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도 말고, 영향력 지도를 그려라

조직도는 바카라임의 그림이고, 영향력 지도는 흐름의 그림이다.

by시선

바카라상 유리 밑에 조직도를 깔아 두고 지냈다. 회사를 옮긴 첫해였다. 팀원, 팀장, 사장. 세 층뿐인 위아래를 외우는 일이 적응이라고 믿었다.


도면을 한 줄 고쳐야 하는 일이 생겼다. 손잡이 부품이 목업 단계에서 갈라져 소재를 바꿔야 했고, 소재가 바뀌면 두께가, 두께가 바뀌면 도면이 바뀌고, 설계 변경비가 붙었다. 도면은 외주 설계사무소가 그렸고, 우리가 쥔 것은 그 앞까지였다. 나는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순서를 정하는 사람이었다. 일정과 비용이 어긋나면 이름이 불리는 자리도 나였다.


그래서 유리 밑의 종이대로 움직였다. 변경 사유서를 팀장에게 올렸고, 팀장이 사장에게 올렸다. 화살표는 두 개뿐이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사흘은 그냥 흘러간 사흘이 아니었다. 설계가 밀리면 금형이, 금형이 밀리면 양산이, 양산이 밀리면 박람회 출품 전날 밤을 통째로 쓰게 된다. 금형부터는 우리 손 밖이었다. 그 표를 만든 사람이 나였으니까.


나흘째 아침, 결정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 전해 준 사람은 내가 올린 결재선 어디에도 없었다. 관리부에서 오랫동안 발주와 대금을 맡아 온 직원이 탕비실에서 종이컵을 뽑다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 건, 어제 정리됐어요."


멍했다.


사장은 결재판을 열기 전에 그 직원에게 설계사무소 사정을 물었고, 두 문장으로 결론이 섰다. 내가 사흘 동안 밟은 화살표는 결정에 닿는 길이 아니라 결정을 기록하는 길이었다.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라, 길이 아닌 곳을 길이라 믿고 걸었다.


부끄러운 쪽은 그다음이었다. 그 사흘 동안 급하다는 말을 팀장에게 세 번 했고, 팀장은 세 번 다 올렸다고 답했다. 그 답은 사실이었다. 급하다는 말이 닿아야 할 자리는 그 위가 아니라 옆이었다. 조직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야 하는 것을 적어 두지 않았을 뿐이다.


흔히 이렇게 읽는다 — 조직도는 일이 흐르는 길을 그린 그림.


실제로는 이렇다 — 조직도는 일이 멈췄을 때 누구를 부를지 적어 둔 그림.


이사하던 날, 아내가 세탁기 자리를 정하다가 설명서를 접었다. "여기가 다용도실인데, 물 빠지는 구멍은 저쪽 벽이야." 도면에 배관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일이 지나갈 길을 짜는 것으로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벽 안을 볼 줄 몰랐다.


회사에도 도면과 배관이 따로 있다. 조직도는 도면이다. 누가 어느 방을 쓰는지가 그려져 있을 뿐, 물이 어느 관을 타고 도는지는 그 종이에 없다. 조직도는 바카라임의 그림이고, 영향력 지도는 흐름의 그림이다.


관을 타고 도는 것은 정보와 자원, 그리고 신뢰다. 결정권 없이 이 셋 중 둘을 쥔 자리가 있고, 도장을 쥐고도 셋 다 남에게 맡겨 둔 자리가 있다. 조직도는 이 둘을 같은 크기의 네모로 그린다.


그 개발 건에서도 셋은 다른 방에 있었다. 일정은 설계사무소 담당자가 먼저 알았고, 추가 설계비는 관리부 직원의 서류 한 장에, 어느 쪽 말을 믿을지는 십 년 넘게 일을 맡겨 온 설계사무소 대표에게 달렸다. 그중 한 방은 회사 밖에 있었다.


그래서 분기에 한 번, 빈 종이를 가로로 놓고 가운데에 일에 대한 이름을 적는다.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일 이름이다. 처음에는 사장, 팀장, 나를 적었고, 내려다보니 조직도가 한 장 더 있었다. 종이를 뒤집어 '손잡이 소재 변경, 설계 변경 발주'라고만 적었다.


그 둘레에 세 칸을 그린다. 칸마다 이름은 두 개까지만. 세 개를 넘어가면 아직 모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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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칸의 이름은 그 직원이었다. 나는 일정표를 열어야 아는 일을, 그 자리는 먼저 울리는 수화기로 안다.


자원 칸에는 관리부 직원과 목업 업체 담당자가 들어갔다. 도장은 사장의 것이지만, 언제 찍힐지는 지출 결의가 올라가는 순서가 정했다. 도장과 일정표는 같은 방에 있지 않았다.


신뢰 칸이 가장 늦게 채워졌다. 회의 전이면 사장은 복도로 나가 삼 분짜리 전화를 걸었고, 들어오면 회의의 결이 달라져 있었다. 상대의 이름을 짐작하는 데 두 계절이 걸렸다. 조직도 어디에도 없는 이름이었다.


칸이 비면 캐물어야 할 것 같지만, 문장은 하나면 된다. "이런 건, 예전에는 보통 어디서 제일 오래 걸렸어요?" 급하다고 말할 때보다 이렇게 물을 때 이름이 더 많이 나왔다.


이름 옆에는 화살표를 그린다. 직접 말을 걸 수 있으면 하나, 거쳐야 닿으면 둘. 두 개짜리가 절반을 넘으면 길이 아니라 벽을 그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번 이상 나온 이름에 동그라미를 친다. 그날 동그라미는 하나, 탕비실에서 종이컵을 뽑던 그 이름이었다. 삼십 분이면 될 일을 사흘을 잃고 알았다.


동그라미보다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빈칸이다. 채우지 못한 칸은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을 아직 다 겪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난 한 주 동안 내 일을 하루 이상 앞당기거나 늦춘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이름은 우리가 외우고 있는 결재선 안에 있었을까.


여기서 자주 어긋나는 자리가 있다.


첫째, 좋아하는 순서로 그린다. 호감과 영향력을 한 칸에 섞으면 지도는 친목 명단이 된다. 배관은 편한 쪽으로 나 있지 않다.


둘째, 지도를 지름길로 쓴다. 결재선을 건너뛰는 데 쓰면 지도는 사다리가 되고, 사다리는 한 번은 통하고 두 번째부터 문이 닫힌다. 이 종이는 순서를 건너뛰라고 있는 게 아니라, 어디에서 막힐지 미리 보라고 있다.


셋째, 한 번 그리고 서랍에 넣는다. 사람이 옮기면 관도 옮겨 가고, 설계사무소가 바뀌면 회사 밖 관은 통째로 끊긴다. 분기 첫 주 월요일 아침, 지난 장을 고치지 않고 빈 종이에 다시 그린다. 남는 이름이 그 분기의 답이다.




관은 벽 안에 있다.


그 뒤로도 결재선은 그대로 밟는다. 달라진 것은 하나뿐이다. 올리기 전에 종이컵 뽑는 자리에 들러 사정을 묻는다. 여전히 사흘 걸리는 날도 있지만, 사흘 걸릴 것을 첫날에 안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이 종이를 다시 그렸다. 앞 회사의 지도는 새 건물에서 한 줄도 쓸모가 없었다. 다시 그리는 시간이 짧아진 것이 그 몇 해의 소득이었다.


이름을 아는 것과 길을 아는 것은 다르다. 조직도는 회사가 그려서 나눠 준다. 나머지 한 장은 아무도 그려 주지 않는다. 그 종이가 없어도 월급은 나온다. 그래서 대부분은 끝까지 그리지 않는다.


두 번째 사규 제4조 조직도는 월급의 지도다. 일의 지도는 스스로 그리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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