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는 내가 일했다는 증명서가 아니다.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었다. 프로젝터 팬이 낮게 돌았다. 앞줄에 위원 다섯, 가운데 좌장. 2년짜리 과제의 최종 결과 보고, 발표평가였다.
앞부분은 무난했다. 목발의 겨드랑이 받침 각도를 몇 도 눕혔고, 그립 단면을 어떻게 깎았고, 팁 고무의 접지 면적을 얼마나 늘렸는지. 위원들은 대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분은 그립이 잡기 좋아 보인다고까지 했다. 나는 그 장에서 40초쯤 썼을 것이다. 2년이 40초에 담기는 게 좀 아까웠지만, 그건 늘 있는 일이었다.
좌장이 안경을 벗은 건 그다음이었다.
"시험성적서, 어디서 받았습니까."
공인시험기관이 맞느냐고 물었다. 하중 기준이 몇 킬로그램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성적서 발급일이 3차 시제품 제작일보다 앞서 있더라고, 종이를 손등으로 툭 치며 말했다.
"뒤에 첨부돼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지금 봅시다."
45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회의실에는 팬 소리만 돌았다. 벽에 세워 둔 시연품이 저 혼자 기울었고, 고무 팁이 바닥에 닿으며 툭, 하고 울렸다. 그 소리가 유난히 컸다.
결과는 통과였다. 점수도 나쁘지 않았다. 보완 의견 한 줄이 붙었을 뿐이다. 성적서 관련 자료를 보고서 앞단에 정리할 것.
돌아오는 차에서 팀원이 말했다. 원래 이렇게 좌장이 까칠한 경우는 드물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했으니까 그래도 됐다. 통과한 보고는 잘 복기되지 않는다. 그게 통과의 부작용이다.
한 달 뒤, 과제의 최종 의견서를 받고 맨 아래 칸을 봤다. 위원 성명, 그리고 서명란.
위원은 감상을 말하러 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통과시키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자기가 무엇에 서명해도 되는지였다. 좌장이 까칠했던 게 아니다. 그는 서명할 근거를 찾고 있었고, 나는 그 근거를 45페이지 뒤에 두고 내 노동부터 꺼냈다.
시험성적서는 그에게 첫 장이었다. 나에게만 부록이었다.
그래서 그다음 보고부터 첫 장의 순서를 바꿨다. 외운 건 딱 세 개다.
- 상대가 오늘 판정할 것 한 줄
- 그 판정에 필요한 근거 두 줄
- 의견을 청하는 지점 둘
내가 한 일은 그 사이, 근거 밑에 한 줄로 들어간다. 여섯 줄이면 한 장이 된다. 칸의 규격을 외우는 대신, 그 칸에서 실제로 입으로 하는 말을 넣어 두었다.
내가 한 일은 근거 두 줄 밑에 있다. 지우는 게 아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뿐이다. 그 자리에서 2년은 자랑이 아니라 앞의 숫자가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한 답이 된다. 첫 줄을 상대에게 넘겨주면 그 한 줄은 오히려 끝까지 읽힌다. 먼저 읽히려고 맨 위에 올려 둔 줄이 늘 먼저 지워졌다.
의견 줄 두 줄을 적어 둔 건, 위원이 결국 무언가는 말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할 곳을 정해 주지 않으면 아무 데서나 말한다. 45페이지는 넓고, 흠은 어디에나 있다.
그 뒤의 다른 보고회에서 좌장은 안경을 벗지 않았다. 성적서를 한 번 보고, 흡족해 했다. 회의는 12분 만에 끝났다. 2년이 12분으로 끝나는 것도 아까웠지만, 그건 다른 종류의 아까움이었다.
그런데 이 여섯 줄이 위원회에서만 쓰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결재도 서명이다.
대표가 결재판을 여는 것도 서명이고, 팀장이 메일에 회신하는 것도 서명이고, 발주처 담당자가 전화를 끊으며 그렇게 하시죠, 하는 것도 서명이다. 회사에서 오가는 말의 대부분은 사실 서명을 받으러 가는 길이다. 다만 서명란이 인쇄돼 있지 않을 뿐이다.
인쇄돼 있지 않으니 자주 잊는다. 잊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내가 한 일부터 꺼내는 자리로.
사장님 방 문을 열면서 이렇게 시작한 적이 많다. 지난주에 제안서 세 건 마감했고, 그중 두 건은 컨소시엄 협의가 늦어져서, 그래서 어제까지 밤을 좀 샜고. 사장님은 듣는다. 두 문장쯤 듣다가 서류를 앞으로 당긴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뭘 결정해 달라는 거야."
그 질문이 나오는 순간, 내 앞의 세 문장은 이미 지워진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연다. "오늘 결정해 주실 건 A사와 컨소시엄을 갈지 말지입니다." 그다음에 근거 두 줄. 그다음에 대표가 한마디 얹을 자리 두 개. 밤샌 이야기는 근거 밑 한 줄에 있다. 거기까지 가면 대표는 그걸 듣는다. 첫 줄에 뒀을 때는 듣지 않던 걸, 넷째 줄에서는 듣는다. 결정을 먼저 받아 두면, 사람은 그제야 그 결정이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메일도 같다. 제목에 '진행 상황 공유'라고 쓰면 그 메일은 읽힌 뒤 닫힌다. '9/22까지 회신 필요 — 견적 단가 승인 건'이라고 쓰면 그 메일은 답장이 온다. 회의 발언도 같다. 앞에서부터 설명하는 사람은 중간에 끊기고, 결론부터 두는 사람은 끝까지 듣게 된다. 끊는 사람이 무례해서가 아니다. 그가 앉은 자리는 듣는 자리가 아니라 정하는 자리라서 그렇다.
보고는 내가 일했다는 증명서가 아니다. 상대가 결정을 내리기 위해 쓰는 도구다. 도구는 손잡이가 먼저 와야 한다. 날부터 내미는 사람은 대개 자기가 얼마나 날을 잘 갈았는지 말하고 싶은 사람이다.
첫 줄을 내주면 공이 사라질 것 같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자리만 바뀐다. 아래 칸에서 그것은 증명이 아니라 근거가 된다. 증명은 반박당하고, 근거는 채택된다.
몇 해가 지나 나는 서명하는 쪽에 앉게 되었다.
팀장이 결재를 들고 온다. 지난달 매출이 어떻고, 인원이 어떻고, 그래서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는 그가 말하는 동안 종이 아래쪽을 본다. 내 이름 옆의 빈칸을 본다. 그리고 속으로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에 서명하는 건가.
대여섯 번쯤 그러고 나서 알았다. 그때 좌장은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던 게 아니었다. 그는 자기 이름이 놓일 칸을 보고 있었고, 그 칸을 채울 근거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안경을 벗은 것이다. 답답했던 쪽은 그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즘 나는 보고서를 열기 전에 먼저 묻는다. 이 사람이 오늘 서명해야 하는 건 무엇인가. 그걸 모르면 보고서를 쓰지 않는다. 그건 보고가 아니라 일기이기 때문이다.
일기는 혼자 쓰는 것이다. 서명란이 없다.
두 번째 사규 제6조
① 보고의 첫 문장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상대가 할 일로 시작한다.
② 내가 한 일은 지우지 않는다. 아래로 내려간다.
③ 상대가 의견을 둘 자리를 정해 주지 않으면, 의견은 아무 데서나 나온다.
④ 결재도 서명이다. 인쇄돼 있지 않을 뿐이다.
⑤ 상대가 무엇에 서명해야 하는지 모를 때는, 보고서를 쓰지 말고 그것부터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