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임통치

임시정부 편 (04)

by로크

대한인국민회 대표 3인은 미국의 비자 발급 거부로 워싱턴에서의 출국이 좌절되자 그다음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며칠간 서로 머리를 맞대어 해결바카라을 고민하던 그들은 논의된 것 중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방안을 모아 중앙총회에 전달했다.


첫 번째 방안은 미국이 아닌 캐나다를 경유하여 프랑스로 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캐나다라고 해서 조선에 대한 입장이 미국과 다르다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결국 해당 방안은 창호로부터 기각되었다.


두 번째 방안은 대표적인 친한 선교사인 호머 헐버트에게 조선을 대신하여 청원하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문제를 외국인에게 대리하여 청원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판단하여 승만에 의해 끝내 기각되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겨진 선택지는 단 하나. 윌슨을 직접 만나 호소하는 방법뿐이었다.


대표들은 윌슨 대통령이 강화회의일정 중간 잠시 귀국할 시점에 맞추어 면담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예상대로 2월 중순, 윌슨 대통령이 워싱턴으로 돌아오자 승만은 곧바로 미 국무부를 찾아갔다.


“윌슨 대통령을 만나 뵙고자 왔습니다. 프린스턴대 교수 시절의 조선 학생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상황이 급하니 저희의 입장을 빠르게 전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승만과 만난 대통령 비서실장 조지프 튜멀티가 답했다.


“선생님의 입장은 이해하나 귀국 이후 일정이 빠듯하여 근시일 내의 만남은 어렵습니다. 오늘은 우선 돌아가시고 후에 일정이 정리되면 제가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비서의 단호한 거절에 승만은 우선 호텔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뒤, 한경은 대통령 비서실장이 보낸 편지를 가져와 승만에게 건넸다. 편지를 받아든 승만이 찬호와 함께 떨리는 마음으로 봉투의 밀랍을 뜯어 내용물을 읽어보았다. 한경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승만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언제 가능하다고 하시나요?”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다가오는 한경에게 승만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한때 스승이라 불렀던 자의 친필 사인이 이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편지를 내려놓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승만에게 찬호가 조용히 물었다.


“박사님. 이제 어찌하면 좋을까요.”


방법을 물었지만 승만이라고 해서 별다른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찬호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는 상황을 냉철히 인식해야만 했고 그다음 행보를 생각해야만 했다. 찬호의 물음과 함께 승만은 생각을 환기시키려 했고 한경은 생각에 빠진 그들 대신에 냉혹한 강대국들의 무관심을 비판했다.


“조선을 지도할 자라며 박사님을 그리도 격려해주시던 윌슨 교수가 대통령이 되니 바로 태도가 돌변해버리셨군요. 아무리 정치는 현실이라지만 정말 너무한거 아닙니까!”


한경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찬호도 공감했다. 한경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승만은 갑자기 무언가 머릿속을 강하게 스치는 것을 느꼈다.


조선을 지도할 자.


승만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한경에게 물었다.


“방금 무엇이라 하셨소?”


승만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한경의 몸이 움찔했다. 자신의 비판이 스승인 윌슨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여겨 화가 난 것이 아닐까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한경은 잠시 감정을 추스린 뒤에 승만의 물음에 답했다.


“윌슨 대통령을 모욕하고자 한 의도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아니, 그것 말고 방금 말했던 것 말이오.”


한경의 걱정과는 달리 승만은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어려웠던 한경은 승만의 지시에 따라 다시 천천히 자신의 말을 되뇌었다.


“아무리 정치는 현실이라지만-”

“아니, 그 전에.”

“조선을 지도할 자라며 박사님을 윌슨이 격려하셨다고…”


승만은 알겠다는 듯이 손을 들어 한경의 입을 다물게 했다. 갑작스런 손동작에 당황한 나머지 두 대표는 그의 다음 행동만을 기다렸다. 승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윌슨은 이전부터 세계를 하나의 연맹으로 만들어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랬소. 모든 국가가 하나의 연맹체를 구성하면 세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오.”


승만은 바카라꽂이에 꽂혀있던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 전문이 담긴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 그 맨 아래 있는 문구를 읽으며 말했다.


“윌슨이 만들고자 하는 국제연맹은 국가 간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기구요. 그렇다면 우리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 국제연맹의 통치능력을 시험할 첫 번째 나라로 만드는 것은 어떻겠소? 국제연맹의 존재가치를 높이는 제안이라면 윌슨도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이오.”


승만은 조선의 통치권을 국제연맹으로 이관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좋게 말하자면 현실적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굴욕적인 방식이었다.


그가 서류를 다시 바카라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손끝에 잠시 무거움이 있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 어구가 조선의 어느 골목에서 어떻게 읽힐지. 위임통치. 이 네 자가 그를 앞으로 어디로 데려갈지도. 승만은 무거움을 자기 안에서 조용히 눌러 내렸다.


찬호가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승만에게 물었다.


“말씀하시는 그 국제연맹이 우리 조선을 영구토록 통치하면 어떻게 합니까?”

“시한은 분명히 할 것이오.”


찬호의 우려에 승만이 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뚜렷한 확신은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경이 승만에게 물었다.


“하지만 우리 동포들이 이를 받아들이겠습니까? 모두가 완전한 독립을 바라고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조건부 독립이 아니구요. 그래서 강화회의에 가고자 했던 것 아니었습니까?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우리 스스로 독립할 자결권을 갖추겠다 주장하기 위해서요.”

“강대국들이 순순히 14개조 평화원칙에 순응할 것을 기대하지는 마시오. 차라리 십계명을 지키게 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니.”

“국제연맹도 14개조 중 하나 아닙니까?”

“그러니 저들의 장단에 맞추어줘야지. 그들이 노를 저을 때 우리는 뒤에서 바람을 불어 넣어주는 것뿐이오. 방향이 조금은 다를지라도 시원한 바람에 기꺼이 몸을 맡길 테지.”


윌슨의 14개조 전문을 바카라상 위에 올린 뒤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찬호가 14개조를 다시 읽어보는 사이 한경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는 통치의 주체만 바뀌었을 뿐 결국 종속관계는 여전한 것이 아닙니까? 미국이라고 일본처럼 우리 조선을 집어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북아메리카 대륙을 완전히 점령한 미국은 그 이상 대륙 밖으로 영토를 넓힐 이유가 없소. 국제슬롯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시아로 전선을 넓힌다면 이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만 천문학적으로 높아질테지. 지리적으로나 외교, 안보적으로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오.”


승만의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논리에 있어 결함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의 주장은 불가피한 상황임을 감안하더라도 동포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한경은 생각에 잠기며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였었다.


“모든 논리적인 말씀에도 저는 아직 불안감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소? 전 세계가 평화를 바라는 이 절호의 기회를 활용할 방법 말이오.”


한경은 자기 무릎을 잠시 바라보았다. 스승이라면. 스승 박용만이라면 이 자리에서 무엇을 했을까. 스승은 반대의 어구가 아니라 반대의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대조선국민군단이 그런 자리에 있었다. 총과 칼. 그러나 지금 이 방 안에는 총도 칼도 없었다.


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반대할 이유는 많으나 반대 이후 제시할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찬호도, 찬경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대표들 사이에서 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안이 결정되어 중앙총회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았다. 한경은 국제연맹 결성을 주장한 미 대통령에게 보낼 위임청원서 초안을 썼고 승만과 찬호가 이를 다듬어 윌슨에게 보냈다.


윌슨의 주장 중 하나였던 국제연맹은 열강국의 승인을 받아 이듬해 결성되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이 공화당이 다수였던 상원에 의해 부결되었다. 그로 인해 국민회 대표들이 보냈던 위임통치청원서도 한낱 휴지 조각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져 갔다.


잊혀져 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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