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

바람에 기대어

by구시안
구시안 오솔길에서.jpg


나에게 오솔길은 지도가 지워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문장이다.

문명이라는 거대한 사조가 곧게 뻗은 아스팔트와 가파른 마천루를 세우며 시간을 효율이라는 칼날로 벼려낼 때, 오솔길은 다만 누군가의 다정한 주저함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 사람이 걸어가고, 그 밟힌 풀밭 위로 다른 이의 머뭇거림이 쌓여 흙이 드러난 자리. 오솔길은 세상을 정복하려는 거창한 의지가 아니라, 세계와 조심스럽게 타협하려는 보잘것없는발자국들의 연대(連帶)다.


아침 안개가 숲의 허리를 느슨하게 감쌀 때 오솔길을 걷는다. 길은 결코 먼 곳을 먼저 보여주는 법이 없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딱 그만큼의 바람과,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한 뼘의 빛만을 허락한다. 앞서가지 않는 길, 직선의 오만함을 버리고 굽이굽이 낮춰 걷는 이 길 위에서 비로소 인간은 속도를 잃고 자기 자신을 얻는다.

도로 위의 인간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지만, 오솔길 위의 인간은 걷는 행위 그 자체로 완결되는 '존재'가 된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음절을 밟으며 걷다 보면, 우리가 평생을 바쳐 구축해 온 수많은 정체성들. 이름, 직함, 결핍과 욕망이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져 사라진다. 그곳에는 오직 '걷는 자'와 '길'이라는 원초적인 대화만이 남는다.


언젠가 늙은 오솔길 끝에서 비바람에 깎인 돌멩이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그 길을 지나간 수많은 발걸음이 안겨준 온기를 품고 서 있는 작은 침묵이었다. 인생이라는 커다란 서사 속에서 우리를 참으로 구원하는 것은 거창한 성공의 이정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삶의 모퉁이마다 숨어 있던 작고 희미한 오솔길들, 즉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달렸던 직선의 삶에서 잠시 비켜서서 홀로 흐느끼거나 웃었던, 그 비밀스럽고 다정한 우회(迂回)들의 기록이다.


발밑의 흙은 말없이 인간의 무거운 체중을 받아낸다. 받아내어 억지로 튕겨내지 않고, 다정하게 다져지며 자신의 몸에 또 하나의 흔적을 남긴다. 오솔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지구라는 거대한 타자의 피부 위에 나의 가벼운 시(詩)를 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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