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양말

이 빨강 양말 시러-

by빨양c

# 소설 소개: 마흔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진경아 아침이네, 엄마 먼저 씻을까~ 진경이 먼저 씻을래?"


가로 대짜로 팔다리 쭉 펴고 잠들어있는 진경이 이마를 쓰다듬으며 물음을 던진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가만히 정적이 흐른다.

가만히 아이의 얼굴에 따뜻한 눈길을 건넨다.


잘 때가 제일 예쁘다.


"진경아, 엄마 먼저 씻고 올께. 좀 더 잘래?"


두 번째 물음이 아이에게 닿건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알았어. 그럼 엄마 먼저 씻을게. 대신 엄마 씻고 너 씻는 거야~ 알았지?"


5살 아이에게 세 번째 물음 따위에 해줄 대답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나는 세 번째 물음을 서둘러 스스로 답 내리고 화장실로 향한다.


거울 앞에 선 뿌연 얼굴이 나를 쳐다본다.

새벽에 깨서 그런가, 꽤나 뿌옇게 부은 얼굴이다.

10대 때의 발랄함과 20대 때의 꽃 같던 화사함, 30대의 모험심 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희뿌옇다, 네 글자로 표현되고 마는 내 얼굴.


마흔인가.

약간의 우울감과 깊은 무기력이 깔려있는 얼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봐야 할지 답도 안 나오는 얼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렇게라도 하면 지워지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샤워헤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로 얼굴을 씻어낸다.

몸과 얼굴은 샤워를 하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샤워 후 해야 할 것들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진경이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주말 동안 삶아둔 아침으로 먹을 감자를 밥솥에 넣어 데피고,

데워지는 동안 머리카락 말리고,

진경이 일어나라고 또 소리치고,

소리치면서 강아지 고양이 배변패드 갈고,

회사에 가져갈 드립으로 내려놓은 커피를 텀블러에 넣고,

다시 지금 안 일어나면 늦는다고 진경이한테 소리치고,

어제 챙겨놓을걸 매일 아침 후회하는 진경이 어린이집 낮잠 후 갈아입을 옷 챙기고,

아, 내 옷은 뭐 입지... 오늘 좀 쌀쌀한 거 같은데.


딱.


샤워기에 시원했던 소음이 멈춘다.

샤워기 소리가 멈추자 화장실엔 정적이 감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항상 정적만이 흐른다.


그 말은 내가 움직이면 늘 소란스럽다는 말과 같다.


"한진경~ 엄마 이제 다 씻었다. 아까 엄마 다 씻으면 씻기로 약속했지? 이제 일어나서 씻으러 와~"


역시 아이는 미동도 없다. 그런 약속 한 적 없다는 듯이.

아, 물론 아이는 약속한 적 없다. 그저 내가 세 번의 물음으로 남긴 일방 통보의 약속이었을 뿐.


주방 LED 시계가 07:30을 가리킨다.

07:25이다. 시계를 5분 빠르게 가게 해두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내 예상보다 똑똑한 내 머리는 5분 더 시간이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계산해 낸다.


젖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감싸 올리고 냉장고에서 감자를 꺼낸다.

퍼석.

망할.

감자가 반으로 짜개지며 그대로 바닥으로 직행한다.

멍멍. 야옹.

강아지와 고양이가 신나게 달려온다.


"안돼!"

강아지와 고양이에게 소리치며 서둘러 바닥 감자를 향해 손을 뻗는다.

머리 위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젖은 머리카락이 촤르륵 펼쳐진다.

삶은 감자는 왜 이렇게 안 집어질까?

이놈에 감자는 강하게 집으려고 하면 할수록 가루가 돼버린다.

나도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다. 할 것도 많은데.


서둘러 큰 덩어리만 집어 싱크대에 던져놓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건을 집어 대충 몸을 다시 닦는다.


"한진경!! 50자 되면 나가야 되는 거 알지? 벌써 30자야!"

LED 시계 07:50자가 되면 저 현관문을 나서 차를 타야 한다.

물론 09:00 출근보다 20분 정도 먼저 도착하지만,

출근길 도로라는 것은 워낙에 괴물 같아서 작은 변수라도 생기면 내 차를 집어삼켜 못 가게 한다.

지각 괴물.

그것은 나 같은 일개 회사를 다니는 일개 편집자에겐 치명적인 괴물이라 50 숫자를 지킬 수밖에 없다.


윙-

헤어드라이기를 켜 머리를 말린다.

강아지 고양이는 감자가루가 맛있는지 신나게 핥아먹는다.

당뇨가 있는 내 고양이는 저걸 먹으면 안 될 텐데.

"빌리! 너 먹으면 안 돼!"

제법 근엄한 목소리로 고양이를 향해 소리쳐보지만

고양이답게 거만한 눈빛만 올려 보낼 뿐 혀를 날름거린다.


딱.

헤어드라이기를 끈다. 당연히 내 긴 머리가 말랐을 리가 없다. 하지만 시간은 더 없다.

내 몸은 머리가 생각을 끝내지도 않았건만 어느새 움직인다.


딸깍.

진경이가 잠들어있는 새벽이 묻은 방에 불을 켠다.


"이제 일어나. 엄마 할 거 다 했어. 이제 너 씻을 차례야."

물론 다 했을 리가 없다.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면서도 손은 재빠르게 강아지 고양이의 배변 패드를 치운다.

맨손으로 노란 배설물이 묻은 패드를 모아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집어넣고 뚜껑을 닫는다.

예전에는 손이 더러워질까 봐 일회용 비닐장갑을 꼈었는데,

지금은 그런 여유가 없다. 그걸 잘 아는지 내 손도 재빠르게 움직인다.


남편이 주말 동안 내려 준 드립커피 원액이 담긴 노란 주전자를 냉장고에서 꺼내 텀블러에 조금 닿는다.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담는다. 새벽에 깼으니 커피가 더 필요할 거다. 당연한 거다.

커피를 많이 먹으면 몸이 힘들겠지. 몸은 힘든데 잠은 안 오는 그런 고통을 격...

겪는다고들 하는데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것 같다.

아이를 재우면서 내가 먼저 곯아떨어지는 걸 보면.

아니면 새벽에 깨는 게 혹시 커피 때문인가?

모르겠다. 다들 이렇게 살지 않나.

피곤하고, 커피에 의지하고, 잠자려 애쓰고, 그러다 뜬 눈으로 출근 준비 하고.

나처럼.


딱.

텀블러 뚜껑을 닫는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


"한진경!!!!!!!!!!!!!!"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만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고양이의 눈빛.


"약속 안 지켜?? 엄마 씻고 나면 씻기로 했잖아!! 다섯 셀 거야 일어나. 니가 한 행동은 니가 바카라임지는 거야. 알지? 자 센다!! 하나. 둘."


또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늘 나는 아이한테 화를 낸다.

내가 있는 곳엔 언젠가부터 늘 소음이 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면 정적만 흐르는데,

꼭 내가 있는 곳엔 화로 가득 찬 소음이 생긴다.

내가 문제인 건가, 싶은 생각이 스쳐간다.


"셋!!! 넷!!!!!!!"


애착이불을 손에 쥔 진경이가 주섬주섬 일어나 화장실 앞에 선다.

다섯이 되기 전에 왔으니 다행인 건가.

아니, 나 출근해야 한다고 새벽 07:35 시계에 애 깨우는 나쁜 엄마인 건가.


눈도 못 뜬 채 화장실 앞에 서있는 진경이의 겨드랑이에 내 양손을 넣어 들어 올려 변기 위에 앉힌다.


"쉬하고, 양치하자."


변기에 앉는 것도, 치약을 짜 칫솔에 묻혀 양치를 하는 것도,

이제 스스로 하게 시켜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바쁜 내 손은 먼저 나서서 척척 해치워버린다.

아이를 위해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위해서 그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속상해진다.

하지만 그런 속상한 마음도 07:38을 쏘아대는 시계에 녹아 사라져 버린다.


등에 오돌토돌 피부가 일어나 있다. 땀띠인가? 알레르기인가? 두드러기인가? 어젯밤 뭘 먹였지?

아니면 이번에 바꾼 바디워시 때문인가?

나 때문인가.

결국 왜 나 때문인가로 질문이 귀결될까.


어쩌지?

회사에 말하고 피부과 데려가야 하나? 주변에 전문의 있는 피부과가 있나?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 회사 팀장이 뭐라 할 텐데.


"진경아 등 아파?"

"아니."

"간지럽거나 따갑고 그래?"

"따갑고가 뭐야?"

바쁜 마음에 설명할 여유가 없는 나는 다시 묻는다.


"아파?"

"아니. 안 아프다고."


일단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생각하기로 한다. 아이가 안 아프다고 했으니.

일단 그렇게 하자. 나는 바쁜 서툰 마음을 애써 누르고 서둘러 아이의 샤워를 마친다.


날이 좀 쌀쌀한 거 같은데 세탁해 둔 긴 팔이 없다.

괜찮을까. 반팔은 쌀쌀할 거 같은데. 어린이집 에어컨 요즘 트나?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엄마인 거 같다.


미끌.

뭐지?

아니, 나는 이미 뭔지 안다.

강아지 고양이 중 누군가의 쉬.

배변패드를 갈아주면 뭐 하나.

이렇게 아무 데나 싸대는데.


화낼 시간도 없다. 서둘러 대충 발을 닦고,

아이 옷을 입히고 식탁에 앉혀 뎊힌 감자와 치즈, 샤인머스캣 세 알을 가위로 잘라

은색 급식판 칸에 넣어둔다.


"엄마 옷 입고 올 테니까, 먹고 있어. 알았지? 착한 아이는 스스로 먹는 거. 알지?"

"응."

잠이 덜 깬 건지, 불만이 있는 건지 짧은 대답만 남긴다.

입에 감자와 치즈조각을 넣어두고 서둘러 방으로 향해 옷을 입는다.



"고양이 식탁에 올라오면 엄마 불러. 알았지?"

소리는 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눈에 보이는 옷 아무거나 손을 뻗어 입는다. 뭘 입고 있는 건지 조차 모르겠다.

양말은 왜 이렇게 헤졌지. 양말 좀 사야 하는데.

생각은 흐르는데 대충 아무 양말에 발을 욱여넣는다.

발이 불편하다고, 눈도 보기 불편하다고 발버둥 치는 거 같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서둘러 아이가 있는 식탁으로 향한다.


07:50.

식판은 그대로다.

왜 떠먹여 주지 않으면 아이는 먹으려 하지 않을까.

분명 배가 고플 텐데 아이는 왜 스스로 먹지 않는 걸까.


시간이 없으니 다시 아이 입에 감자와 샤인머스켓을 욱여넣는다.


물을 먹이고 신발을 신으러 아이 손을 잡아 끈다.


"나 빨간 양말 시러."


"뭐?"


"이 양말 싫다고."



<다음 편 계속>

월요일 연재
이전 01화1. 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