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와의 추억 이야기
"안아, 안아. 어부 어부!"
걸은 지 3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딸이 남편에게 안아 달라고 통통한 팔을 위로 쭉 뻗는다. 걸음마가 느리기도 했거니와 안겨 있는 걸 좋아하던 우리 딸은 걸음마를 해야 하는 시기에 언제나 남편한테 안겨 있었다. 근 15개월까지 잘 걷질 않아 병원을 다니기도 했던 터라 나는 걱정이 되었지만 남편은 딸이 안아 달라고 하기도 전에 이미 안고 다니거나 목마를 태우고 다녔다. 딸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성향인 건지 안고 있으려 하면 활어처럼 발버둥 치던 첫째와 달리 둘째는 안겨 있고 업혀 있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나 닮았나 보네."
남편한테 안겨 있는 어린 딸의 모습을 보며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나는 마실이라도 나갈라치면 언제나 꼭 할머니 등에 업혔다. 내가 처음 기억나는 게 만 세 살 이후이니 꽤나 컸었을 텐데 시장을 가든 남산을 가든 나는 할머니 등에 업혀 다닌 기억이 많이 난다. 지금은 고작 평균 키지만, 어린 시절 나는 키가 꽤 큰 편이었는데 그렇게 크고 통통한 나를 150cm도 안 되던 우리 할머니가 어떻게 업고 다녔을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죄송스럽다.
우리 집은 언덕 위에 위치해서 장을 보러 시장에 가려면 꽤나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했는데 나를 혼자 두고 장을 보러 갈 수 없었던 할머니는 언제나 내 손을 잡고 그 길을 오르락내리락하셨다.
"할머니, 힘들어. 나 다리 아파."
유치원에 들어간 후에도 나는 괜히 오르막길 중간쯤 오면 할머니한테 다리가 아프다고 징징거렸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그 자리에 바로 쭈그려 앉아 등을 보이며 말씀하셨다.
"업혀, 업혀. 할머니한테 업혀."
할머니는 검정 비닐봉지를 손가락에 걸고 거의 할머니만큼 커 가는 손녀를 업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헉... 헉..."
한참 후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내 귀까지 들리고 나서야 나는 "할미 내려. 이제 내려." 했던 것 같다. 그러면 할머니는 나를 내려 주고 허리를 뒤로 펴시며 말씀하셨다.
"이젠 걸을 수 있어? 소임이 걸어갈 수 있어?"
오르막길이 힘들기도 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그냥 할머니한테 업혀 있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 기억에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종종 할머니 등에 업혔는데 그 모습을 본 앞집 중국 할아버지께 호되게 혼난 기억이 난다. 왜 다들 '중국 할아버지'라고 불렀는지 알 순 없지만 내 기억엔 얼굴이 퉁퉁하게 둥그렇고 풍채가 좋으신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 빌라 앞 전원주택에 사셨는데, 할아버지가 대문을 열 때마다 살짝 보이는 빨간 장미꽃 활짝 핀 정원이 참 예뻤다. 중국 할아버지는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끼! 이놈! 어디 다 큰 놈이 맨날 할머니한테 업혀 다녀!"
처음 들어 보는 호통 소리에 깜짝 놀라 나는 얼른 할머니 등에서 폴짝 내렸다. 내가 몇 살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꽤나 컸을 때로 기억한다.
"할머니, 그렇게 키우면 못 써요. 그렇게 싸고 키우면 애 못 써요."
할아버지의 호통에 머쓱해진 우리 할머니는 작은 소리로 웅얼웅얼 말씀하셨다.
"내가 좋아서 그래요. 내가 좋아서. 얘가 원체 이뻐서."
그날 이후 나는 할머니 등에 업히는 걸 조금 자제했던 것 같다. 적어도 중국 할아버지 집 근처에서는 얼른 할머니 등에서 내렸다.
할머니의 허리는 50대부터 점점 앞으로 굽어 갔다. 어릴 때는 할머니 자세가 원래 그렇게 앞으로 치우친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드실수록 기역자로 굽어 가는 허리를 보며 나는 죄바카라감이 들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옆으로만 주무셨고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우실 때에는 꼭 발을 땅에 대고 다리를 천장 쪽을 향해 접고 주무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다리를 바닥에 붙이면 허리가 펴지지 않아서 그렇게 주무셨던 것 같다.
"할머니, 내가 어릴 때 많이 업혀서 그런가? 할머니 허리가 왜 이렇게 굽었지?"
"아냐~! 무슨! 내가 좋아서 업었지. 네가 업어 달라 안 해도 내가 좋아서 업었어. 너는 업어 달라고 잘 안 했어."
할머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업고 다니느라 힘들었다', '너 키울 때 고생했다'라는 표현도 내색도 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우리 소임이 애기 할 때가 제일 행복했어. 을매나 귀여웠다고. 소임이가 을마나 이뻐.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지." 하셨다.
심지어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할머니를 뵈러 가면 우리 아이들을 보며 말씀하셨다.
"애기들 업어 줘야 하는데. 할머니가 이래 생겨서 못 해 주네."
"무슨 애기를 업어, 할머니. 나 그렇게 많이 업어 줬음 됐지. 그래서 할머니 등이 굽었나 봐."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말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여전히 30년 전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냐~ 너는 하나 힘들게 안 했어! 내가 좋아서 업었지. 내가 업고 다니는 게 좋아서. 이뻐서 울 애기. 원체 이쁘니까 울 애기가."
"할머니, 중국 할아버지한테 혼난 거 기억나?" 나는 자꾸 나오려는 눈물을 누르며 슬쩍 주제를 돌렸다.
"그럼! 그때 그 할아버지한테 혼~~~났잖아, 할머니가. 애 그렇게 키우면 안 된다고. 내가 애 버릇 나빠지게 키운다고."
할머니와 나는 그때를 기억하며 깔깔 웃었다. 할머니도 그때 나처럼 좀 무서우셨나 보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왜 중국 할아버지라고 불렀어?"
"몰러. 어디 중국 어디서 왔나 봐. 할머니도 잘 몰러."
초등학교 2학년 때 할머니께서 귀향하시고 나서 나는 중국 할아버지와 조금 더 친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일 할머니와 붙어 다니던 내가 힘없이 혼자 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러셨나, 할아버지는 나를 보면 가끔씩 집에 들어가 중국 과자를 가져다 주셨다. 정말 중국에서 온 과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동그랗고 베어 물면 흰색 가루가 종이처럼 부서지는 과자였는데 내가 모르는 글씨가 쓰여 있고 슈퍼에는 팔지 않는 과자여서 나는 중국 과자라고 불렀다. 사실 내 입맛에 그렇게 맛있지는 않아 먹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중국 할아버지가 내게 간식을 주시는 게 좋았다. 그 후에도 가끔씩 같은 빌라에 살던 사진관 집 둘째 딸이랑 중국 할아버지랑 같이 주차장에 앉아 중국 과자를 먹었다. 그렇게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할머니의 빈자리는 할머니 등에서 느껴지던 온기처럼 천천히 내 안에 채워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중국 할아버지는 한참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 이사를 가신 건지 아니면 다른 집으로 가신 건지 그 후 몇 년을 보이지 않아 중국 할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했다. '이사를 가실 거면 나한테 말이라도 좀 해 주시지.' 생각했지만 그 당시 전화번호를 알던 것도 아니니 알 길이 없었다.
그 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하교를 하는데 집 근처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할아버지 한 분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묘하게 낯이 익었다. 겁이 많은 나는 얼른 눈을 돌리고 집에 들어가려 빠르게 걸었는데 내 뒤통수에 낯익은 호통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인사도 안 허냐! 이놈!"
중국 할아버지였다. 내가 기억하던 퉁퉁한 얼굴에 풍채 좋은 모습이 아닌 야위고 마른 모습이라 나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은 영락없이 나와 함께 쭈그려 앉아 과자를 먹던 어린 시절 나의 중국 할아버지가 맞았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멀찍이 걸어가시고 계셨다. 그때라도 얼른 쫓아가 인사할걸... 어디로 이사 가셨나 어떻게 지내셨나 안부라도 물을걸... 나는 잘 지내고 할머니도 귀향하셔서 잘 지내신다고 말씀드릴걸... 나는 그날 이후 용기 없던 소심한 나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날 이후 집 근처에 다가올 때면 혹시 중국 할아버지가 또 오지 않으실까 서성거리다 집에 들어가곤 했지만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중국 할아버지를 뵐 수 없었다.
"중국 할아버지가 너를 이뻐했어. 원체 귀여웠거든, 우리 소임이가."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단지 내가 "원체 귀여워"서 예뻐한 것이 아니라, 나를 귀하게 보물처럼 아껴 주던 할머니를 보고 다른 이들도 나를 그렇게 대해 주었다는 것을. 누군가 애지중지 키우는 화초는 사람들이 함부로 밟고 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꽃이 잡초보다 더 예뻐서도 귀해서도 아니다. 그 화초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할머니만큼 커 가는 다 큰 손녀를 업고 다니던 할머니. 그리고 "내가 좋아서. 원체 이뻐서." 업고 다닌다던 할머니를 보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대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의 사랑은 할머니가 떠난 후에도 내 주변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온기로 남아 나를 감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