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파 선생 유족에게 들어본 천도교소년운동
- 출전: [신인간] 통권367호(1979년 5월호, 11쪽-21쪽)
[편집자(박길수 _신인간사 주간) 주 : 소파 방정환 선생의 부인 손용화(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따님)과 장남 방운용 선생에 대한 인터뷰(대담)는 소파 방정환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104주년 어린이날을 맞아, 지금부터 47년 전에 있었던 인터뷰 기사를 3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이 글은 [신인간] 통권367호(1979년 5월호, 11쪽-21쪽)에 수록된 ‘어린이날 특집 대담’입니다. 내용의 본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정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괄호안에 원문을 밝혔습니다.]
순수 어린이운동을 위해서만
김응조 :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우리나라 최초로 개최했다고 하는데요?
방운용 : ‘어린이사’가 주최가 되어 아동예술에 자극제로서의 역할을 기대해서 계획된 것입니다. 처음 이 계획을 듣고는 주위에서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꾸준히 이를 밀고 나갔습니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세계 어린이들의 예술작품을 수집한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겨우 독일에서만 작품을 보내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이 소식을 들은 동경의 이헌구, 정인섭 두 분이 동경에서 가톨릭 신부가 수집한 작품을 교모히 주선해서 한국으로 반입하게 되어 실로 계획한 지 4년 만인 1928년 10월 2일에야 천도교(수운출세백년)기념관에서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이 도착하자 아버님은 어린이사 여러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꼬박 나흘 밤을 새우면서 준비에 몰두했습니다. 남들이 무시하고 믿어주지 않는 계획이 이루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전람회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세계 20여개 국에서 출품된 작품과 국내 작품이 총망라되었고, 전시 기관 중 동화구연, 동요, 음악회 등 9일 동안 온통 잔치 기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린이] 잡지 구독을 금지하고 어린이운동을 방해하던 각 공립학고 선생과 일본인 선생, 학생까지도 단체로 입장하는 등 실로 8천 명에 이르는 관람객을 동원시켰습니다. 한마디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일체 치하 어린이운동의 최고의 결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응조 : 소파 선생께서는 필명이 너무 많아서 구별하기가 힘들더군요.
방운용 : 아버님은 [어린이]지뿐 아니라 [개벽]지가 폐간된 후 [별건곤], [혜성], [학생], [신여성] 등 많은 잡지에 관여하셨고, 경영난을 덜기 위해서도 필명을 이용하여 많은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잡지에 대한 검열이 너무 심해서 필명을 동원하여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어요. 특히 이윤걸(李允傑) 씨는 아버님을 대신해서 필화의 주인공인양 자청해서 대리 옥살이를 여러 번 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아버님이 잡혀 가면 편집에 막대한 지장이 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당시는 개벽사에 술 잘하는 사람, 허풍 잘 떠는 사람, 건달 같은 사람들이 많기로 유명했지만 아버님은 그런 분들도 모두 필요한 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의 필명은 소파, 목성(牧星), 북극성, 허삼봉(許三峰), 허문일(許文日), 파영생(波影生), 성서인(城西人), 삼봉생(三峰生), ㅈㅎ생, 잔물, 노덧물, 길동무, CW생, 쌍S, 깔깔막사, 잠수부, 은파리, 금파리, 편집인, 일기자 등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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