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 소설 소개: 마흔 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21:00.
진경이를 재우기 위해 안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패밀리침대에 누워 아이의 다리를 주물러주고, 등을 긁어준다. 자는 척하면서 아이의 등을 긁는 손은 계속 움직인다. 어서 잠들길. 잠들면 어서 거실로 나가 아까 저녁식사 시간 못다 한 대화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내가 양말 때문에 위기가 있었고, 새콤달콤에 폭발했다가, 온라인 게임 지하 던전에 갇혀...
'아 그러고 보니, 그 원고를 까맣게 잊고 있었네. 분명 세시 이십구분.. 그건.. 좀 이상했는데 말야..'
아까 잊었던 원고가 불현듯 생각난다. 진경이가 잠들면 볼 생각에 실눈으로 진경이가 자는지 확인한다. 말똥말똥이다. 말똥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저렇게 생생하게 잠들 생각 1도 없는 그런 눈빛을 가진 말똥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응, 자기는 좀 이상적 가족을 꿈꾸는 게 있지. 나야 괜찮지만.. 아, 아니. 그냥 자기가 힘들까 봐 그렇지. 난 괜찮아 정말!"
남편의 눈매를 쏙 빼닮은 진경이의 눈을 보니 저녁을 같이 먹던 남편이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착한 내 남편은 내가 오늘 얼마나 지쳐서 돌아왔는지, 수많은 눈물방울로 변해버린 물음표들을 대신 짊어줄 사람이다.
이사로 인해 온라인 게임까지 출퇴근이 4시간이나 걸리고, 전철과 버스를 3번 갈아타야 하고, 나와 진경이와 꼭 같이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6시 땡 치자마자 두 시간 걸릴 거리를 한 시간 50분 만에 오기 위해 달려오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강아지 고양이의 작고 큰 대소사를 변기 속에 치우고 바닥을 닦고, 밥을 같이 차리고, 왜인지 아직도 서툴게 진경이 밥을 먹이다 나한테 잔소리 먹고 KO 되고, 설거지하고, 때로는 같이 손 잡고 저녁 산바카라을 나가고, 늦은 시간에도 집 앞 도서관에도 같이 가주고.
월급이 적은 나를 대신해 우리 집 가정 경제를 보완해 주고, 연애할 때 백화점 아니면 화장실 이용을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중고거래 당근과 다이소만 생각하고. 착하고, 안쓰럽고, 고맙고, 미안한 내 남편.
돈 앞에, 육아 앞에, 온라인 게임 앞에,
다 내가 선택한 현실 앞에,
내가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져서 무너져내리다
옆을 보니 있던
나보다 더 불쌍해 보이는 내 남편.
"응, 자기는 좀 이상적 가족을 꿈꾸는 게 있지."
이상적 가족.
인정한다. 맞다. 나는 가족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하는 게 있다.
그래서 저녁식사는 꼭 같이 먹는다, 스튜디오에 가서 가족사진을 남긴다. 1년에 1번은 가족이 같이 해외여행을 간다. 진경이가 좀 크면 가족이 같이 하는 운동 취미를 만들어 같이 한다. 또 같은 바카라을 3권 사서 나른한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나란히 앉아 읽는다, 등등.
아, 중요한 거 한 가지 더.
남은 가족들이 슬프지 않게 절대로 건강을 지킨다.
먼저 죽지 않는다.
엄마처럼 그렇게 황망하게 가지 않는다.
그래서 남은 가족을 슬프게 하지 않는다.
"응, 자기는 좀 이상적 가족을 꿈꾸는 게 있지."
맞다. 나는 좀 힘들어도 이상적 가족을 꿈꾼다. 그래야 남은 가족이 슬프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없는 엄마, 절대로 그 황망함을 진경이에게 남겨주고 싶지 않다.
진경이의 등을 긁던 손의 속도를 늦춘다.
"거기 말구 여기도."
옆은 수면등만 켜있는 캄캄한 방안임에도 아이는 귀신같이 알아챈다. 손이 뻐근하다.
내 손이 빠져도, 아이에게 황망함을 줄 순 없다. 그게 엄마의 역할 아닌가.
나는 느껴보지 못한 엄마의 역할.
아니, 내 무의식 속에 엄마의 역할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5살 때 엄마는 돌아가셨으니까.
딱 진경이 나이다.
내 마흔이 힘든 건, 어쩌면 엄마의 그때와 같은 때가 되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5살을 지나는 딸의 엄마의 모습이 어떤지, 그 역할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지 상상이 안되고, 잘 모르겠다.
그전까지는 너무도 오랜 세월이라 없는 엄마의 부재를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정확히 진경이가 5살을 시작하던 그날, 없는 엄마의 존재가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가족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들에 집착하며 그 괴롭힘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없는 엄마가 내게 남기고 간 황망함의 상처들은
내가 지키고자 하는 이상적 가족의 모습들로 지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올해는.. 해외는 못 가겠네..'
세월이 빠르다. 올해는 이사를 했더니, 통장 저수지가 정말 바닥이다. 마이너스가 안나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결혼하고 매년 해외여행은 꼭 갔는데.
엄마가 내게 해주지 못했던 가족의 행복을 매년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못한다. 돈이 없다. 집 대출금을 줄이려고 아등바등 이 집으로 왔는데, 금리가 두 배라고 내는 돈이 같다니. 남편과 나, 진경이 단 세 식구인 우리 가족의 노력이 비웃음 당하는 것 같다. 아무리 아등바등 뛰어도, 결국 그 손바닥에서 놀게 되는 꼴 같다.
진경이를 어서 재우고 나가서 남편에게 이런 내 속마음을 얘기해야 하는데,
없는 엄마의 부재를 감춰달라고, 내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이라고 다독여달라고,
이상적 가족을 그리는 게 잘못은 아니라고 해달라고.
최선을 다한 내가 그정도면 잘한거라고.
착하고 불쌍한 내 남편에게
그냥 나 좀 안아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새근새근 잠든 아이의 숨소리를 기대하던 나는
몸을 숙여 아이의 등에 가만히 귀를 댄다.
아이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괜찮다는 듯
오늘도 그정도면 좋은 엄마였다고
날 다독이는 듯 하다.
결국 오늘도 아이보다 내가 먼저 잠들겠지.
깨지않고 잠이라도 깊게 잘 수 있길…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