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맨날 나한테 예민하다고만 해?
# 소설 소개: 마흔 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넘어질 때 살짝 삐끗하긴 했는지, 아니면 옥상에서 너무 서둘러 내려와서인지 발목에 불편감이 느껴졌다.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나는 바카라상 아래 손을 뻗어 핸드백을 열어 원고를 찾는다. 이성적이고 충분히 합리적인 나이기에, 물론 육아휴직 전에는 풀 대신 열정을 집어삼키던 야생마 시절도 있긴 했다만, 당연히 머릿속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원고 속에 지금 내 삶이 그대로 적혀있고, 옥상에서 겪은 것처럼 벌어질 일이 그 원고에 다 쓰여있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확인해야 했다. 그 원고가 내 이야기인지. 내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왜 그렇게 닮아있는지. 옥상 풍경도. 초등학교도. 벤치의자도. 종이컵 개수도. 넘어지는 것까지. 왜 같은지.
없다.
원고가 없다. 오늘 새벽에 읽고 회사에서 마저 보려고 챙기려고 생각한 기억은 나는데, 그 이후가 잘 기억이 안 난다.
'이 핸드백이 아닌가? 안 넣었나? 어디다 뒀지? 그냥 집에 두고 온 건가?'
모르겠다. 꼭 원고 때문이 아닌데도 이제 내 기억을 잘 믿지 못하겠다. 진경이 출산 후 기억력 감퇴가 오더니, 마흔을 기점으로 점점 더 기억을 못 하는 것 같다. 마치 뇌 속 기억 담당 부분의 기력이 다 빠져 전원이 팍! 하고 나가버린 것 같다. 깜깜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옆자리 마 과장이 나를 이상한 사람 보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묻는다. 그럴만하다. 멀쩡히 걸어 나갔던 사람이 갑자기 다리 쩔뚝 거리며 우당탕 들어와서 사무실 바카라상 아래 쪼그려 앉아 핸드백을 우악스럽게 헤집고 있으니.
"아... 진경이... 진경이 거 뭘 갖고 온 줄 알았는데 없어서요..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서둘러 마 과장의 주위를 돌린다. 왜 급할 때 늘 아이 핑계가 먼저 나오는지 모르겠다. 나보다 진경이. 늘 아이가 먼저가 된 일상.
"아, 저도 가끔 그래요. 요즘은 더 그런 거 같아요. 마흔 되니 확실히 머리도 잘 안 굴러가고 살도 잘 안 빠지더라고요. 살 빼야 하는데..."
원고를 찾아야 하는데 왜 마 과장의 살 빼는 이야기로 대화가 끝나는지 모르겠다. 나는 마 과장의 말을 무시하고 바카라상 서랍을 열어 혹시나 원고가 있나 살핀다. 역시나 없다. 집에 있을 것 같긴 한데, 혹시나 어디에 빠쳐서 잃어버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워진다. 충분히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하지만 그 원고 속 주인공의 앞날이 내 앞날을 가리키고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의 불꽃 끝자락에 불이 당겨진 것 같다. 발목에 시큰거림이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장이라도 원고를 찾으러 집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비이성적인 원고에 대한 욕망은 이성을 강요하는 현실에 묵살될 뿐이었다.
꾸역꾸역 업무를 마치고, 진경이 하원을 위해 어린이집을 달려갔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자마자 식탁 위 가지런히 놓여있는 원고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장 그 자리에 앉아 야생마처럼 원고를 읽어 내려가고 싶었지만, 나의 아이는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평소처럼 무슨 정신인지 모를 부산스러운 정신으로 저녁식사를 먹고,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개고양이 밥 주고, 배변판을 치우고. 그러니 남편이 왔다. 회사 행사 준비로 야근이 잦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독 피곤해 보이는 눈치다. 아이를 재우는 동안 남편은 홀로 늦은 저녁식사를 한다.
치익-탁.
남편이 저녁 식사를 하며 먹을 맥주캔 따는 소리가 들린다. 일이 고단해서인지, 삶이 고되서인지 요즘 들어 맥주 먹는 날이 많아진 것 같다. 본인 생일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건 알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하긴 나도 내 생일 챙기는 게 큰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30대까지는 생일에 맛있는 걸 뭘 먹을지, 생일선물을 뭘 받으면 좋을지 이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그런 기대가 없다.
진경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다. 몰려오는 잠보다 원고를 확인해야겠다는 집념이 이겼다. 당연히 진경이보다 먼저 잠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이 화들짝 놀란다.
"요즘 술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뱃살, 심각하다."
남편이 화들짝 놀란 이유는 비단 내가 안 자고 나와서만이 아니었다. 맥주캔 옆에는 생선 구울 때 비린내 잡으려고 가끔 쓰는 초록 소주병이 놓여있었다.
'저 소주를 언제 샀더라... 꽤 된 거 같은데, 저렇게 먹어도 되나?'
소주에 유통기한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혹시 오래된 거 먹고 탈 날까 싶어 남편 옆으로 가 소주병을 들어 날짜를 확인한다.
"아니, 소주는... 요즘은 맥주 먹으면 배부르더라고. 그래서 소주 좀 섞어서 먹으려고..."
소주병을 들어 올린 나를 보고 왜인지 당황한 남편이 횡설수설한다. 마치 학교 선생님한테 혼나는 걸 무서워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술 먹는 남편을 한 번도 혼낸 적이 없음에도, 왜 이렇게 제발 저리나 모르겠다. 힘들면 술 좀 먹을 수 있지. 아! 가끔 잔소리는 좀했지만, 그건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지 내 화를 풀기 위해선 아니었는데.
"그래. 너무 늦게 밥 먹는 것도, 그리고 술은 더. 건강에 안 좋은 거 알지? 여보 몸은 여보가 잘 챙겨. 어린애 아니잖아."
이건 내 쪼다. 어린 시절 아픈 엄마를 잃은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그 트라우마를 애써 감추며 말하는 잔소리 쪼. 남편은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니, 요즘 온라인 게임이 좀 힘들어서 그래. 자려고 누워도 몸은 엄청 피곤한데 정신은 말짱해서 잠이 안 와서 한잔씩 하는 거야~ 얼른 먹고 잘게. 여보는 왜 안 자고 나왔어?"
어린애라는 말에 긁혔는지 남편의 목소리 톤이 정색하듯 사뭇 진지해져 버린다.
"아! 맞다 여보! 이것 좀 볼래? 여기야 여기. 여기 봐봐. 정말이야. 우리 회사 옥상도 이랬다니까? 학교, 벤치, 종이컵, 그리고 내가 넘어지는 것까지 원고랑 똑같아!"
나는 남편의 술상 앞에 마주 앉아 원고를 꺼내 가리키며 말한다.
"응?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지. 특히 우리 나이 때는 다 그러고 살아."
들뜬 나의 기대와 달리 시큰둥한 남편의 반응에 괜히 마음속에 서운함이 올라온다.
"아니, 이상하지 않아? 여기서 넘어지는 것까지. 그리고 종이컵 10개까지 똑같이 꽂혀있었다니까? 의자에 그 이상한 한자도 중국산 표기가 아니라 원고 속 한자일지도 몰라.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나는 한번 더 나의 이 놀라운 경험을 남편에게 공감받고자 서운함을 외면한 채 밝게 이야기하며 남편의 반응을 살핀다.
"여보. 들어가서 자. 나도 이거만 먹고 씻고 바로 잘 거야. 얼른 자야지 내일을 또 잘 살지. 아니 버티지.."
남편이 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대화를 끝낸다. 속상하다. 공감을 못 받은 것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얘기하는 것도. 섭섭하다.
"알았어. 들어갈 거야. 나도 얼마나 피곤한지 알아? 온라인 게임에, 집안일에, 진경이에."
내 말에 남편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나도 말을 안 하니 초라한 술상의 식탁에 적막만 흐른다. 남편도 나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올해 들어 유독 지쳐있는 건 왤까. 술상 앞 벽면에 걸려있는 결혼식 사진이 보인다. 젊다. 참 곱고. 곱다는 표현이 나오는 걸 보니 나도 나이가 제법 들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릴 적 할머니들이나 썼던 말투가 어색하지 않아 진다. 결혼식 사진 속 남편을 보고 지금 술상 앞 남편을 보니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흰 머리카락, 많이 날아간 머리숱, 면도를 함에도 거칠게 자란 수염, 지친 눈가, 짙어진 팔자주름, 분명 말랐는데 왜인지 붙어있는 턱살과 뱃살. 이게 짠한형이다. 술 먹고 신나 하는 연예인들이 짠한 게 아니라. 삶을 견뎌내고 세월을 정통으로 맞고 와이프 눈치 보며 몰래 소주 먹다 걸려 횡설수설하는 이 형이 찐한형이다. 짠한 남편을 보고 있자니 아까의 서운함이 제법 누그러진다. 그리고 이번 주에 있을 남편의 생일이 떠오르니 마음이 잔잔해진다.
"여보~ 다음 달에 진경이 생일 있잖아. 그때 어린이집 근처에 있는 파티룸 예약해서 진경이 친구들이랑 엄마들 불러다 생일파티 하려고. 요즘 또래 그렇게들 한다 하더라고. 회사 다닌다고 진경이 잘 챙겨주지도 못하는데 생일이라도 남들처럼 해줘야지."
정말 자기 생일인 걸 모르고 있을까 봐 진경이 생일로 힌트를 건넨다. 물론 진경이 생일 다음날은 내 생일인 것도 눈치채라는 마음도 당연히 담겨있다.
"휴. 파티룸? 그거 꼭 해야 돼? 알잖아. 우리 요즘 통장 상태. 이번 달 대출금도 겨우 막았어. 올해는 이사하는데 돈 많이 나가서 그냥 간단하게 하잖아. 생일은 내년도 있고, 계속 있잖아."
나는 그냥 간단히 자기 생일도 기억하고, 딸내미 생일 축하도 신나게 해 주고, 내 생일도 좀 기억해 주라는 딴에서 나름 배려해서 말했을 뿐인데 이 남편새끼 반응을 보니 참았던 서운함과 알 수 없는 억울함이 치솟아 오른다. 생일은 매년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생일은 5살이 마지막일 수도 있고, 40살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엄마의 40번째 생일이 마지막이었던 것처럼.
"아니! 나도 알지! 근데 왜 말을 그렇게 해?"
육아에 지쳐 잊히고 있었던 야생마의 분노가 슬슬 피어오른다.
"내가 뭘? 틀린 말했어?"
평소엔 그렇지 않은데 저 초록병 액체 때문인지 남편이 용감하게 맞선다.
"아니, 왜 나를 생각 없는 사람처럼 말하냐고. 나도 다 알지. 아니, 내가 더 잘 알지. 우리 통장 상태 최악인 거. 근데 왜 그렇게 나를 생각 없는 사람처럼 말하냐고. 여보 말투가 그렇잖아 지금."
"내가 언제 그렇게 얘기했어? 너야말로 나한테 왜 말을 그렇게 해?"
남편의 입에서 내가 했던 말이 고대로 나온다. 부부싸움은 늘 이런 식이다. '나한테 왜 말을 그렇게 해?'와 '나 좀 이해해 줘'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내가 했던 말을 상대가 그대로 한다. 마치 거울 속 자신과 말하는 것처럼. 한 가지 다른 건 거울 속 자신에게는 이렇게 목소리를 키워 화난 채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
"됐어. 내가 뭘 바라겠어. 그만해. 진경이 깨. 깨면 재우지도 못할 거면서."
나는 남편의 약한 점을 건드린다.
"그래, 그만하자 그만해. 왜 이렇게 예민해? 지친다 진짜."
남편도 나의 약한 점을 건드린다.
서로의 약한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상대에게 상처를 가장 쉽고 가장 크게 주는 존재.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