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되다 고되
# 소설 소개: 마흔 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하- 굴러먹는 인생- 고되다 고되.'
당장이라도 갈가리 찢어서 파쇄기에 갈아버리고 싶은 형형색색의 유튜버 원고를 바카라상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다.
"고생했어. 그래도 잘하던데? 자기 들어가고 작가 큰 소리 내던 거 싹 없어지더라. 그리고 금방 가버리고. 나중에 나도 비법 좀 알려줘~"
마 과장이 위로랍시고 말을 건넨다. 방금 전 유튜버가 던진 편집자에 대한 모욕을 뒤집어쓰면 마 과장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 뭐. 허니자몽티 타줬더니 먹고 가대요."
옛다 비법. 물론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월급 확인해 봤어? 이번 달에 수당 나오는 달인 거 까먹고 있었는데 더 들어오니까 기분 좋더라.~ 역시 못 죽어도 대궐집 노비가 나. 내 전 온라인 게임은 수당이 뭐야~ 거기 부장이 어땠는지 알아?"
"아! 맞아! 오늘 월급날이죠 맞아.."
또 남험담을 시작하려는 마 과장의 입을 막기 위해 일부러 큰 목소리 말하며 손으로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은행 어플을 켠다. 마 과장의 말대로 1년에 2번 수당이 나오는 달이어서 저번달보다는 많이 들어왔다. 그래도... 그래서 뭐.
'이 월급 받고 이렇게 일하는 게 맞나.'
월급을 받고, 어플을 통해 숫자를 확인하면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이다.
내 월급은 회사 내 다른 직급보다 낮다. 얼마나 낮은지 정확지는 않지만, 100만 원가량 낮지 않을까 싶다.
내가 선택한 결과이므로, 받아들여야 하고, 이제 꽤나 익숙해질 법한 숫자인데도 여전히 월급날이면 기분이 좋지 않다.
"복직하실 거예요?"
이 회사 최초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2년이나 쓴 나에게
복직을 위한 면담을 하던 날 회사는 당연하다는 듯 날 정리하려 했다.
최초라는 수식어답게 이유는 꽤나 단순했다.
편집자가 아닌 어느 아이 엄마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
"선례를 남길 수 없다."
빌어먹을 놈에 선례.
대체 무슨 선례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 90일도 주고, 거기에 2년이나 더 육아수당 받게 해 줬으면 회사에서 해줄 만큼 해준 거 아니냐, 그 이상 해주면 안 그래도 여초초초 집단인 이 회사에서, 더 나아가 이 업계에서 이 빌어먹을 놈에 선례를 아이 엄마들이 요구하게 될 거라는 그런 거.
2년이라는 육아 시간은 아이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커졌지만, 그에 비례하여 나 자신에 대한 상실감과 우울감을 남겨놓았다. 그런 상태인 나였기에, 마침 회사 근처 어린이집에 진경이를 보낼 수 있게 당첨되었고, (왜 당첨이란 표현을 쓰는지는 나중에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리고 편집자로서의 내 커리어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편집자가 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진짜 꿈과 조금이라도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 업이 편집자라 생각했고, 출판사였다. 꿈같은 소리 같긴 하지만.
"특이하시네요. 그럼 경력을 다 인정해 드릴 순 없고, 이 정도 연봉선 괜찮으시면 근로계약 체결하시죠. 앞으로 연봉상승도 거기 적혀있는 그 정도 수준일 거예요. 뭐, 특별한 성과가 없으면 말이죠."
인사팀 직원들은 왜 다 저렇게 기계처럼 이야기할까.
사람의 마음을 담은 바카라을 만든다는 회사 정신에 전혀 맞지 않는 팀.
당시에 인사팀 직원의 태도도 맘에 안 들었고, 아이 육아에 24시간, 30일, 12달 치어서 살 수는 없다는 생존의 마음으로 근로계약서에 아주 더러운 필체로 서명을 했다.
'이 월급 받고 이렇게 일하는 게 맞나.'
그 결과가 이거다.
복직하고 이미 수개월 째 마주하고 있는 숫자인데도 날 속상하게 만든다.
팀장이랑도 싸우고, 유튜버랑도 싸우고, AI랑도 싸우고. 원고랑도 싸우고, 회사랑도 싸우고.
내 하루의 대가가 이거라니. 내 한 달의 대가가 이거뿐이라니.
'거기다 진경이랑도 싸우고...'
월급날이 되면 꼭 이런 슬픔이 내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하루 종일 새어 나온다.
'후. 다행이다. 그래도 카드값 간당간당 막았네..'
새어 나오는 건 새어 나오는 거고,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은행어플에 밀린 카드값을 상환한다.
지난달에도 간신히 막았다. 그 이후로 신용카드는 쓰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내 못생긴 신용카드는 늘 내 예상과 다른 숫자를 먹고 산다. 요망한 것.
폭팡에 담아둔 생필품을 하나하나 결제해서 주문하고, 이번 주 먹을 반찬, 남편이 먹고 싶다고 며칠 째 징징대는 짜파게티, 진경이가 칭찬스티커 열개 모아서 사주기로 했지만 5일이나 못 사줬던 우주 초콜릿까지.
무슨 발가락 크기만 한 초콜릿 10개에 5만 원이냐. 칭찬스티커 100개 모았다가는 파산이다 파산.
고물가 시대다.
어릴 때부터 40년 동안 살아왔건만, 요 근래 몇 년 동안의 물가 상승은 정말 끔찍하다.
어릴 적 1,200원에 샀던 오예스 한 상자가 5,000원이 넘는다. 거의 4배 오른 건가?
단순 계산으로 월급 숫자는 근데 왜 4배 안 올랐을까. 아니, 4배는커녕 2배는 올라줘야 이 물가에 맞춰 살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루하루 온갖 것들과 싸우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월급날 통장 숫자가 왜 이 모양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월급 보내유~ 이번 한 달도 고생 많았어. 토닥토닥>
빠르게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은행 어플 계좌 위로 남편의 카톡 메시지 알림이 뜬다.
쏘 스윗한 메시지와 비어 가는 계좌 숫자가 서로를 곁눈질하며 비웃는 듯하다.
남편의 월급이 입금된 계좌에서 166만 원을 입력해 집 대출 상환 계좌로 보낸다.
보내기가 무섭게 166만 원 숫자가 0으로 변하는 마법이 펼쳐진다.
그저, 작은 보금자리 하나 마련한 것뿐인데, 166만 원이라는 큰돈을 홀랑 가져가버리다니.
아이러니다.
두 달 전쯤 이사를 했다.
신혼집으로 살던 34평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나와
산속에 자리한 30년 된 구축 23평 아파트로 매매 이사를 했다.
구축이어도 인테리어가 되어있어서 실내는 꽤 깨끗한 편이었고,
남편과 내 성향에 아주 잘 맞는 산속 숲세권 아파트라 마음에 들었다.
웃긴 건 기존 신축 살 때보다 대출금액이 50% 정도 줄었는데도,
망할 금리가 2배 차이가 나서 매달 상환액 166만 원은 같게 되었다는 것.
웃긴 일이다.
신축에서 30년 구축으로, 34평에서 23평으로.
더 낡았고, 더 좁은데
매달 지불해야 하는 금액은 같다니.
분명 이사한 곳은 더 행복한 곳이건만,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넓고 깊은 저수지"
은행 어플 스크롤을 내리고 내리니, 바닥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던 계좌가 눈에 들어온다.
생활비, 대출상환금, 남편 용돈, 내 용돈을 빼고 나머지 돈을 모으려고 만들어둔 계좌.
너무 깊어 텅 비어버린 저수지 계좌. 언제쯤 이 저수지에는 물이 가득 넘쳐흐르게 될지.
30대 때는 남편과 열심히 온라인 게임 생활하면, 이 저수지가 정말 풍성해질 줄 알았다.
사치스럽게 사는 것도 아닌데도, 왜 이놈에 저수지는 매일 텅 비어있는 건지.
가만히 숨 쉬고 살기만 하는데도 저수지는 왜 이렇게 바짝 말라가는 건지.
씁쓸한 현실이다.
핸드폰으로 착착착 주문을 하면서 머릿속에서는 또 뭐 결제해야 되는 거 없는지, 집에 뭐 사야 할 거 없는지를 생각한다.
'이제 계절 바뀌니 진경이 어린이집 보낼 옷을 몇 개 사야 하는데..'
그러다 스크롤을 갑자기 멈춘다.
사고 싶었던 내 옷.
몇 달 전부터 사고 싶었으나 늘 밀리고 밀렸던 옷에서 손길이 멈춘다.
[재입고예정]
'제엔장. 다 팔렸나 보네. 쳇. 나도 살 생각 없었어. 너무 매정하네. 어차피 이제 계절 바뀌어서 사지도 않을 거였는데.'
월급날은 늘 이런 식이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