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 없는 게 죄고, 빽 없는 건 서러운거야.
# 소설 소개: 마흔 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뭔 느낌인 지 몰라?”
구 팀장의 습관적 멘트다. 요즘말로 습관적 쪼. 옛날말로 쪼다 같은 습관.
설명을 개떡같이 하면서 상대방에게 느낌을 강요하며 뭔지 찾아내라고 하면 상대방이 어찌 찾을까. 자기도 모르는 답을 상대방에게 찾아내라고 하면 어쩌나.
구 팀장의 쪼는 상대에 따라 달라질 뿐 결은 같다.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직원에게는 "몰라?"로 끝나고, 자기편이라 믿는 직원에게는 "알지?"로 끝난다는 차이뿐. 왜 회사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오직 소문과 알 수 없는 본인만의 판단으로 스스로 니편, 내편을 가르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설명해 줘도 뭔 느낌인지를 모르니 그냥 벽에 대고 말하는 게 낫겠다. 아~ 아니면 영어로 해줄까? 미국에 오래 있어서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거야? 북페어 이제 3주도 안 남았어. 쓰.리.윅.스! 알아 몰라? 근데 여태 메인 포스터 컨셉하나 못 잡아서 쩔쩔매면, 부스 현수막, 백드롭, 리플릿, 굿즈 이런 건 언제 만들래? 페어 다 끝나고 만들어서 홍보 돌려고? 왜?~ 그냥 아예 회사 망하라고 굿판 벌이지 그래? 참..."
"죄송..."
"아니, 죄송은 집에 가서나 하시고. 회사는 죄송으로 끝나면 안 되는 거 몰라? 왜 하필 우리 팀에 이딴 걸. 어휴. 됐다 됐어. 내 팔자지 내 팔자야."
커다란 몸집으로 쩔쩔매는 마 과장과 조그마한 몸으로 쨍쨍거리는 구 팀장.
팀장은 분명 팀원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자리일 텐데, 전혀 대화가 안 되는 저런 구역질 팀장이 팀장으로 떠억-하니 앉아있으면 팀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아는 구 팀장은 참 단순한 사람이다. 누군가 평한 대로 멍청하지만 곤조 있는 사람. 무식하게 고집만 있는 사람. 나랑 같은 마흔 살. 나보다 입사가 1년 정도 빨랐고, 그래서 나와 동갑이라는 걸 알게 된 직후부터 철저하게 선, 후배로 선긋기를 했다. 구 팀장은 결혼은 했으나 아이는 없다. 남편은 꽤나 돈 많은 집안사람이라는 소문이었고, 딩크족으로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합의하에 결혼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부부간의 합의가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지 잘 아는 나이기에, 그런 합의만으로 아이를 갖지 않게 되었다는 건 헛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연이 있겠지 싶지만 굳이 더 소문을 캐진 않았다. 귀찮고, 알아서 좋을 일도 아닐 듯하여.
내가 야생마 시절에는 구 팀장과 치열하게 경쟁을 하기도 했지만,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쓰면서 회사 내 입지는 갈리기 시작했다. 2년 하고도 90일의 시간을 휴직으로 보낸 나에 비해 아이가 없는 구 팀장은 회사에 충성했고, 내가 휴직을 하고 얼마 뒤 팀장을 달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축하는 하지 않았다.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면 당시 진경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이 빠져있었거나.
육아휴직에 복직하니 아이러니하게도 구 팀장의 팀으로 발령이 났다. 자존심 상할 일이었지만, 휴직 전 나와 휴직 후 복직한 나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집만 아니면, 육아만 아니면, 그 어디든 좋았다. 그게 회사여도, 구역질 나는 구 팀장을 팀장으로 따라야 하는 것도, 그저 아침에 아이를 무사히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사무실에 앉아 가만히 모닝커피를 한잔 마시며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순간만으로도 2년 90일의 육아휴직의 고통보다 나은 선택이었다.
"진경엄마! 나 나갔다 올 테니 마 과장 포스터 시안 좀 같이 좀 봐봐. 못해먹겠다 진짜. 스트레스 뻗쳐서. 거래처랑 점심 먹고 올 테니까 뭔 일 있으면 전화해! 간다!"
구 팀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복직하고 얼마가 지나자 구 팀장은 나를 진경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딴에는 동기이기도 해서 친하니까 그렇게 부른다고 본인이 소문을 내고 다녔다. 불편했다. 휴직 전 나였으면 대번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받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대략 짐작은 한다. 구 팀장은 사실 저 "엄마"라는 호칭을 부러워하는 것 같다는 짐작.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구 팀장은 아이를 갖고 싶었으나, 갖지 못했고, 그래서 아이를 갖고 무려 회사 최초로 육아휴직까지 과감하게 써버린 내게 "엄마"라는 호칭으로 부러움 섞인 조롱을 하는 것 같다는 짐작. 언젠가 한 번은 호칭으로 구 팀장과 부딪히긴 해야 할 텐데, 귀찮다. 진경이 등원시키고 사무실에 앉으면 구 팀장 들이받은 기력도 없다. 그래서 그냥 두고 있다. 기분은 나쁘지만 정말 귀찮아서.
쾅-
내 대답을 뭐라 듣기도 전 문을 박차고 나가는 구 팀장. 역시 대화를 모르는 팀장 답다는 생각이 든다. 구역질 나는.
구 팀장은 동기들보다 팀장 승진을 한 편이었다.
멍청한데 곤조가 있다고 대부분 평가하지만, 내가 보기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약삭빠른 소문 수집 능력.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사를 향한 아부. 싸바싸바.
멍청함과 곤조, 그리고 소문과 아부가 합쳐지면 구 팀장이 된다.
이보다 정확한 평가가 없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우리 회사. 이 출판사도 업계에서 20년이 넘은 나름 중견기업이다. 잘되는 회사인지는 모르겠는데, 업력이 길다는 이유로, 다 망해가는 출판 업계에거 잘 버텨왔다는 이유로, 그렇게들 부른다.
창업주는 내가 휴직을 낸 직후인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이 회사 최초로 육아휴직을 낸 나를 승인해 준 감사한 분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출산에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세상을 떠나셨다는 부고를 들었다. 경영 승계는 창업주의 아들로 이어졌다. 너무도 흔한 이 나라의 중견기업들이 그렇듯. 들리는 소문엔 창업주의 배다른 딸이 있어서, 아들과 경영 승계 집안 경쟁을 했다고는 하는데, 파워싸움에서 밀려 아들이 물려받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현 사장님, 그러니까 그 아드님의 경영능력을 잘 모르겠다. AI로 바카라 만들자는 망할 유튜버가 우리 회사의 올해 최고의 기대작이라는 걸 보면, 20년 동안 회사를 나름 키운 창업주에게 경영 능력은 유전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리고 바로 구 팀장이 이 아들과 같은 초등학교 동창이란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창업주의 아드님이자 현 사장님이 나와 구 팀장과 같은 마흔이라는 말. 마 과장도 마흔이라고 했으니까, 마흔 인 남편까지 하면, 요즘 내 주변엔 참 마흔들이 판을 친다. 그런데 어찌나 사는 모습은 이리도 다들 제각각인지. 아무튼, 그 아드님과 초딩 동창인 인맥 덕분인지, 내가 휴직으로 자리를 비운 직후, 그 아드님이 현 사장님으로 부임받은 직후, 구 팀장은 팀장으로 바로 승진했다. 동갑이고, 초딩 동창인데도 그 아드님께 사장님~사장님~호호호 하면서 그렇게 아양방구 굽신 굽신을 한다는 구 팀장.
빽 없는 게 죄고, 빽 없는 건 서러운 거다.
현실은 그렇게 정의롭지가 않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계속 그렇게 더 열심히 일을 맡게 된다.
정의롭지 않은 사람은 더 정의롭지 못하게 조직에서 승진을 해 나아간다.
공정하지 않은 현실.
이제 그걸 깨닫는다.
그게 때때로 참 서글프다.
육아휴직 쓴 게,
그것도 회사에서 처음으로 쓴 게,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승진은커녕 월급도 제한을 걸어버리다니.
서글프다.
나만 서글프면 되는데,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서 나처럼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진경이가 이런 자리에 앉아 일하며, 혹시나 지금 나와 같은 서글픔을 느끼게 될까 봐 서글프다.
나중에 나의 아이가 다니는 회사는, 조직은, 슬롯는, 세상은...
조금이라도 변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공정하고, 조금이라도 정의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딴에는 내 합리적 기준에 맞춰 불합리에는 소리를 내려고 하긴 하는데,
그 마저도 육아에 치이고, 구 팀장에 치이고, 정의롭지 못한 회사에 치이면 힘이 없어진다. 기력이 없다.
그게 또 날 서글프게 만든다.
"저기... 팀장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느낌이란 게 혹시 뭔지 아세요? 이 포스터.. 팀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업체 통해서 한 건데... 팀장님의 느낌이 뭔지 모르겠어서요..."
구 팀장의 짠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더 서글퍼진다.
"그러게요. 그 느낌이 도대체 뭘까요 마 과장님. 느낌으로 일하는 사람 너무 싫은데, 너무 가까운 곳에 느낌으로만 일하시는 분이 계시네요. 답답하죠.. 뭐.."
"그렇죠.. 뭔가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팀장님도 구체적으로 뭘 원하시는지 모르시는 것 같고... 그러니까 답을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한테 답을 내놓으라고 하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이럴 땐 그래도 업체가 전문가들이니까 업체 느낌이 맞는 거 아닐까요? 시간 3주 남은 건 아는데... 팀장님이 시안을 계속 바꿔서 이렇게 지연이 되는 건데... 다 저 때문이라고 하시니까... 정말 힘드네요.. 미국에선 이런 식으로 일 안 하는데 말이죠.."
이건 마 과장의 쪼다. 미국 출판사에서 일한 경력을 입에 올리는 쪼. 한국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불쌍한 쪼.
"휴. 안 되겠어요. 조만간 인사팀장이랑 진짜 면담 한번 해야겠어요. 저 팀장님만 바꿔줘도 좀 나을 텐데 휴.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면담 가는 거 어때요? 아무래도 우리 둘이 바꿔달라고 하면..."
구 팀장한테 탈탈 털린 게 가련해 보여서 이야기 좀 들어주려 했건만, '우리'로 엮는 마 과장의 말에 심기가 거슬린다. 인사팀장이 자기 부하직원이라도 되는 양, 저 구 팀장을 바꿔달라고 할 생각을 하는 거 보면 참 아메리칸 마인드가 저런 건가 싶기도 하다.
"근데 정말 인사팀장님이랑 조직팀장님이랑 친하세요? 어떻게 아시길래요?"
야생마의 성향이 조금 남은 나는 마 과장에게 다이렉트 직구로 물어본다. 내 직구가 몸 쪽 깊숙이 박혔는지 마 과장이 갑작스레 헛기침을 한다.
"콜록. 콜록. 아. 뭐.. 어찌저찌 알게 되었어요. 당연히 친하죠. 절친이죠 절친! 하하! 아~ 제가 진짜 입 뻥끗하면 구 팀장님 날아갈걸요? 참. 이런 거 보면 한국에선 정말 인맥이 중요한 거 같아요. 이런 거라도 있어야 사람들이 저를 안 깔보죠. 인맥관리는 좀 하세요? 잘 챙겨두세요! 이게 다 자산이에요 자산!"
"아, 그러시구나. 근데 제가 말씀드린 적 있나요? 구 팀장님이랑 저랑 입사하고 얼마 안 됐을 때 구 팀장님이 저한테 했던 말이랑 똑같은 말 하시네요 마 과장님도. 인맥이 자산이라는 말."
내 갑작스러운 고백에 마 과장이 몹시 당황한 눈치다. 본인의 모습에서 구 팀장과 닮은 면이 보였다는 건 꽤나 고통스러운 일일 게다.
"그때 제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하지만 옛 성질머리가 남아있는 야갱마는 그런 마 과장의 고통따위엔 관심이 없다.
"콜록콜록. 아이고, 사레가 들려갖고. 콜록. 뭐. 콜록 뭐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회사에 친목도모하러 다니지 않아요. 인맥? 그건 스스로가 별로인 사람이 하는 거라 생각해요. 전 별로 관심이 없네요."
마 과장한테서 구 팀장의 옛 모습이 보여서였을까. 나는 몸 쪽 깊이 파고들다 못해 온몸을 강타하는 아픈 직구를 마 과장에게 꽂는다. 휴직 전에는 이런 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진경이를 낳고는 나도 많이 바뀌긴 한 것 같다.
"히히. 마 과장님~ 놀라셨죠? 농담이에요 농담. 저 보시면 아시잖아요~ 저 같은 쫄보가 그랬겠어요~? 상상만 하고 말았죠. 그냥 그러고 싶었다~ 뭐 이런거죠 히히.”
나도 많이 바껴 아줌마 다 됐다 싶다. 직구에 때려 맞은 상대방이 많이 아플까 봐 살살살살 달래주는 이 착한 마음씨를 보면.
따르르릉-
전화가 울린다. 내 직구에 부상당한 마 과장이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받는다.
"아, 네네. 아! 작가님! 아 그게 아니고... 아 AI로요? 아..."
전화를 받던 마 과장이 전화 상대방이 유튜버 작가라는 걸 눈짓 손짓 발짓을 통해 전하며 어떻게 하냐는 가련한 눈빛을 보낸다.
"아~~ 네 선생님!! 진경이 가요? 어머어머!! 잠시만요!!"
마 과장의 가련한 눈빛에 더 가련한 눈빛으로 급한 사정이 생겼음을 쏴 붙이고 핸드폰으로 전화통화를 하며 사무실 문을 나온다.
"아~~~ 네~~~ 진경이가 그랬다구요?? 아~~~ 네~~~"
탕비실을 지나 건물 계단실까지 나온 나는 핸드폰을 뚝 끊어버린다. 전화온건 뻥이었다. 그저 유튜버 작가를 마 과장에게 던져놓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난 뻥. 핸드폰 액정화면에 진경이가 갈 곳을 잃은 날 보며 활짝 웃고 있다.
"응? 그러고 보니 이 건물 옥상이나 가볼까? 가을이니 경치는 괜찮을 텐데... 문이 열려있으려나."
올라가는 계단을 올려다보던 나는 갈 곳 잃은 걸음을 위쪽으로 옮겨본다.
끼익-
다 녹슨 낡은 쇠 손잡이를 돌려 옥상 문을 힘줘 밀치니 문이 활짝 열린다.
문 너머에는 완연한 노란 가을빛이 회사 밖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