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03:29.
# 소설 소개: 마흔 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또 03:29.
진경이의 뒤척임 때문인지, 하얀 캔디의 쩝쩝대는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인지.
또 잠을 깼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액정 속 화면 속에서 숫자 0329가 안녕? 나 잊었어? 라며 눈을 부수고 있다.
'이럴 줄 알았지. 그래도 어제 진경이 재운다고 9시쯤부터 눕긴 했으니까 6시간은 잔 셈인가.'
나는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 진경이의 다리를 쓰다듬는다.
'언제 이렇게 다리가 길어졌지. 작년 초만 해도 기저귀 차고 있었는데 말야.'
불과 1년 새에 기저귀를 훽 떼버리고, 아장아장의 걸음걸이가 우다다다 뜀박질이 된 내 아이.
혹시나 추울까, 혹시나 아플까, 그런 진경이의 다리를 애잔한 마음으로 쓰다듬는 내 손길.
다시 잠을 청해볼까 하지만 역시나 잠들지 못할 걸 안다. 나는 진경이와 남편의 이불을 덮어주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온다. 거실에 앉아 거실 창에 펼쳐진 휴양림 같은 나무 풍경을 본다. 밤하늘은 왜인지 어릴 때 배운 검은색이 아닌 붉은 하늘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거실창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 뒹굴고 있는 내 핸드백에 눈길이 머문다.
03:29.
그 숫자를 다시 마주했을 때, 나는 오늘 지하창고에서 발견한 그 원고를 떠올렸다. 주섬주섬 핸드백 속에서 누렇게 바랜 원고 더미를 꺼내 거실 식탁에 앉는다. 자고 있는 진경이가 깰 수 있으므로 핸드폰 후레시를 켠다. 원고를 다시 차근차근 탐닉하기 시작한다.
나는 전체 원고를 손에 받쳐 빠르게 넘겨본다. 원고 제출일은 20년 전. 그래서인지 색이 많이 바래있고, 중간중간 원고 속 검은색 글이 하얀 종이에 묻혀 사라진 부분이 스쳐간다. 제법 묵직한 게 요즘 유행하는 판형으로 300쪽 이상은 나올 분량이다. 조금 작게 하면 350쪽 정도 되려나. 원고를 손에 들면 원고 속 내용보다 어떻게 찍어낼까 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된다. 편집자의 삶은 그런 거다. 좋든 싫든.
'어디 보자~ 그래서 결말은...'
이것도 편집자의 직업병이다. 그래서 결말은 어떤 데를 먼저 찾는 손길과 눈. 그리고 잘 팔릴까를 염려하는 마음.
'바람직한 편집자는 아니지.'
그러면서도 나의 손길은 어느새 마지막 장을 펼쳐든다.
<다음 페이지>
'응? 다음 페이지?'
마지막 장에 결말 내용이 없고, 목차 제목만 큼지막하게 '다음 페이지'라고 쓰여있다.
'뭐지? 결말을 못 냈는데 어떻게 투고한 거지. 그냥 결말 없이 일단 원고를 보내본 건가? 희한하네..'
원고가 뚝 끊겨있다. 그래도 목차 제목이 남아있는 걸로 봐서는 뒷 이야기가 있을 거 같긴 한데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다.
내 손길이 다시 원고의 첫 장을 펼쳐든다. 0329 숫자와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니 지하창고 던전에서의 소름이 다시 느껴진다. 눈이 빠르게 원고 글을 듬성듬성 읽어 내려간다. 편집자의 직업특징, 속독. 문장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지 않아도 크게 듬성듬성 눈길을 던져도 문장의 힘, 구성의 완결성, 독자의 이탈지점 등 글의 흐름이 들어온다. 모르긴 몰라도 수백 편의 장편 원고와 수천 건의 기획안을 훑은 편집자에게 이 정도는 가능하다.
<꿈>
아까 <다음 페이지>와 같은 폰트와 굵기의 한 글자에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눈길이 멈춘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내가 만든 인물들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한다. 이거면 됐다. 그래서 OO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입학했고, 졸업했다. 등단엔 실패했다. 많은 동기들이 그랬듯. 나도 마찬가지였다. 등단하지 못한 작가. 그래도 글 쓰면 작가다. 애쓰지 않고 동기들을 위로했다. 물론 그 위로는 자존심 강한 내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했다. 등단할 때까지의 시간. 문예창작 석사과정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부 시절 석사과정 중에 있는 거들먹거리던 조교였던 선배가 생각났다. 그녀를 보며 대학원은 등단에 실패해 진짜 작가로 살지 못하는 패배자들이 왕놀이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등단한 성공한 작가는 대학원 따위 갈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럼에도 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망할 등단을 위한 시간.>
숨이 턱 막힌다.
대학교도, 문예창작과도,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 내심 대학원을 꿈꿨고, 문예창작 대학원의 선배들을 보며 느꼈던 감정까지. 정확히 과거 언젠가의 나와 일치하는 글.
내가 써 내려간 세상 속 글로 현실 세상의 누군가에게 닿아 작은 울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예창작과 출신들이 그렇듯, 그것은 꿈으로 남는 꿈이었을 뿐. 현실은 등단은커녕 출간은 꿈도 못 꾸는 글쟁이로 남아버렸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그렇게 꿈꾸고, 또 꿈꾸다, 결국 그 꿈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핑계로 출판사 편집자로 살아왔다. 딱 한번 과거 막내시절 운 좋게 팀 프로젝트에 섞여 들어가 신인 작가의 글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던 것으로 대리만족하며, 스스로는 등단에 실패한 글쟁이지만, 글에도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편집자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왔다.
지금 보면 운빨이었던 게 100% 맞지만, 베스트셀러를 만든 편집자라는 프라이드를 갖고 있던 나였기에 언젠가 기회만 된다면 나도 그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만 그 기회가 안 왔을 뿐이라고. 또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던 내게 기회가 왔다. 바로 육아휴직. 진경이를 낳고 육아휴직 중에 틈틈이 블로그에 당시 갓난쟁이 진경이를 모델로 하여 험난했던 신생아 육아 과정을 모티브로 한 글을 써서 올렸다. 남편은 그럴 시간에 제발 쉬라고 했지만, 글쟁이가 천직인지, 고된 육아의 날들을 기록하고 나면 그 고됨이 한결 가벼워지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블로그는 실패했다. 편집자로서 경력을 탄탄히 쌓아왔던 내 커리어는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내 글은 문제가 없다. 옛날의 영광인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냈던 그 글보다 못한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근데 왤까. 왜 사람들은 내가 쓴 글에 관심이 없을까. 나는 그 원인을 마케팅이라 판단했던 것 같다. 아무리 좋은 글을 써도 판매할 수 있는 루트가 확보되지 않으면 나의 소중한 독자들에게 내 훌륭한 글이 닿을 길이 없다. 명백하다 생각했고, 진경이에게 백일의 기적이 일어난 그날, 나는 나만의 작고 소중한 출판사를 만들었다.
출판사 이름이 작고 소중한 출판사였다. 이름 따위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내 글이 세상에 나갈 루트만 연결해 준다면, 그다음은 내 위대한 글이 알아서 세상을 밝혀줄 것이므로.
그리고 출판사 사업자를 내는 것 따위 이 업계에 몸담은 내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다음 내가 블로그에 켜켜이 기록했던 엄청난 양의 글을 모아 인디자인으로 교정 편집보고, 파주에 있는 소량 전문 인쇄소에 의뢰해서 마침내 바카라을 찍어냈다. 바카라 제목도 어마무시한 "유중진담" 분유 먹는 아이의 진지한 육아 이야기를 아이 시점에서 그려낸 희대의 창작물! 그리고는 교부문고, 일풍문고, 올라딘, 밀로의 서재 등등에 등록해서 마침내 독자들이 내 바카라에 닿을 수 있게끔 쫘악~ 전국의 서점에 깔았다. 그리고는 누워있는 내 바카라을 몰래 찾아 베스트셀러 귀퉁이 한켠에 몰래 놓고 인증샷을 찍는 발랄한 짓도 했다.
결과는, 거기까지.
내 바카라은 베스트셀러의 귀퉁이에도 버티지 못한 채,
쓸쓸하게 서가의 무덤에 꽂혀 사라져 버렸다.
글자만 봐도 뭔가 분홍분홍 낭만적인 한 글자인 "꿈"으로 남지 않기 위해 출산과 육아로 몸이 바스러진 상태에서 나름 열심히 열정을 불살라봤으나, 결국 다 타버리고 남은 잿빛의 두 글자 "핑계"로만 남게 된 내 꿈.
그렇게 복직하고, 당연히 내 실패를 망할 구 팀장과 회사 사람들에게 감춘 채로, 꾸역꾸역 현실만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쓴 소설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대학원은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다. 홀로 나를 키운 아빠에게 손을 벌릴 순 없었다. 5살에 엄마를 여의고, 도와줄 곳이 아무것도 없는 이 현실 속 나라는 등장인물에겐 이 세상은 대학원도, 등단도, 작가도, 꿈도.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옛 실패를 애써 눌러 담고 다시 원고에 집중하던 내 눈에 글자들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와서 박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다.
'혹시 내가 이런거 쓴적이 있었나?‘
당연히 이 물음이 떠올랐다. 5살에 세상을 떠난 엄마, 홀로 나를 키운 아빠. 대학교 학비도 힘들었던 내게 대학원은 말도 안 된다며 스스로 꿈을 반으로 딱 접어 덮어버렸던 날들.
'20년 전이면, 내가 스무 살이었으니까... 운 좋게 재수 안 하고 원하는 대학, 그렇게 원하던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동기들과 신나게 놀러 다녔을 내가 이런 걸 썼을 리는 없고... 설마 누가 내 이야기를? 아니지. 그러기엔 내 생각, 내 느낌이 너무 똑같은데. 문체도 좀 비슷.. 한가? '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마음속에서 나조차도 정리하지 못했던 꿈에 대한 핑계가 적혀있는 원고라니.
원고를 잡고 있던 손 끝이 미세하게 떨려온다. 글을 더 읽어 내려가면, 나도 몰랐던, 하지만 내 안에 분명히 있었던 어떤 것이 원고 속에서 나를 힐난하고 있을까 봐 마음이 요동친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