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편 (05)
신한청년당의 기대와 달리 규식이 파리로 가는 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먼저 출입국을 위한 여권을 마련해야 했으며 외교를 위한 경비가 필요했고 파리까지 가는 교통편을 별도로 구해야만 했다.
여권 문제는 다행히도 중국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 있었다. 일찌감치 여운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쑨원은 호법정부의 외교를 바카라임지고 있던 탕샤오이에 연락하여 여권문제 해결을 지시했다. 그 덕에 규식은 중국에 귀화한 한인인 김중문의 중국여권을 위장함으로써 프랑스로 떠날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경비문제는 그를 대표로 선출한 신한청년당의 당원들이 도움을 주었다. 장덕수는 국내에서,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모금을 하여 경비를 보탰고 자산가로 알려진 신석우도 경비를 지원해주었다. 규식 스스로도 몽골과 장자커우에서 사업을 하면서 모은 개인 재산을 경비로 사용했다. 이렇게 모인 돈이 자그마치 5만엔이었다.
교통편 문제는 마지막까지 규식의 골머리를 아프게 했다. 아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유럽으로 가는 육로는 멀고 험할 뿐만 아니라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시베리아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유일한 방법은 남중국해를 지나 인도양을 건너는 길이었는데 배가 자주 있지 않아 배표를 구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다. 이미 3월까지 만석이라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준비를 갖추어놓고도 발이 묶여 기회를 놓칠 판이었다.
규식은 상해의 부두를 매일 걸었다. 배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잠시 펼쳤다. 신부 순애가 난징에서 보내온 짧은 안부 편지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국을 분명 굽어살펴 주실 것이에요. 그는 그 편지를 다시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순애의 말대로 기적은 존재했다. 조선의 상황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파리강화회의 중국 대표단에서 배표 한 장을 양보하기로 한 것이다. 규식은 자신에게 표를 양보해준 중국 여성 수행원 정유슈에게 연신 감사의 말을 건넨 뒤 2월 1일이 되어서야 힘들게 상하이를 출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