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나와 집으로 갔는데, 쌀이 없어서 아빠가 5000원을 주며 동네 슈퍼에서 쌀을 사 오라고 했다. 5000원어치 쌀을 검은 봉투에 담아 사 왔다. 이 이야기를 대학교 때, 중학교 동창이었던 친구에게 했다. 그 친구가 이렇게 대꾸했다.
"나한테 연락하지 그랬어, 우리 집에 쌀 많은데."
그 말은 공감도 아니었고, 동정도 아니었고, 그저 사실이었는데, 나는 그 말이 너무나 깊이 박혀 아팠다. 쌀 5000원어치를 살 정도로 가난했었다는 고백을 '팩트'로 받아버린 그 친구의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학 시절에도 아이들을 가르쳐가며 돈을 벌어야 했던 내가 기대했던 것은 위로가 아니었을까. 그 쌀 5000원의 서사가 지금까지 나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해해 주길 바랐던 것이 아닐까. 똑똑한 친구였다. 그 명쾌한 말은 맞는 말이지만,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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