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파 선생 유족에게 들어본 천도교소년운동
- 출전: [신인간] 통권367호(1979년 5월호, 11쪽-21쪽)
[편집자(박길수 _신인간사 주간) 주 : 소파 방정환 선생의 부인 손용화(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따님)과 장남 방운용 선생에 대한 인터뷰(대담)는 소파 방정환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104주년 어린이날을 맞아, 지금부터 47년 전에 있었던 인터뷰 기사를 3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이 글은 [신인간] 통권367호(1979년 5월호, 11쪽-21쪽)에 수록된 ‘어린이날 특집 대담’입니다. 내용의 본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정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괄호안에 원문을 밝혔습니다.]
어린이운동의 모체
김응조 : 천도교소년회에 얽힌 이야기를 부탁합니다.
방운용 : 아시다시피 1919년 9월 2일에 발족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가 그 다음해(1920) 3월 천도교청년회로 발전하면서 포덕부, 편집부, 지육부(智育部), 음악부를 두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 해 6월부터는 편집주에서 저 유명한 [개벽] 잡지를 발행하게 되었고, 다음 해인 1921년 4월부터 포덕부에 ‘소년부’를 특설하였습니다. 그 후 김기전 선생과 저의 아버님(소파 방정환) 그리고 교회 안의 관심 많은 여러 어른들의 노력으로 소년부를 ‘천도교소년회’라는 명칭으로 5월 1일을 기해 정식으로 발족을 보게 된 것입니다. 평소 김기전 선생과 우리 아버님(방정환) 그리고 박래홍[춘암 박인호 4세 대도주의 아드님, 천도교청년당(청년동맹) 간부 - 편집자 주] 선생 등 뜻있는 교린들이 어린이운동의 필요성을 극구 주장해 왔었으나 당시 천도교청년회에서는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에 역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완고한 일보 교회 어른들의 몰이해 때문에 그 뜻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3.1운동 이후 1920년 3월에 선친(방정환)께서 일본에서도 장차의 어린이운동에 대비해서 뜻있는 분들과 제휴하는 한편(-색동회 결성 - 편집자 주) 꾸준히 국내의 관심 있는 교인(청년당 간부들을 말함: 김기전, 차상찬, 들에게 편지를 띄우고 있었습니다. 특히 김기전 선생과는 의기가 투합 되어 1921년 늦봄에 귀국하셨을 때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키게 된 것이지요. 물론 천도교의 이념 아래 설립된 천도교소년회이기는 했으나 16세 이하의 소년 소녀들에게는 천도교 신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입회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해서 탄생한 천도교소년회가 후일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모체로서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할 훌륭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선친께서는 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된 다음 달인 6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천도교소년회 주최로 ‘내일을 위하여’ ‘잘 살기 위하여’라는 연제를 가지고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습니다. 강연장에는 의례히 일본인 형사가 임석(臨席)을 하기 때문에 노골적인 이야기는 못했지만 어린이들을 훌륭히 키워야 외국의 압제를 안 받고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뜻이 함축된 강연이었습니다. 주로 천도교 지방교구를 중심으로 약 80군데를 돌면서 강연했는데 청중들의 반응이 대단하였습니다.
제가 박래원(朴來源, 4세 대도주 박인호의 조카-편집자 주) 선생한테서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당시 아버님(방정환)께서 지방강연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울의 천도교 수운대신사 출세 백년기념관에서 강연회를 하게 되어 그때 박 선생께서도 강연회에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강연회에 임석한 왜경은 악명 높은 미와(三輪) 형사였습니다. 미와 형사는 아버님이 강연 할 때마다 청중들이 흥분한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하든지 꼬투리를 잡으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의 강연은 웅변조도 아니고 일본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극적인 이야기가 아닌데도 시간이 갈수록 청중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미와 형사가 “주의(注意)!” 하고 경고를 했습니다. 당시 한국인(조선인)들의 강연장에는 연사 뒤에 형사가 앉아 있다가 반일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주의!’ 하고 경고를 하였는데, 세 번 경고를 당하면 언사는 강연을 중지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와 형사가 이윽고 “주의!”하고 두 번째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청중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강연을 잠깐 중지한 뒤에 뒤돌아서서 미와 형사에게 직접 따졌습니다. “당신네 일본 사람들도 자식을 키우는데 내가 여기서 독립운동을 하자고 선동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걸어서 어린이들을 잘 키워야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뭐가 나쁘다고 하는가?” 이렇게 되자 민환 형사로 자처하는 미와가 난처하게 되었지요. 결국 자기 체면을 살려 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물론 강연은 모두 마쳤지요.
김응조 : 슬롯에서는 제1회 ‘어린이날’ 즉, ‘어린이날’이 처음 제정된 것이 1923년 5월 1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 1년 전에 천도교 소년회에서 ‘어린이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방운용 : 그렇습니다.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 기념일인 1922년 5월 1일에 ‘어린이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가두선전을 하고 자동차와 창가대를 동원하여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慮 )하라”는 삐라를 시내에 살포하면서 크게 행사를 하였습니다. 이때의 지도위원으로는 김기전, 구중회, 차상찬, 박달성 선생과 저의 선친 등 다섯 분이었고, “우리는 참되고 씩씩하게 자라는 가운데 인정 많은 소년이 됩시다”라는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린이날의 창시일을, 즉 제1회 어린이날을 1년을 소급해서 천도교소년회에서 ‘어린이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행사를 가졌던 1922년 5월 1일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근래에 아동문제연구가들도 당연히 1년을 소급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있어요.
김응조 : 그렇다면, 1923년 5월 1일이 어떻게 해서 제1회 ‘어린이날’로 제정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운용 : 이미 천도교소년회의 조직을 보았지만 어린이운동 역시 3.1운동처럼 거족적, 범국민적으로 조직 활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아버님께서 동경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색동회>를 조직하는 한편, 국내에 계신 김기전, 박달성 선생께 그런 뜻을 편지로 알리고 직접 (색동회 멤버, 비 천도교인) 진장섭 씨를 국내로 보내어 두 분 선생을 만나 의논토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1923년 4월 17일에 천도교소년회에서 첫 모임을 갖고 천도교소년회,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등 40여개 단체가-편집자 주)이 연합하여 ‘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다음 날인 4월 18일에는 천도교 강당에서 소년운동협회 주체로 소년문제 강년회가 개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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