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가 말해주지 않는 진짜 이유

물어서 배우는 사람이 문서에 없는 것까지 갖는다.

by시선

"이건 왜 이렇게 하세요?"


"글쎄. 그냥, 원래 그렇게 해."


첫 회사 사수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 말을 벽으로 들었다. 알려줄 마음이 없다는 뜻으로 읽었다.


그때 우리가 만들던 것은 출력 프로그램이었다. N/W에 붙지 않고 PC 안에서 도는 SW. 작은 이미지를 크게 늘려도 덜 깨지게 하는 기술을 러시아에서 들여와, 국내 환경에 맞게 다시 짜는 일이었다. 도구는 델파이였다.


솔직히 적자면 나는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없었다. 남들이 한눈에 보는 구조가 나에게는 한참 뒤에 왔다. 그것도 그때는 말하지 않았다.


사수는 소스를 건드리기 전에 A4 한 장을 꺼냈다. 화면에 다 떠 있는 순서를 볼펜으로 다시 옮겨 적었다. 어느 유닛을 먼저 고치고 어디를 나중에 되돌릴지. 나는 그 동작을 낡은 습관으로 봤다. 묻지 않았다.


납품처에서 출력이 틀어진다는 연락이 온 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종이를 꺼내지 않았다. 유닛을 다섯 개 열어 놓고 손이 가는 대로 고쳤다. 컴파일은 됐다. 틀어진 자리는 잡혔는데 멀쩡하던 쪽이 어긋났다. 되돌리려고 보니 원본 위에 이미 덮어써 둔 뒤였다. 그때는 버전을 지켜 주는 것이 사람 손밖에 없었다.


아침에 사수가 왔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서랍에서 A4 한 장을 꺼내 순서를 적더니 그대로 되감았다. 나는 옆에 서서 그 손이 어디로 먼저 가는지만 봤다. 그 손이 무엇을 보고 움직이는지는 끝내 몰랐다.


복구가 끝난 시각은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그 뒤로 한동안 나는 델파이를 열면 손이 먼저 굳었다. 잃은 것은 코드가 아니라 손이었다.


그때 내가 했어야 할 말은 "왜 종이에 적으세요"였다. 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입에서 쉽게 나왔고 질문은 목에서 걸렸다.


묻지 못한 까닭은 간단했다. 물으면 모른다는 게 드러난다고 믿었다. 재능이 없다는 것까지 같이 드러날 것 같았다. 못하는 사람이 묻기까지 하면 남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훔쳐보는 쪽을 택했다.


러시아에서 넘어온 것도 그랬다. 계산식은 있었고 설명은 없었다. 왜 이 값이 하필 이 숫자인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숫자를 조금씩 바꿔 보고 결과 화면만 봤다. 맞으면 넘어갔다. 그 자리도 비워 둔 채였다.


그 침묵에 나는 이름을 하나 붙여 두고 있었다. 텃세. 여러 해 한자리를 지킨 사람들이 요령을 손에 쥐고 안 내놓는다고 믿었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마음이 편했다. 모르는 것이 내 탓에서 벗어났다.


비워 둔 자리는 그대로 남는다. 나는 그 회사를 다니는 2년 동안 이유를 끝내 몰랐다. 대신 종이를 꺼내는 동작만 익혔다. 누가 "왜요"라고 물으면 나도 똑같이 대답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거야."


그 회사를 떠나고 업종을 두 번 옮겼다. 옮길 때마다 서류철에 든 사규는 하루면 다 읽었다. 문제는 매번 복도 쪽이었다. 보고서를 누구에게 먼저 보여야 하는지, 견적을 어느 선에서 끊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옮긴 지 한 달쯤 됐을 때 시안을 세 장 만들어 회의에 들어갔다. 팀장님이 두 장을 빼고 한 장만 들고 나갔다. 왜 빼느냐고 묻지 못했다. 답은 한 달 뒤 회식 자리에서, 다른 팀 직원의 입을 통해 왔다. 세 장을 한꺼번에 펼치면 사람들은 가장 손이 덜 간 쪽으로 눈이 간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또 눈으로 배우려 했고, 또 한 번 틀렸다.


어느 날 팀원이 내 자리로 와서 물었다.


"이 자료, 왜 꼭 인쇄해서 벽에 붙여 놓으세요?"


"글쎄. 그냥, 그게 편해서."


오래전 사수의 문장이 내 목소리로 나왔다. 그 순간 알았다. 그 사람은 감춘 적이 없었다. 꺼낼 말이 없었을 뿐이다. 이유는 손에 있었고 문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수에게서 넘겨받은 물건 중에 열쇠 꾸러미가 있었다. 자료실, 캐비닛, 계약서. 세 개가 한 고리에 걸려 있었고 어디에도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 사람 손은 어느 열쇠가 어느 문인지 알았다. 나는 문 앞에서 매번 세 번씩 찔러 봤다.


몸에 붙은 일은 그렇게 건너간다. 쥐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고, 받은 사람에게는 이름이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말로 옮겨진 적 없는 것은, 감춘 것과 똑같이 생겼다.


라벨 없는 열쇠 — 몸은 아는데 말이 붙은 적 없는 일. 쥐고 있는 사람에게는 불편이 없고, 건네받은 사람에게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돌아보면 러시아에서 건너온 그 계산식이 내가 처음 받아 쥔 라벨 없는 열쇠였다. 동작은 왔고 이름은 오지 않았다.


그 이름을 붙이고 나서 사무실이 달라 보였다. 매일 오가는 일의 절반이 그 꾸러미였다. 견적서를 넘기기 전에 한 사람이 늘 하는 확인, 거래처에 전화할 때 먼저 꺼내는 한마디, 표지를 제본하는 방향. 어느 것에도 이름이 없었다.


견적서 쪽을 예로 들면 이렇다. 그 사람은 종이를 받아 들면 맨 뒷장 합계부터 본다. 그다음 첫 장으로 돌아와 날짜를 본다. 순서가 언제나 같았다. 왜 뒤부터 보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이렇게 돌아왔다.


"합계가 틀리면 앞은 다 소용없어요."


십 년 가까이 그렇게 해 왔고, 그동안 아무도 물은 적이 없다고 했다.


십오 년째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하세요"는 어려운 질문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일에는 이유가 따로 보관되어 있지 않다. 이유는 실패한 날 몸에 새겨졌고, 그 뒤로는 몸이 알아서 처리했다. 말은 그사이 어디에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몸에 새겨진 이유는 대개 부끄러운 쪽에 남아 있다. 종이에 순서를 적는 습관은 누군가 합계를 잘못 넘긴 밤이 한 번 있고 나서 생겼다. 그 이유를 먼저 꺼내려면 자기 실패부터 꺼내야 한다. 묻지 않는 한 아무도 그것을 먼저 펼쳐 놓지 않는다.


손이 하던 일은 묻고 나서야 이름을 얻는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그 일을 문장으로 옮겨야 한다. 그 과정에서 본인도 처음으로 자기가 아는 것을 본다. 묻는 사람이 더 갖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답을 얻어서가 아니라, 없던 문장을 하나 만들어 내서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은 그 사람 것이면서 내 것이 된다. 한쪽은 처음 말해 보고 한쪽은 처음 들으니 둘 다 늘어난다. 회사에서 오가는 것 중에 양쪽이 같이 늘어나는 품목은 많지 않다.


몇 해 전 첫 회사 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십 년도 더 지난 뒤였다. 종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어, 그거. 화면은 지워지는데 종이는 안 지워지잖아. 그리고 손으로 쓰는 동안 한 번 더 걸러지고."


그 사람도 그 말을 처음 해 보는 것 같았다. 이십 몇 년을 하고도 처음이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 두 문장을 적었다. 십 년 늦게 받은 답이었다.


우리에게는 삼킨 질문이 몇 개나 있을까. 모른다는 표시가 날까 봐 되돌린 그 문장들은 지금 어디에 쌓여 있을까.


몇 해 전,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태우고 막 출발하려던 참에 차가 급발진했다.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을 피하려고 전봇대를 들이받으셨다. 아버지는 크게 다치지 않으셨고, 어머니는 고관절 쪽 뼈가 여러 개 부러지고 출혈도 많았다.


구급차로 병원을 여러 곳 돌았다. 부러진 뼈를 제자리에 맞춰 넣어야 수술이 되는데, 뼈가 들어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이대로 들어가지 않으면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복도에서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고, 톡을 넣었다. 목장 식구들과 목사님, 봉사 부서 집사님들께 기도를 부탁드렸다. 두세 시간 뒤에 뼈가 맞춰졌다는 말을 들었고, 이틀쯤 뒤에 어머니는 수술을 받으셨다. 그 일을 나는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 두 분은 그날 붙들어 주신 손의 이름을 아직 모르신다.


그날 나는 모르겠다고 말했고, 도와달라고 말했다. 사무실에서는 그 두 마디를 십 년 넘게 삼켰다. 병원 복도에서 되는 말이 회의실 앞에서 안 되는 까닭을 나는 아직 다 알지 못한다.


요즘 나는 이렇게 한다. '왜'부터 묻지 않는다.

"이거, 언제부터 이렇게 하셨어요?"로 연다. 시작을 물으면 사람은 그날 장면을 먼저 떠올리고, 이유는 그 장면에 묻어 나온다.

답을 들으면 그날 일정표 여백에 한 줄로 옮겨 둔다. 한 줄이 쌓이면 내 사규가 된다.


묻는 일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모르는 것이 드러나서가 아니다. 물을 문장을 갖고 있지 않아서다. "왜요"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상대를 벽 앞에 세운다. 무엇을 언제부터 어떻게 물을지가 정해져 있으면, 모른다는 사실은 오히려 성실함으로 읽힌다.


질문도 문장이다. 보고서나 메일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여는지에 따라 돌아오는 것이 달라진다. 회사에서 우리를 살리는 것은 말의 내용보다 말의 모양일 때가 많다.


그래도 지금, 팀원이 결재판을 들고 와서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그냥"이 먼저 나온다. 그 말을 도로 삼키고 다시 말하기까지 몇 초가 걸린다. 몇 초가 걸리는 사람은 아직 그 일을 문장으로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지난주에 후배에게 열쇠 꾸러미를 넘겼다. 넘기기 전에 라벨지를 잘라 두 개에 붙였다. 후배가 고리를 들어 보더니 물었다.


"이건요?"


세 번째 열쇠였다. 나도 그 문은 열어 본 적이 없다.


두 번째 사규 제5조 사수가 안 알려주는 게 아니다. 말로 옮겨본 적이 없을 뿐이다. 물어서 배우는 사람이 문서에 없는 것까지 갖는다.

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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