양양군에서 먼저 선발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양양군에서 연락해 주신 사무장님이 꼭 오셨으면 좋겠다고 건넨 말 한마디에 마음이 움직였다. 마침 배우 선우용여의 에세이 『몰라 몰라, 그냥 살아』를 읽고 있었는데, 바카라에서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이 있었다. 한창 바쁘게 일하던 시절에도 먼저 하기로 한 일은 끝까지 해냈고, 나중에 더 좋은 조건의 제안이 들어와도 처음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그 대목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양양군에서 선발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뒤 보성군 지원을 취소했다. 그렇게 강원도 양양군에서 귀촌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전 17화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