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어 가만히...

치매를 앓고 계신 할머니와의 추억 이야기

by소임


"또 일을 벌였네... 일을 벌였어."


아침 일찍 일어나 바카라상 앞에 앉아 온라인카지노에 글을 쓰며 내게 되뇐 말이다. 미국에서 교수로 일을 하면 정년 보장 심사(Tenure Review)가 거의 가장 중요한 관문인데, 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그 학교에서 더 이상 근무할 수 없기 때문에 교수가 된 후 약 6년간은 정년 보장 심사를 위해 연구와 수업 그리고 학교 일에 매진해야 한다. 온라인카지노에 글을 쓰는 일은 나에게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시작했지만, 일하는 시간 외에 따로 글쓰는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는 않다. 나는 관심사가 참 다양하고 많다. 지금은 아니지만 박사 과정을 할 때에도 육아를 하며 밤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영상을 만들기도 하며 나는 나의 다양한 관심사를 탐구했고, 부업을 본업처럼 열심히 하기는 나의 전매특허였다.


"엄마, 세상에 왜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 많지? 나 지금 시간도 없고 너무 바쁜데..." 피곤한 얼굴로 엄마한테 투정을 했다.


"어릴 때는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하더니." 엄마는 놀리듯 피식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의 이런 모습을 가장 의아해한 사람은 우리 엄마인데, 엄마께서는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하고 싶은 게 없는 아이였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공부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길 원하셨지만 내가 관심 있는 것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나는 달리는 차 안에서 엄마의 옆모습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게, 어릴 땐 왜 그랬을까? 할머니가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그런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의 기억 속에는 언제나 할머니가 계셨다. 내가 잘 때도, 놀 때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언제나 할머니는 함께였다. 할머니가 자주 하시는 말씀 중 예쁘다는 말 이외에 기억에 남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울 애기 다칠까 무서"하고 "가만히 있어, 가만히있는게 최고야"였다.


나는 어릴 때 미끄럼틀도 잘 못 탈 정도로 겁이 많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할머니가 언제나 내 옆에서 내가 다칠까 봐 노심초사하셨기 때문이었다. 행여 내가 어디 부딪히기라도 하면 얼른 달려와 다리를 손으로 감싸며 호호 불어 주셨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빠 말씀으로는 내가 놀이터에 가면 그 흔한 미끄럼틀도 못 타고 맨 흙장난만 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내 기억에도 내가 처음 정글짐에 도전했을 때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고, 그것도 제일 친한 친구가 정글짐에서 못 놀면 쉬는 시간에 같이 놀지 못한다고 해서 도전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언니는 걸스카우트였고 걸스카우트에서 야외 캠프도 가곤 했는데 그게 좋아 보이셨던지 엄마는 나에게도 걸스카우트를 해 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나는 끝까지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할머니가 내가 걸스카우트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던 나는 엄마한테 걸스카우트를 안 하겠다고 하고 돌아와 할머니한테 얼른 말했다.


"할머니, 내가 걸스카우트 안 한다고 했어."


"잘했어. 가만히 있는 게 최고야, 가만히." 할머니는 행여 누가 들을까 낮은 목소리로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돈이 많이 들 것 같은 것이나 위험할 것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할머니의 손녀 역시 돈이 많이 들거나 위험할 것 같은 것은 하지 않길 원했다. 걸스카우트가 돈이 많이 드는 일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할머니가 보시기엔 그랬을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언니가 산으로 캠프까지 간다고 하니 할머니는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라고 생각하셨을 수 있겠다.


"할머니가 너한테 그랬어?"


엄마는 조금 격앙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매일 집에서 뒹굴뒹굴만 하는 딸이 뭐든 도전하게 해 주고 싶어 노력했던 엄마는 할머니에게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응, 할머니는 맨날 가만히 있는 게 최고라고 하셨잖아."


엄마는 지겹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뭐든 도전하고 공부하는 엄마는 정말 할머니의 그런 면을 하나도 닮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도 '어떻게 할머니 딸이 엄마지?'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둘의 성격은 너무 달랐고 지향하는 바도 달랐기 때문에 참 의아했다.


내가 성인이 되고 할머니와의 추억을 되돌아볼 나이가 됐을 때쯤 나는 비로소 할머니의 진짜 본모습은 무엇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옛날 분이고 학교를 오래 다니시지 못했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많고 언제나 신문을 읽으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명석하시다고 했다. 할머니는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고 나와 언니가 공부를 잘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셨는데 아이러니하게 내가 새롭게 무언가에 도전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왜일까 곰곰이 할머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어렸을 적 할머니가 지나가며 해 주신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각났다.


"일본 순사들이 온 집을 다 뒤져서 쇠로 된 건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져가. 곡괭이든 뭐든 상관없어. 밥 먹던 숟가락까지 다~ 가져가." 할머니는 심각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숟가락은 왜 가져간대? 그럼 뭘로 밥 먹어?"


"몰러, 전쟁에 쓸라고 하나 그냥 다 가져가 버려."


"그래서 어떻게 했어?"


"할머니 엄마가 집 뒷산에 땅을 파서 거기에다가 몰래 숨겨. 일본 순사가 못 찾게 땅을 깊~~이 파서 거기 숨겨 놓는 거야."


"그래서 안 들켰어?" 듣는 나도 긴장되어 양손을 부여잡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도 나중에 보면 다 가져가고 아무것도 없어. 할머니도 거기 숨어 있고 그랬지."


"할머니가 왜 거기 숨었어?"


"일본 순사들이 여자들을 데려가니까 할머니 엄마가 구덩이를 파서 거기 들어가 있으라고. 거기 구덩이를 파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꼼짝 않고."


"그래서 거기 숨어 있었어?"


"그치, 밤 캄캄해질 때까지 누가 데리러 올 때까지 꼼짝 않고 숨어 있지. 그런데 할머니는 몸이 원체 작아서 안 데리구 갔어. 어리고 작으면 안 델꾸 가."


나의 기억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초등학교 때쯤 할머니께 들었던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할머니는 그때 대략 열 살쯤 되었을 것 같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10대 때 광복을 맞이하고 여전히 어린 나이에 6·25 전쟁을 겪었다. 한창 성격이 형성될 어린 나이에 할머니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혹시 "가만히 있어. 꼼짝 말고 있어."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꼼짝 않고 있는 것만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수동적 방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참 부지런한 사람이었지만 언제나 꼼짝 않고 본인의 자리를 지켰다. 어린 나를 키우실 때도 할머니는 친구 한번 만나러 가지 않고 꼼짝없이 나와 함께했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낮잠 한 번 주무시는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언제나 바쁘게 쓸고 닦고 치우고 음식을 만드셨다.


중학교 때 다시 찾아간 어린 시절 내 유치원 원장 선생님마저 나를 보자마자 할머니의 안부를 물으실 정도로 할머니는 성실하셨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시계처럼 같은 시간에 나를 데려다주고 데리고 와 주셨다고 했다. 사실 그리 어리지 않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할머니는 매일 같은 시간에 나를 마중 나오고 데려다주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어깨에는 언제나 나의 짐들이 올려져 있었다.


"할머니는 잘 계시지?"


할머니가 시골로 귀향하시고 동네 어른들께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일 것이다.


"할머니가 네 가방 메고 너 데려다주시던 모습이 훤하네."


매일 신문을 읽고 뉴스를 보시던 할머니는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딸기잼에 방부제가 많이 첨가되어 있다는 기사를 보시고 그날 당장 시장에서 딸기를 박스째 사 와 밤새 끓이며 잼을 직접 만드셨다.


"울 애기들 먹는데 좋은 거 해멕여야지."


한여름 에어컨도 선풍기도 틀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할머니는 딸기가 냄비에 눌어붙지 않게 젓고 또 저었다. 중간중간 호호 불어서 한 숟가락씩 내 입에 넣어 주며 내 심사평을 듣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그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날 집에선 하루 종일 달짝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매 철 내 한약도 직접 달여 주셨다. 한약재를 받아다가 밤새 약한 불에 부채질을 하며 정성스레 달이고 포를 나무 막대기에 감아 주리 틀듯 꼭 짜서 먹이셨다. 나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 옆에서 쳐다보고 따라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는 쓰디쓴 한약 냄새를 지금도 좋아한다. 요즘은 한약도 다 일회용 용기에 전자레인지에 데울 수 있게 편리하게 나오는 걸 보면 참 우리 할머니 참 바쁘게 고생 많이 하셨다 싶다.


그렇게 할머니는 그렇게 언제나 그 자리에 가만히, 그러나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움직이셨다. 참 가만히 바쁜 분이셨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 만약 할머니가 지금 이 시대, 아니 늦어도 내가 태어났던 시대에 태어나셨다면 어땠을까?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은 적은 별로 없지만 간간이 해 주시는 이야기로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할머니는 아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으셨을까 싶다. 내가 아는 한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 인생을 산 적이 없으신 분이셨다.


거동이 불편해지고 치매가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주간 보호 센터에 다니신다. 할머니는 주간 보호 센터에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노래도 부른다고 하셨다. 그리고 엄마를 통해 들은 이야기는 할머니께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호강한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단 한 번도 할머니 자신을 위해 사신 적 없는 분이, 돈 드는 일이라곤 생전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해 본 적이 없으신 분이 그곳에서 이것저것 배우시는 것이 행복하시단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지고 인지가 불안정해진 지금에야 비로소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매번 "가만히 있는 게 최고야", "이거 너 해. 할머니는 필요 없어.", "할머니는 집에 있을 거야. 집에 있는 게 최고야."라며 새로운 것을 거부하시던 할머니가 사실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을 위해 배우고 탐구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몸이 불편해지기 전에 할머니 자신을 위해 이렇게 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마음에 속이 상하지만 지금이라도 내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할머니의 남은 생에는 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마음껏 즐기셨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은 물리적으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어지셨지만 이제는 본인만을 위해 가장 가만히 하지만 제일 바쁘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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