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가 문제인가 보다.

또.

by빨양c



# 소설 소개: 마흔 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엄마!!!!"


아침의 일이 내심 걸려 팀장 눈치고 마 과장 야근이고 뭐고 간에

18시 땡 치자마자 뛰쳐나와 괜히 죄인의 몸짓으로 어린이집 입구에서 기다리는 내 앞에


새콤달콤의 속상함은 이미 용서한 지 오래라는 듯 눈부신 미소로 나타나는 내 딸.


매일 보고, 매일 혼나고, 매일 싸우고, 매일 울고,

그런데도 매일 날 먼저 용서하고 마는 기특한 내 딸.


"나 놀이터에서 놀고 갈래!!!"

반가움도 잠시,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뱉어내는 다음 내 할 일인 저녁식사 준비가 떠올라 재촉의 손길을 하는 내게 진경이는 또다시 난제를 던지고 만다.


요즘 들어 부쩍 하원길에 바로 집으로 가질 않고 어린이집 앞에 있는 모래 놀이터에서 놀고 가려는 딸.

이미 놀이터에는 하원을 당차게 거부하고 모래놀이, 그네, 미끄럼틀 삼매경인 어린이집 또래 친구들이 놀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와 같은 저녁식사준비라는 미션에 발을 동동거리는 학부모들이 어서 가자며 서로 아이를 집에 꼬셔서 데려가는 스킬을 마구 시전하고 있다. 아이들에겐 하나도 먹히지 않지만.


"그럼 아빠 전화 올 때까지만 놀고 가자. 알았지?"


"응! 엄마 최고~!"


말은 최고지만 이미 진경이의 발은 놀이터로 달려가고 있다. 당찬 "응!"과는 달리 몇 분 후 안 가겠다며 울고불고 난리겠지.


모래놀이터 밖 벤치에 앉아 진경이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참 잘 논다. 놀이터가 전부인 때. 저 전부만으로도 행복한 때. 그때를 지켜주려고 이러고 살고 있는데, 뭐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는 때.


놀이터 주변으로 다른 학부모들이 눈에 들어온다.

육아휴직 후 복직한 나는 왜인지 의기소침해져서 다른 학부모들과 말을 잘 섞지 못한다. 딱히 할 말도 없고, 지친 거 같기도 하다. 워킹맘이 아니었다면 달랐을까. 전업 주부라면, 그래서 아이 옆에 계속 붙어 아이의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는 워킹맘이 아닌 그냥 맘 한 글자로 살았다면, 달랐을까.

엄마들이라는 새로운 슬롯 속에서 보다 더 밝고, 보다 더 사교성 있는 맘이 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지쳐있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다른 워킹맘들은 나 같지 않을까.


수많은 물음표들이 그 짧은 벤치 위에 둥둥 떠다닌다.


"유난 좀 떨지 마."

그러다 무심한 한 문장이 벤치 위를 썩뚝 잘라낸다.

누구였더라. 남편이었던가. 아빠였을까.

남편이었던 거 같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렇다 해두자. 뭐든 좀 꺼림칙한 건 남편 탓을 하면 백 중 구십은 맞는다.


"다른 집도 다 이렇게 살아. 아니, 더 힘든 집도 많아. 그러니까 유난 좀 떨지 마."

이거였던 것 같다. 육아로 기억력의 상당부가 소실된 나지만, 편집자 특유의 종특으로 문장을 기억해내고 만다.


유난을 떤다.

다섯 글자로 된 한 문장에 마음이 썩뚝 두 동강 나는 기분이다.

난 유난을 떤 게 아닌데. 그냥 생각이 난 거고. 그 생각을 말해본 거고.

그것뿐인데, 굳이 마음을 두 동강 낼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느새

유난을 떤다, 다섯 글자가

내가 문제인가 보다, 여덟 글자로 남고 만다.


저 모래 놀이터 주변에서 어서 집에 가자고 설득하느라 진땀 빼고 있는 저들도

유난을 떨고,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할까.

워킹맘이란 다 그런 걸까.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음에도, 왜 늘 스스로가 문제의 물음표로 마음을 두동강내게 되고 말까.

아무런 답도 내릴 수 없는 문제의 물음표로.


"진경!!! 아빠 전화 왔다!!! 가야지!!!!"

이렇게 크게 소리쳐도, 당연히 저 아이에게 닿진 않을 거다.

왜 알면서도 나는 소리를 치고 있는 걸까.


한 손에는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나는 핸드백. 한쪽 어깨에는 파란색 아이의 어린이집 가방을 둘러멘 기사 같은 발걸음으로 모래놀이터 전장으로 향한다. 알람으로 설정해 둔 남편의 사진이 뜬 휴대폰을 꺼내 보인다.


"진경아! 봐봐. 아빠 전화 왔지? 이제 가자. 아까 약속했..."


쌩-

쌩깐다, 는 말을 만든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

정말 쌩-이라는 소리가 나면서 가버린다.

진경이를 낳고 키우면서 편집자로서 한글 표현의 멋을 새삼 느낀다. 제길.


"진경. 이제 다섯 셀 거야. 엄마는 너한테 충분히 기회를 줬어. 그렇지? 하나- 두울-"

안다. 다섯을 다 세도 사랑하는 내 딸은 들은 척도 안 할 거라는 걸.

그래도 어떡해. 수많은 유튜브 속 육아 전문가들이 이렇게 해보랬는걸.

아이에게 A 또는 B. 두 개의 선택권을 주고 고르게 한다.

골랐으면, 다섯까지 세고 따르게 한다.


근데 그다음이 없다.

다섯까지 셌는데도 쌩을 까버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싫어!!!!!!!!!!!!"

아이는 소리 지르는데, 엄마는 소리 지를 수 없다.


"엄마 싫어!!!!!!!!!!!"

아이는 싫다는데, 엄마는 싫다고 할 수 없다.


"으앙~~~~~~~~~~~~~~~"

아이는 우는데,

엄마는 울 수가 없다.


정말 울고 싶은 날인데,

울 수 없다.

그게 아이 앞이라면 더욱.


집에 가자는게 이렇게 서럽게 울 일인가.

또 물음표다.

아까와 같은 수많은 물음표들이 아이의 눈물로 얼룩진다.


또,

내가 문제인가 보다..

눈물은 워킹맘에게 늘 같은 문장을 물들인다.


최선을 다하는데, 정말 내가 했던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서

미치도록, 최선을 다하는데

그럴수록 더욱 비참한 눈물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다음 편 계속>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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