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편 (02)
1918년 11월 11일. 세계의 절반을 갈라놓았던 거대한 전쟁이 동맹국 독일의 항복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스스로 문명국임을 자처했던 유럽 열강들이 서로 야만적인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던, 모순적인 전쟁이었다.
전쟁종식 소식을 전해 들은 승만은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윌슨이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시작할 것을 예상했다. 연초에 연설하였던 14개조 평화원칙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종전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발 빠르게 움직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과 유럽 열강들의 행보 하나하나를 추적하며 조선의 독립을 요구할 기회를 살폈다.
“박사님, 협상국들이 마침내 강화회의 일정을 확정지었습니다!”
현경이 이른 아침부터 신문을 들고 찾아와 강화회의 소식을 알렸다. 교장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승만은 현경의 말에 반색을 표하며 물었다.
“드디어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전리품을 나눠 가지려 하는군. 어디인가? 회의가 열린다는 곳이.”
현경이 신문을 잘 보이도록 펼쳐 승만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프랑스 파리입니다. 다음 해 1월 18일 개최한다고 합니다.”
신문을 읽은 승만은 다급하게 창호에게 전보를 쳤다.
이 중대한 소식을 창호도 모르지 않았다.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은 창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곧바로 재미 한인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12월 초일에 열린 그 회의에서 노스웨스턴대학교 조교수로 일하던 정한경, 한인중앙학교의 초대 목사인 민찬호, 그리고 한인중앙학교의 교장 이승만이 강화회의 대표로 선출됐다.
“이승만과 함께하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샌프란시스코 국민회관 중앙총회장실로 대뜸 찾아온 한경이 업무를 보고 있는 창호에게 화를 내며 따졌다. 한인소년병학교 1회 졸업생인 정한경은 스승인 박용만의 정적이자 하와이에서 그를 몰락시킨 이승만과 같은 대표가 됐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와이안 갱스터.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승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불편한 동거를 강제한 주역은 바로 안창호였다.
“회원들의 뜻입니다. 우남으로부터 배울 점도 많이 있으니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시지요.”
서로 상극일 수밖에 없는 둘을 대표로 추천한 이유는 분명했다. 그렇게 해야만 강화회의의 대표가 재미한인들의 총의를 온전히 대표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승만이 하와이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장악했다는 사실에 이견은 없었다. 그럼에도 분쟁의 여파는 오래 이어졌다. 박용만을 그리워하는 이들은 여전히 하와이에 많이 남아 있었고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아도 승만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마음까지도 위로하기 위해서는 박용만의 사람 중 하나를 대표로 내세울 필요가 있다. 그가 바로 정한경이었다.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그저 구색맞추기로 저를 추천했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그런 정치적 판단이 도리어 한경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한인대표에 선출된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할당에 의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경 스스로도 자신의 학식, 슬롯적 지위, 대외적 영향력 등이 승만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스승의 정적을 위한 들러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신을 괴롭힐 뿐이었다.
“본인 스스로에 대해서 본인도 잘 모르는군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과 함께 일해보는 것이 헨리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결국 한경은 남아 있는 찝찝함을 뒤로한 채 승만, 찬호와 함께 워싱턴으로 떠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한경은 승만을 처음 가까이서 보았다. 스승 박용만이 몰락한 자리에 있던 사람. 그가 알던 대로 승만은 왜소한 체구였다. 스승보다 훨씬 작았다. 그런데 그의 자리에는 이상하게 무거운 것이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다른 사람들과 결이 달랐다.
한경은 자기가 지난 며칠 동안 미리 준비해온 정치적 반박의 어구들을 잠시 안에서 뒤집어 보았다. 스승이 이 사람과 싸운 결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알 수 없는 자리가 있었다.
수면 아래 잠들어 있는 갈등은 물이 그 수위를 유지하는 동안은 드러나지 않는다. 독립운동계의 거두인 이승만이 추진하는 일에 일개 유학생에 불과한 한경이 가타부타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갈등은 물이 모두 빠져 위기에 처할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비자발급이 또 거부당했다구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프랑스로의 출국을 앞두고 찬호가 비보를 알려왔다. 워싱턴에 도착한 그들은 곧바로 미 국무부와 접촉하여 파리로 가기 위한 비자발급을 요청했다. 하지만 수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국무부는 그들의 요청을 계속 반려했다. 실질적으로 마지막 기회라고 여겨지던 요청마저도 거부당했고 이에 분노한 한경은 괜히 찬호에게 따졌다.
“대체 왜 비자발급이 거부된다는 말입니까? 세계평화를 내세운 회의에서 우리는 약소국이라 참석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대체 왜요!”
한경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승만은 창가 옆에 서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찬호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승전국에는 일본도 포함되어 있소. 일본을 불편하게 만들 위험을 미국 스스로 굳이 감수하지 않겠다는 말이겠지.”
찬호의 말을 들은 한경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승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한경이 따지며 말했다.
“윌슨과의 우정은 다 어디갔습니까. 그저 밥한끼 얻어먹는 식객에 불과했다는 말입니까?”
“한경, 진정하시게.”
“제가 어디 틀린 말 했습니까? 왜 매번 워싱턴에 와 비자를 발급받는 수고로움을 감수하죠? 진작 미국 국적을 취득했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다신 없을 황금 같은 기회를 이토록 허무하게 낭비한다구요?”
“정한경!”
찬호가 한경의 폭주를 말리며 소리치자 그들이 머물던 호텔에 무서운 정적이 감돌았다. 둘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던 승만은 창에서 시선을 거두어 한경을 향하며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았다. 그가 앉기 전에 자기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손끝의 흉터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잠시 드러났다가 그림자 아래로 다시 숨었다.
한경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승만의 불같은 성격을 익히 전해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그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한경에게 말했다.
“자네만큼은. 내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되네.”
그의 목소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 안에 단단한 울림이 있었다. 승만과 눈을 마주친 한경은 작은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위압감에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계속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승만은 작게, 그러나 묵직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미국 국적을 취득한다고? 그래, 프린스턴 박사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지. 윌슨은 내게 미국인이 되는 것은 어떤지 직접 권유하기도 했네. 만약 그랬다면 오늘과 같이 비자 발급문제로 강화회의 참석이 좌절되는 일도 없었을 거야.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승만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고문에 의한 흉터가 가득해 보기 흉했다. 삶에서 겪어왔을 고통을 섣불리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경은 승만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 사이, 승만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해 모든 백성들을 대표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고자 했네. 그런데 자네는 그 대표로서 나선 자가 미 국국적을 가진 외국인이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자네가 생각한 조선 대표의 모습이 그런 것이야?”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으며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출입국 허가가 어려워서?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어서? 대표로 나선 자 스스로도 다른 나라의 국적을 빌려 쓰는데 열강이 그런 대표의 독립운동을 진심으로 지원해줄 것이라 생각한 것인가? 이미 망해버린 나라를 포기하고 강대국에 귀화한 자를?”
한경은 자신이 승만의 말에 빠져들고 있음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난 승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실로 가며 힘겹게 말을 마무리지었다.
“조선은 곧 독립될 것이오. 적어도, 각국의 대표들이 그렇다고 믿게 만들 것이오. 그러니 내게 국적은 필요가 없소. 나라를 되찾는 그 날에 나는 우리나라의 국적을 취득할 것이니까.”
한경은 그동안 자신이 만난 어느 누구에게도 느끼지 못했던 민족지도자의 무게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침실 문이 승만의 등 뒤로 조용히 닫혔다. 한경은 승만이 앉았던 자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 자리 위에 승만의 손이 놓여 있던 자리. 손끝의 흉터가 그의 안에서 아직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자기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흉터가 없었다. 그가 소년병학교에서 훈련하던 손. 스승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총을 잡던 손. 그 손이 지금 승만의 손 앞에서 조용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