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옥상?

by빨양c



# 소설 소개: 마흔 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가을이네. 가을이야. 요즘은 그래도 가을이 좀 길어진 것 같기도 하고.. 세월이 좋아진 건가."

문을 열고 옥상에 들어선다.

커다랗게 파란 가을 하늘 눈을 가득 채운다.

문이 열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옥상은 꽤나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곳에 서라는 길을 안내라도 하는 것처럼 옥상 문에서 옥상 난간까지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동그랗고 커다란 돌이 피아노 건반처럼 나란히 놓여있었다. 누가 그렇게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의도대로 동그란 돌을 하나씩 즈려밟으며 한걸음, 한걸음 걸음을 옮긴다. 마지막 돌의 건반을 누르고 나자 노랗게 물들어버린 빳빳한 벼로 가득 찬 논밭이 눈에 들어온다. 출퇴근할 때 매번 지나왔던 논밭인데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뻥 뚫린 느낌. 경치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괜히 시원해진다.


딩동댕-

종소리가 들려온다. 종소리를 따라 눈길을 옮기니 논밭 풍경에 잘 스며든 작은 학교가 있다. 안타깝게도 아파트가 품어주지 못한 폐교인 듯 버려진 듯 덩그러니 휑해 보인다. 초품아에 들어간 초등학교들은 아이들이 과밀이라 난리라는데, 주변에 아파트 하나 없는 초등학교는 저 꼴이다. 저 넓은 논밭에 아파트 한 동만 올려도 저렇게 작은 학교에 학생들이 바글바글 할 것인데. 어떤 이유인지 이 회사 주변엔 아파트는커녕 새로 건물이 올라오지도 않는다.


'그래도 종이 울리는 걸 보면 애들이 다니긴 하는 건가?'

사무실 안에 있을 땐 학교 종소리는 아예 듣질 못했던 것 같다. 분명 저 종은 자동으로 울어댔을 것인데, 닭장 마냥 사무실에 갇혀 울부짖어대고 있는 직원들의 소리에 묻혔겠지 싶다.


학교 앞에는 1층에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는 낡은 건물이 보인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했는지 건물은 20년은 족히 되어 보인다.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노란색을 뒤집어쓴 카페 인테리어 때문에 건물이 더 낡아 보인다. 카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낡은 건물. 건물 위로 철새들이 V자 형태로 열과 오를 맞춰 가을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 슬슬 쌀쌀해지니 따뜻한 남쪽 나라를 향해서 떠나나 보다.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멋진 V자 모양으로 저 파란 하늘에 그림처럼 날아갈 수 있는지. 가을이어서인지, 하늘 때문인지, 아니면 그 둘 다 때문인지 퍽 감상적으로 된다. 이럴 때 글을 쓰면 대학시절 소위 '문신(문신)'이 강림해서 등단까지는 아니어도, 밀리언셀러는 만들어줄 글들을 쏟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베스트셀러보다 밀리언셀러가 좋다. 언젠가 등단을 하고, 그렇게 개망나니 유튜버 작가가 아닌 진짜 작가가 되면 베스트셀러보다 밀리언셀러인 바카라을 쓰고 싶다. 내 글 속 한 문단, 아니 한 문장이 밀리언 숫자만큼의 사람들의 마음에 어떠한 영감을 줄 수 있는 바카라. 가능하다면 영감보다는 한 줄의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작가.


철새가 시야에서 멀어지고, 가을바람이 코끝을 시큰하게 훑고 흘러간다. 제법 차가운 기운에 재채기가 한번 나온다. 재채기가 가을의 상념을 흩트리고, 내 시선은 가을 풍경에서 건물 옥상으로 옮겨간다. 오른쪽 옥상 난간 끝자락에 앉으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무너질 것 같은 벤치가 보인다. 앉아본다.


'오, 안 부서지네? 역시 나는 깃털 같은 여자.'


벤치에 앉아 시선을 멍하니 던진다. 분명 뭔가를 보고 있는데 그 뭔가가 뭔지 모를 정도로 멍하니 눈을 뜨고, 또 감는다. 치열한 온라인 게임 업무에 파묻히고, 소리 없이 울부짖는 온라인 게임 사람들 사이에서 참고, 사랑스럽지만 지치게하는 육아를 견디는 삶에 이런 멍 때리는 시간이 꼭 필요한데, 이럴 시간을 따로 낸다는 게 참 어렵다.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풍경, 이런 공간, 이런 시간에는 음악이 깔려줘야 하는데.'

지금 이 순간이 소설 속이었다면 음악이 흘렀을 것 같다. 작가에게 뜬금없이 갑자기 음악 하나 켜주는 건 그저 키보드 몇 번 두드려 한 문장 지어내면 가능한 일일테니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완연한 노을빛에 물든 가을 풍경이 벤치에 앉은 깃털처럼 가벼운 주인공의 눈가에 닿자 나지막한 음성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제목은 로이킴의 그때 헤어지면 돼. 5살 애까지 키우고 있는 아줌마지만, 제목과 가사에 상관없이 그저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음색에 물들어간다. 그래, 가을이었다.'


이 정도로 쓰지 않을까? 한 문장이 아니네. 역시 생각만 한 작가와 직접 작가가 돼 보는 건 다르다. 분명 한 문장이면 노래를 던져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4 문장이나 써야지 노래를 불러올 수 있다니. 덜어내는 걸 잘해야 진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잘 쓰는 건 당연한 거고, 잘 덜어내는 것. 밀리언셀러가 되려면 그걸 잘해야 한다.


아무런 노래도 흘러나오지 않는 고요한 옥상. 이 옥상 바로 아래층도, 그 아래층도, 그 아래아래층도, 업무에 치여 고통스러워하는 온라인 게임인들이 가득할 텐데, 이 옥상은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고요하게 머물러있었다니. 한 건물에 이런 이질감이 펼쳐진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나는 한동안 더 고요함을 만끽한다.


"응? 낙서?"

벤치 오른쪽 한편에 이제는 잿빛이 되어버린 색 바랜 글자가 적혀있다. 다 부서질 것 같은 벤치만큼이나 세월에 쓸려가지 않기 위해 무진장 노력을 한 것 같다. 뭐라고 쓰여있는지는 모르겠다.


'한자 같은데.. 무이위... 이 벤치 만든 중국회사 이름인 건가? 아님 메이드 인 중국을 한자로 표기한 건가? 모르겠다.'

순간의 호기심으로 잿빛 글자를 탐닉했지만, 모르겠다는 결론에 닿자 빠르게 관심이 식는다. 모르겠는 것에 더 에너지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시간에 내가 집중해야 할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일이든, 육아이든. 내 하루 에너지 총량은 정해져 있고, 모르는 것을 알아내려는데 그 에너지의 조금도 소모해서는 안된다. 육아휴직을 거치며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깨달은 점이다.


"... 이제 들어가야지. 일해야지. 일하자 일! 돈을 벌자! 으쌰으쌰!"

마흔이 되니 혼잣말이 확실히 늘었다. 편집자로서 원고를 볼 때 혼잣말 주절대는 순정만화 속 여주인공 같은 행태를 매우 비판했었는데, 그러고 있는 내 자신이 여전히 어색하다. 다음 원고 볼 때 여주인공의 혼잣말은 용인해 주어야겠다. 그런 삶도 있을 수 있으니까.


덜컹-

깃털 같은 내가 일어났는데 이 싸구려 중국산 벤치가 이제 살았다는 듯 기분 나쁜 소리를 내뱉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빈 종이컵 하나가 벤치에서 옥상 바닥으로 떨어진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종이는 종이통에. 비닐은 비닐통에. 엄마도 환경지킴이 해야 해!"


못 본 척하려는 찰나, 진경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우리의 위대한 어린이집에서 아이에게 어찌나 분리수거와 환경지킴이 교육을 잘 시켰는지, 하도 내게 말해서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귓가에 목소리가 울린다. 나는 무심한 손길로 바닥에 떨어진 종이컵을 든다. 바로 옆에 기다란 종이컵 수거 플라스틱이 눈에 띈다.


"좋아. 나도 환경지킴이다. 꺅!!"


쿵.

종이컵을 수거함에 넣고 뒤돌다 다리를 헛디뎌 옥상 바닥에 넘어졌다. 깃털 같은 내가 넘어졌는데 왜 쿵 소리가 이렇게 크게 느껴지나 괜히 짜증이 난다.


"어휴.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팔자로 가을을 누리겠어."


나는 잠시 벤치 앉는 곳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발목을 주무른다.


"하나, 두울, 셋, 넷... 열."

왜인지는 모르겠다. 저 망할 환경지킴이 종이컵 때문에 내가 넘어져서였을까? 바닥에 앉은 채로 눈길이 닿은 수거 플라스틱을 보는데 그 안에 종이컵 숫자를 세게 되었다. 그런데,


"열 개?"


쿵.

왜일까.

종이컵 숫자가 10개라는 생각이 들자, 아까 넘어질 때 들렸던 거슬렸던 육중한 쿵 소리가 다시 한번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쿵 소리와 함께 옥상에서 본 논밭, 학교, 종소리, 낡은 건물, 벤치, 알 수 없는 한자어가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스친다.


그리고 열 개.

주마등이 지나가고 다시 한번 종이컵 열 개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튕기고 일어나 옥상 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원고?!"


지금 내게 벌어진 일들이 원고 속 주인공과 똑같았다.



<다음 편 계속>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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