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싸구려 아니면 재활용

by빨양c



# 소설 소개: 마흔 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끼이익-쿵.


남편과의 작은 말다툼 소란을 뒤로하고 옷방에 들어가 낡은 문을 닫는다. 마음 같아선 남편 보란 듯 쾅! 하고 문을 닫고 싶지만, 진경이가 깰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소리를 낮추게 한다. 하지만 화장대 위에 원고를 거칠게 내던져놓음으로써 일말의 자존심을 보인다. 남편은 물론 아무도 모를 자존심.


화장대 앞 방바닥에 쭈그려 앉는다. 집을 줄여 이사 오면서 화장대 의자를 버렸더니만 이 꼴이다. 평소 화장을 잘하지 않아서 필요 없다 생각했는데 내 마음 한편 쉴 곳이 이렇게 초라하게 돼버릴 줄 미처 몰랐다.


"나이 들수록 옷을 잘 입어야 돼. 얼굴이 못생겨지거든."

분명 화장대 거울에 비친 건 내 얼굴인데 왜 남편의 목소리를 내며 내게 말을 걸어오는지 모르겠다. 얼굴이 엉망이다. 피부는 처지고, 모공은 넓어지고, 눈썹도 반이 날아갔다. 눈가 주름은 자글자글 하고, 죽은 깨인 지 주근깨인지 얼굴에 흩뿌려져 있고, 팔자 주름은 깊게 파이고.


"화장을 잘해야 돼. 나이 들수록 얼굴이 못생겨지거든."

거울 속 내가 나를 똑바로 보며 말을 걸어온다. 이번에도 남편의 목소리다.


휴대폰을 꺼내 중고거래 어플을 열어 모공을 줄여주는 기계를 검색해 본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광고에서 우연히 알게 된 기계인데 새 거는 20만 원이 넘어 다 상술이라며 욕지거리 시원하게 내뱉었다. 혹시나 싶어 중고거래 어플을 검색해 보니 몇 개 뜨긴 하는데 그래도 가격이 10만 원을 웃돈다. 여전히. 왜 내가 사고 싶은 건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지 의문이다. 어쩌다 인생이 중고거래나 가성비 어플로 점철된 건지. 싸구려 아니면 재활용. 그렇다고 놀고먹는 것도 아닌데. 출근하고, 돈 벌고, 애보고, 밥 차려먹고, 치우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그저 어릴 때부터 봐온 대로, 그저 남들 사는 대로, 딱히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못나지도 않게. 그렇게 그저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왜 인생은 이렇게 비굴해지는지 모르겠다.


나이 들수록 못생겨진다는 얼굴 좀 지지려는 모공 줄이기 기계하나 새 걸로 못 사고 중고어플이나 캐야 하는 내 신세라니. 내 인생이 이 꼴이라니.


예민하다고?

남편은 내게 예민하다 한다. 그러면서 또 나를 생각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한다. 예민한데 생각 없다는 말이 같이 쓰일 수 있는 말인가 속상해진다.

그저 워킹맘이라 못 챙겨주는 것 같아서, 아이 생일날 만큼이라도 다른 친구들 했다는 파티룸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주자고 한 말이 그렇게 생각 없는 말인지 나를 의심하게 된다. 내가 정말 예민하기만 한 건지 나를 자바카라하게 된다. 아이 영양제, 한글 공부, 영어 유치원.. 뭐 이런 대단한 걸 해줄 수 있는 워킹맘도 못돼 주는 못난 엄마인 것 같아 아이를 향한 미안함이 울컥 올라온다. 자격지심이 켜켜이 쌓이는 것 같다. 온라인 게임에선 온라인 게임대로 까이고, 아이에겐 아이대로 못해주고. 이도저도 아무것도 제대로 못해내고 있는 내 모습에 한숨이 켜켜이 나를 짓누른다.


"넌 그것밖에 안돼. 기를 쓰고 용을 쓰고 발버둥 쳐봐라. 당근 아니면 다이소지. 가성비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싸구려 아니면 재활용, 그게 너야."

거울 속 내가 나를 째려보며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근데 왜 남편새끼 목소리로 말하는지 모르겠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얼굴은 내 얼굴인데 목소리는 남편 목소리로 닮을 줄은 몰랐다.

진짜 남편이면 조목조목 반박이라도 할 텐데, 내 얼굴을 한 남편 목소리에는 움츠려든다. 가장 믿고 의지하는 존재의 목소리가 가장 오랫동안 봐온 내 얼굴로 전해질 때, 나는 그런 존재를 마주할 자신이 하나도 없다.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도 한없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눈길을 피해 시선을 떨군다.

눈에 원고가 들어온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지 아무런 감정 없는 내 손길이 원고를 촤르르 펼친다. 혹시 원고 속에도 남편과 다툰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 이 원고에 주인공의 모습이 나와 이상하리만큼 닮아 있어서 소름이 끼쳤으니, 그렇다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모든 감정에 대한 답이 혹시 원고 속에 있지 않을까 황당한 마음이 든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세상 속에 사는 나지만, 지금 나를 향한 답이, 나를 위한 위로가, 어떤 무언가가 있기를 괜스레 바라게 된다. 이성은 비웃지만 마음은 흔들린다.


<대필 원고>


네 글자의 소제목에 눈길이 머문다. 원고 속 편집자인 주인공이 담당한 작가가 알코올중독만큼 늘 술을 달고 살아서 일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아 힘들어한다. 주인공이 온라인 게임인 출판사 사장의 친구인 작가. 한 때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술 중독에 빠져 나락으로 가고 있는 노년의 인생. 출판사 사장은 친구이기에 그의 재기를 위한 바카라을 내기 원한다. 주인공은 이미 나락의 끝자락에 서서 비틀대는 알코올중독 작가의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 고통에 휩싸여있다. 젊은 시절 그가 쓴 원고를 짜깁기해서 얼추 분량은 좀 나왔는데, 마무리 글을 작가가 써줬으면 하는 마음에 계속 부탁하고 있다.


<에이씨. 술맛 떨어지게 자꾸 똑같은 말 하네. 그냥 니가 쓰면 되겠네. 그냥 니가 대신 써. 대필. 그래 대필 작가? 멋지네. 편집자 따위보다는 작가가 낫지 않아? 대필인 게 좀 그런가? 나만 입 다물면 누가 알아. 그걸로 해 그냥 그걸로~>


술에 쩌든 작가는 주인공을 향해 막말을 내뱉는다. 남몰래 작가를 꿈꾸던 편집자였던 주인공 화의 불길을 당긴다. 그 길로 선배, 팀장, 부장, 회사를 향해 어려움을 토해보지만 주인공 주변 모두가 그 작가인지, 사장 친구인지 술주정뱅이의 말이 틀린말 없다며 주인공에게 대충 써서 마무리하라 강요한다. 결국 대중이 보는 건 바카라 내용이 아니라 마케팅이라고. 일단 원고만 마무리 지으면 그다음 잘 포장해서 대중을 속이는 건 회사가 할 테니 대충 원고나 마무리하라 한다.

대충이란 걸 용납할 수도, 대신을 용납할 수도 없는 주인공은 좌절과 고민에 휩싸인다. 주인공의 머릿속에 딸과 남편과 대출, 팍팍한 현실이 스쳐간다. 분노를 참아야 하고,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주인공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내 현실이 겹쳐 보인다.


AI로 대충 마무리 하라며 꼬부랑 한국어를 내뱉던 유튜버 작가사칭범과 대필로 대신 마무리 하라며 꼬부랑 술주정을 내뱉는 주정뱅이 작가사칭범이 다를 바 없어 보인다. 20년 전 원고인데, 20년이 흐른 지금 과연 무엇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똑같네.. 나랑..."

원고 속에서 또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주인공을 보니 더욱더 원고에 집착하게 된다. 다른 점은 이 원고 속에는 주인공의 결말이 있을 거라는 거. 현실의 답도 없는 나와 달리.


나는 서둘러 원고 속 주인공의 결말을 쫓아간다.

주인공은 결국 대필한다. 어느새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잔뜩 한 못난 편집자인 나는 그런 주인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필하게 된 이유, 주인공의 감정, 회사의 압박 등등이 퍽 자세하게 쓰여있지만 편집자의 능력으로 단어만 캐치해 가며 빠르게 스킵한다. 결과적으로 대필한 그 바카라은 대박이 난다. 술주정뱅이 작가의 인생에 두 번째 베스트셀러라는 영광을 쥐여준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최고의 편집자라는 명성이 주인공에게 부여된다. 물론 독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저 회사에서, 업계에서나 통하는 인정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안다. 그 바카라의 편집자가 그 바카라의 대필작가라는 사실을.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독자뿐이다.


1쇄, 2쇄, 3쇄... 계속 바카라이 찍히고 팔려나간다. 5쇄쯤 넘었을 때 주인공은 회사에 정식으로 요청한다. 이후 찍히는 바카라 속 편집자에서 본인의 이름을 빼달라고.

"그러지 뭐"

회사는 단 네 글자로 작가의 요구를 수용한다.

마치 처음부터 원고 속 주인공 따위 귀찮은 존재였다는 듯이.

이제는 너같은 거 없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가슴이 먹먹해진다. 거울 속 비난을 피해 나를 대신해 시원하게 남편 욕 실컷 하는 내용을 원고에서 찾으려 했을 뿐인데 더 어마어마한 것을 마주하게 되어버렸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주인공이라면 이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주인공이 나라면,

AI로 대충 마무리하라는 유튜버작가의 요구에,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유난 떨지 말라며 나를 몰아붙이는 회사에,

20년 전 주인공이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다음 편 계속>


월요일 연재
이전 17화17. 다툼,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