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파 선생 유족에게 들어본 천도교소년운동
- 출전: [신인간] 통권367호(1979년 5월호, 11쪽-21쪽)
[편집자(박길수 _신인간사 주간) 주 : 소파 방정환 선생의 부인 손용화(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따님)과 장남 방운용 선생에 대한 인터뷰(대담)는 소파 방정환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104주년 어린이날을 맞아, 지금부터 47년 전에 있었던 인터뷰 기사를 3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이 글은 [신인간] 통권367호(1979년 5월호, 11쪽-21쪽)에 수록된 ‘어린이날 특집 대담’입니다. 내용의 본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정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괄호안에 원문을 밝혔습니다.]
대담진행 : 김응조(신인간 편집장)
대 담 자 : 손용화 (소파 방정환 선생 부인), 방운용(소파 선생 장남)
대담자(김응조) 사모님과 방 선생님(방운용)께서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어린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파 방정환 선생께서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요 선각자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올해가 ‘세계 아동의 해’이고 또한 청소년의 달인 5월을 기해서 소파 선생에 얽힌 숨은 이야기를 이 기회에 들어봤으면 합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김응조 : 먼저 소파 선생의 출생에 대해서 한 말씀 들려 주십시오.
손용화 : 그분이 살아 계시면 금년 81세가 되지요. 그러니까 1899년 11월 9일(光武 3, 기해년, 음 10월 7일) 서울 야주개(夜珠峴, 현재 종로구 당주동-세종문화회관 뒤편)에서 태어났어요. 아버님 성함은 방경수(方慶洙) 씨였고, 7남매 중 맏아들이면서 외아들이었어요.
[편집자(박길수) 주 : 손용화(孫溶嬅)는 천도교 당호가 신흥당(信興堂)이고, 1898년 7월 30일 손병희(孫秉熙)의 셋째 딸로 태어났고, 1906년 천도교 입교했다. 동덕여학교 고등과 제1회 졸업생(1914.2)이며, 이종린(李鍾麟) 주례로 송현동 천도교교당에서 방정환(方定煥)과 1917년 4월 8일(장인인 의암 손병희의 생일) 결혼하였다. 방정환을 보필하면서 천도교내수단(內修團) 상무위원(1926.12)을 역임하였다. 1903년부터 일본에 거주하다가 1906년 1월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귀국하였다. 1991년 10월 18일 향년 90세로 환원하였다.]
할아버지 대까지는 꽤 잘 살았었지요.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후 가운이 기울어 채권자에게 가산을 전부 빼앗기게 되자 도정궁(都正宮, 종로구 사직동에 있던 왕족 가족들의 사저) 앞 사직공원 뒤 초가집으로 이사하면서 모진 고생을 했지요. 끼니를 이을 살이 없어 대고모(大姑母, 아버지의 고모) 댁에 늘 쌀을 얻으러 가은가 밥을 얻어 먹으러 가곤 하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퍽 싫었나 봐요. 학교에서도 점심을 굶는 일이 많았대요. 그래서 그런지 결혼 뒤에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결코 ‘밥 먹었느냐’고 묻지 말고 무조건 밥상을 차려 놓으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어렸을 때 어른들이 ‘밥 먹었니?’ 하고 물으면 배가 고프면서도 차마 ‘못 먹었어요.’ 하고 대답하지 못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편집자(박길수) 주: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결코 ‘밥 먹었느냐’고 묻지 말고 무조건 밥상을 차려 놓으라”라는 말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해월 최시형은 어려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등 고생을 하면서, 배를 곯는 경우도 많았다. 해월은 도망을 다니면서도 함께 지내는 가족(부인) 또는 제자들에게, ‘손님이 찾아오면 밥 먹었느냐고 묻지 말고 밥상을 내오라’고 당부하였다.]
김응조 :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재질이 뛰어났으며, 소년입지회도 만들었다고 하던데….
손용화 : 고모님 말씀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면서도 장난이 심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네 어린이들을 집에 모아 놓고 연극 흉내도 내고 동화를 들려주기도 했다더군요. 언젠가 그분의 재질을 아깝게 생각한 어떤 미술가 한 분이 어려서 고생하는 그이를 양자로 데려가려고 했대요. 그러나 방씨 가문에 외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자 환등기(幻燈機) 하나를 선사하고 갔어요. 이때부터 서대문에 있던 대고모댁에 동네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입장료 대신 성냥을 받고 스스로 변사가 되어 환등기를 구경시켜 주었대요. 그런데 어린이들이 어떻게나 많이 모이는지 대청마루와 마당, 장독대 할 것 없이 초만원을 이루어 장독이 깨지는 등 소란이 일어났어요. 그렇게 되자 할아버지에게 크게 꾸중을 듣고 그렇게 인기 끌던 환등놀이를 중지했다고 합니다. 이때가 아홉 살쯤 되었을 때라고 하니까 어려서부터
방운용 : ‘소년입지회’ 역시 열 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하니까 아마도 이것은 선친(방정환)께서 만든 최초의 조직이 될 것입니다. 열 살이 조금 넘은 어린이 8~9명이 일요일마다 대한문(大漢門) 앞에 있던 아버님의 친구 되는 최씨네 집 사랑방에 모여서 토론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석유상자를 뜯어서 먹칠을 하여 흑판을 만들고 문제를 써 놓고는 열심히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최씨네 집이 이사 가괴 되어 토론할 방이 없어지자 아무 집이나 비어 있는 사랑방이면 몰려가서 토론을 하다가 어른들이 시끄럽다고 핀잔하면 그 흑판을 들고 거리를 헤메다니면서 사랑방이 있는 집만 보이면 덮어놓고 방을 빌려달라고 떼를 썼다더군요.
김응조 : 소파 선생 가족은 언제 천도교에 입교하셨는지요.
방운용 :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권병덕(權秉悳) 선생의 권유로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와 권선생과는 의형제지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권선생께서 시천교를 믿고 있을 때 할아버지께서도 자연 시천교를 믿게 되었는데, 그 후 권선생께서 시천교를 떠나 천도교로 오게 되니까 같이 천도교를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버님(방정환)께서는 어렸을 때였습니다.
[편집자 주 : 권병덕(權秉悳, 1868~1943)은 천도교 도호가 청암(淸菴) 1884년에 동학에 입도, 광화문복합상소(1893.2) 참여, 동학혁명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패퇴 후 1906년 한성 자문동(紫門洞)에 거주하면서 천도교중앙총부 중요 직바카라을 맡았다. 1906년 시천교(侍天敎)로 이탈하였다가 1916년 8월 참회식을 행하고 천도교로 복귀하였다. 1919년 2월 손병희 오세창 등을 만나, 삼일독립운동 계획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옥고를 겪은 후 환원할 때까지 천도교중앙총부의 각종 직바카라을 맡았다.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현재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방정환은 1916년에 천도교인이 된 셈이다. 그 전까지 다니던 시천교총부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직선거리로 300m 정도 떨어진 ‘제칠일안식일교회’ 자리에 있었다.]
김응조 : 사모님께서 소파 선생과 결혼하게 된 일화 같은 것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손용화 : 당시 여기 저기서 중매가 들어왔지만 아버님(손병희)께서 천도교인에게 시집보낸다고 하셔서 언젠가 권병덕 선생께서 그이(방정환)을 소개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먼저 외7촌이 되시는 홍병기(洪秉箕, 1869~1949,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선생께서 선을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바싹 마른 체구에 눈만 매섭게 생겼기 때문에 일단 거절하고 돌려보냈죠. 그러한 이야기를 아버님께서 들어시고 직접 선올 보시게/tek고 해서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어려워하는 그이에게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라”고 하셨다 합니다. 아버님께서는 그이를 돌려보낸 후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까지 마를 수가 있느냐?”고 하시니까 권병덕 선생께서 “사람은 똑똑하나 어렸을 때 너무나 굶주려서 마른 것이므로 잘 먹으면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말씀 드렸대요. 아버님께서는 그이를 어떻게 보았는지 결혼을 승낙하셨고, 아버님의 생신날인 1917년 4월 8일 그러니까 그이가 열아홉 살, 제가 열일곱 살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싹 트는 민족의식
방운용 : 한때 <동원령(動員令)>이라는 신극과, 천도교 주최로 <동학당>이라는 극을 전국 각 지방으로 순회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동원령>은 청년구락부 주최로 아버님이 직접 각본을 쓰고 주연과 연출까지 했다고 합니다. 1917년에 아버님읜 유광렬, 이중각, 이복원 씨와 함께 네 사람이 중심이 되어 지하애국단체인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였습니다. 전부 20세 미만의 젊은이로 구성된 청년구락부는 한때 200여 명의 부원을 포섭하여 <신청년>이라는 기관지를 인쇄 발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18년 연말에 ‘망년회’라는 이름으로 봉래동(蓬萊洞; 현 만리동 - 편집자 주) 소의학교(昭義學校 - 이합집산을 거듭하였으며, 현 동성고등학교로 연결됨 - 편집자 주)에서 전 부원이 모인 가운데 <동원령>이 공연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일제 침략으로 점차 기울어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 모든 국민이 총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상은 제가 유광렬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김응조 : 3.1운동 때 ‘독립신문’을 손수 발행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방운용 : 3.1운동 당시 아버님은 보성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보성학교 윤익선(尹益善) 교장 선생이 ‘독립신문’ 사장을 겸직하면서 3월 1일자로 천도교 보성사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했습니다. 그러자 왜경이 윤익선 씨를 체포 구금하는 바람에 이에 관계했던 분들이 의론 끝에 아버님과 오일쳘(吳一澈,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인 오세창 선생의 2남, 당시 보성학교 서무) 씨가 등사판으로 비밀리에 인쇄 배부하게 되었습니다. 외신(外信)은 외국 선교사를 통해서 수집하고, 국내 소식은 학생들의 미밀 루트를 통해서 게재했지요. 등사된 독립신문은 식모까 발래 광주리 속에 넣고 비밀히 배달했고, 남녀 학생들도 합세해 비밀히 배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재동 아버님 뒷방에서 약 3주일을 계속했는데 어느 날 새벽 돌연 종로서 형사들이 냄새를 맡고 비밀리에 등사하는 재동 집을 포위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님은 침착하게 등사판과 종이 등 일체를 차근차근 챙기더니 집안 우물 속에 집어 넣고는 형사들을 맞아들였습니다. 증거를 잡지 못한 형사들이 아버님을 연행해서 일주일간 혹독하게 고문을 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고 증거불충분으로 결국 풀려나왔습니다. 풀려나온 다음에도 ‘독립신문’은 계속 발행했다고 하더군요.[편집자 주 : 이후 ‘독립신문’은 1~2호마다 발행 주체가 달라지면서 100호 넘도록 발행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아버님은 아무리 위급해도 퍽 침착하게 일을 처리했다 봅니다. 언젠가 이태운(李泰運, 의암성사의 큰 외손자 = 훗날 방정환이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에 함께 유학 생활을 했다.] 씨가 독립신문에 게재할 원고를 가지고 오다가 안국동 근처에서 왜경에게 불심검문을 당하였습니다. 이태운 씨는 만약 발각되면 동지들까지 위태해질 것을 생각하니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왜경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정강이를 걷어차고 아버님 집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이태운 시를 다락에 숨긴 후 뒤따라 들어온 형사에게 태연히 “어떤 사람이 방금 들어왔다가 뒷담으로 뛰어 넘어갔다”고 말해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더군요.
김응조 : 소파 선생의 일본 유학 시절은 어떠했는지요?
손용화 : 결혼 전에는 집안이 넉넉지 못해 선친(방경수)의 분부대로 15세 되는 해에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만에 중퇴하였어요.
[편집자 주 : 현재 선린인터넷고등학교, 교정에 방정환이 다닌 학교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결혼 후에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전문학교에 다시셨고, 3.1운동 이후에는 일경의 등쌀을 피해서 일본 동경 동양대학 철학과에 학적을 두고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연수했어요. 그러면서 밤에는 정칙(正則) 학원에 다니면서 외국어를 배웠어요. 그 후 주옥경 사모님도 이 정칙학원에서 영어를 배우셨댔지요.
방운용 : 그러니까 아버님은 동경 유학 중에 천도교청년회에서 발간하던 [개벽]지의 동경특파원을 겸직하고 계셨고, 다음해인 1921년 2월 13일에 조직된 천도교청년회의 동경지회 초대 회장직도 함께 겸임하고 계셨지요. 그리고 의암성사의 셋째 사위였기 때문에 일본 경찰이 늘 감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늙은 일본인 형사 한 사람이 찾아왔더랍니다. 그 형사가 말하기를 “내가 당신과 같은 거물을 담당하여 감시하도록 명령을 받았소. 보다시피 나는 나이도 많고 1년 후에는 정년퇴직을 하게 되는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무사히 정년퇴직을 할 수 있도록 제발 말썽을 일으키지 말아 주기를 부탁하오.”라고 솔직히 말하더랍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그 점은 염려 마시오. 당신이 나를 따라다니려면 힘들 턴이니, 재가 자취하는 방에서 함께 기거하는 것이 어떠하오?” 하고 같이 살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형사와 같이 자취하게 되었는데 아버님은 그 형사를 어떻게 구워삶아 놓았는지 집에서 밥도 짓고 비 오는 날이면 학교 정문 앞까지 우산을 갖고 나오기도 했다더군요. (中에 계속)
[이 글은 <천도교신문> 이달의 기획 편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