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나로 쓴다

사재기의 시대, 문장은 어떻게 자존을 증명하는가

by박 스테파노
- 순위 뒤에 숨은 판매량의 거짓말
- 기계의 문장은 누구의 것인가
- 말 한마디 뒤에 숨은 존재의 무게
- 끝내 나로 남는 법에 대하여


170만 부. 이 숫자 앞에서 사람들은 걸음을 멈췄다. 『언어의 온도』(이기주, 말글터, 2016)는 그렇게 한 시대의 위로가 되었다. 지하철에서 엿들은 말들을 그러모아 온기를 재던 손, 낯선 이의 슬픔을 짚어주던 문장들. 그 손이 2024년 3월부터 7월까지, 넉 달 동안 전국의 서점을 돌았다. 신간 『보편의 단어』(이기주, 말글터, 2024)의 순위를 밀어 올리기 위해서였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저자는 과거 자신의 바카라을 냈던 출판사 대표와 손잡고 1,600여 권을 사들였다. 서점 직원의 교대 시간을 노렸다. 파본을 사는 척 포장을 훼손했다. 결제 내역이 합산되지 않도록 비회원으로 결제했다. 위로를 팔던 사람이, 위로를 조작했다. 이 사건은 2026년 9월에야 세상에 알려졌고, 두 사람은 재판에 넘겨졌다.


소식이 퍼지자 그는 자신의 유튜브 영상을 모두 지웠다. 문장은 남고, 흔적은 지워졌다. 이 사건을 한 작가의 일탈로 읽고 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재기라는 단어는 오래전부터 있었고, 스타 작가라는 이름도 새삼스럽지 않다. 낯선 것은 오히려 그 사이의 간극이다. 위로의 언어를 가장 능숙하게 다루던 손이, 정작 자신의 위치 앞에서는 가장 서툴렀다는 간극. 질문 하나는 끝내 남는다. 쓴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증명하는 일인가.




지표가 삼킨 문장 — 굿하트의 법칙과 순위의 배신


측정하는 순간, 측정 대상은 변질된다. 경제학자 굿하트(Charles Goodhart)는 일찍이 말했다. 지표가 목표가 되는 순간, 그 지표는 더 이상 좋은 지표이기를 멈춘다고. 베스트셀러 순위는 원래 독자의 선택을 사후적으로 집계한 결과였다. 순위가 매대의 위치를 정하고, 매대의 위치가 다시 판매를 부르면서, 결과였던 것이 원인으로 뒤바뀌었다. 원인이 된 지표는 더 이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조작의 표적이다. 이기주 사건은 이 뒤바뀜이 실현된 사례일 뿐이다. 『보편의 단어』는 출간 반년 만에 교보문고 상반기 판매량 12위에 올랐다. 그 12위 뒤에 사재기가 있었다. 화려한 성적표와 초라한 진실 사이의 거리, 그 거리가 이 사건의 본질이다.


한국 출판계에서 이 병은 낯설지 않다. 2013년에도 유명 소설가들의 신간을 대량으로 사들인 출판사 대표들이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출판문화산업 진흥법이 개정되었다. 처벌 조항은 강화되었지만, 순위 진입 초기의 착시를 노리는 유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법은 행위를 뒤쫓고, 욕망은 늘 그보다 한 걸음 앞서 있다.


semi-flat-editorial-vector-illustration--screen-pr (1).png▲ 결과였던 순위가 원인이 되는 순간, 조작은 필연이 된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이 병은 출판만의 것도 아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조직적 대량 구매가 의심되는 도서 옆에 칼표(†)를 붙인다. 순위 자체를 의심하라는 경고다. 음원 차트에서는 새벽의 매크로가, 영화관에서는 관객 없는 심야 상영의 유령 좌석이, 미술 경매에서는 자기 작품을 자기가 낙찰받는 자전거래가 같은 문법을 반복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질병은 하나다. 지표가 평가를 대신하는 순간, 평가는 사라지고 지표만 남는다. 남는 것은 숫자이고, 사라지는 것은 안목이다. 언어의 온도를 재던 저울이, 실은 저울눈금을 조작하는 손 안에 있었다. 보편에 이르는 언어를 말하던 바카라이, 가장 사적인 방식으로 숫자를 사들였다. 이보다 더 정확한 배신이 있을까.


굿하트의 법칙은 경제학의 언어이지만, 이 사건 앞에서는 차라리 윤리학의 언어에 가깝다. 지표를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무엇인가를 포기한 것이다. 스스로 읽고 판단할 권리, 그 권리를 순위표에 넘겨준 대가로 우리는 편리를 얻었다. 그러나 그 편리의 청구서는 언젠가 이런 식으로 되돌아온다.




독자 없는 독서 — 동조와 척박한 안목


순위가 힘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 독자가 순위를 믿기 때문이다. 스스로 고르기보다 남들이 고른 것을 따라 고르는 마음. 이 마음이 시장을 지탱한다. 서점 입구의 매대는 이제 안내판이 아니라 신탁이다. 사람들은 신탁 앞에서 자신의 취향을 접는다. 무엇을 읽을까, 라는 질문 대신 무엇이 잘 팔리는가, 라는 질문이 먼저 온다. 텍스트의 밀도보다 판매 부수가 먼저 소비되는 구조. 그 구조 안에서 사재기는 범죄이기 이전에 하나의 전략이다. 가장 값싸게 신뢰를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동조는 습관이 되면 자리를 옮긴다. 판단을 밖에 맡기는 버릇은 독서에서 멈추지 않는다. 문장을 쓸 때도,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침묵보다 기계의 유창함에 먼저 기댄다. 무엇을 느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기 전에 무엇이라고 쓰면 좋은가, 라고 기계에게 먼저 묻는다.


semi-flat-editorial-vector-illustration--screen-pr (2).png▲ 서점 입구의 매대는 이제 안내판이 아니라 신탁이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최근 몇 년 사이 퇴사일기와 여행기와 연애담을 쓰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읽는 시대' 뒤에 '쓰는 시대'가 왔다는 말도 들린다. 반가운 조짐이다. 글쓰기는 본디 사적인 고백에서 시작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글의 상당수는 인간이 열고 기계가 닫는다. 주제를 던지면 기계가 구조를 잡아주고, 흐름을 다듬어주고, 겪어본 적 없는 이별조차 정제된 언어로 요약해준다. 인간은 그 문장을 조금 고쳐, 자신의 경험이라 이름 붙인다. 효율은 늘었고, 문턱은 낮아졌다. 그러나 낮아진 문턱 너머에서, 정작 낮아진 것은 무엇이었나.


순위표에 자리를 내준 안목이, 이번에는 알고리즘에 자리를 내준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위탁의 습관은 그대로다. 사진에는 워터마크가 있고 음원에는 메타 정보가 새겨진다. 그러나 문장은 픽셀이 아니다. 어디까지가 나의 말이고 어디부터가 기계의 말인지, 그 경계를 기술은 아직 그어주지 못한다. 글쓰기 모임에 나가 서로의 문장을 읽어주던 저녁들, 그 저녁의 온기까지 기계가 대신해줄 수는 없다. 다만 그 저녁이 끝난 뒤 홀로 남는 바카라상 앞에서, 얼마나 많은 문장이 이미 기계의 손을 거쳐 왔는지는 아무도 세지 않는다.




저자 없는 서명 — 레비나스와 기계의 문장


2024년, 일본 작가 구단 리에(九段理江)는 『도쿄도 동정탑』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밝혔다. 소설 속 대화의 약 5퍼센트를 챗GPT가 쓴 문장 그대로 가져왔다고. 심사위원들은 놀랐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듬해 그는 정반대의 실험을 내놓았다. 95퍼센트를 AI에 맡긴 소설이었다. 어디까지가 저자이고 어디부터가 도구인지, 그 경계는 갈수록 흐려졌다.


미국 저작권청은 2023년 3월 가이드라인에서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인공지능이 단독으로 생성한 결과물은 저작권의 보호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 저작권은 인간 저작(human authorship)을 전제한다는 것.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행위만으로는 인간의 창작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판단도 함께 나왔다. 법이 여기서 지키려 한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서명이다.


서명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말한다. 말한다는 것은 타자를 향해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이며, 그 노출은 곧 바카라임(責任, responsibility)이라고.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 얼굴 앞에서 도망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문장은 발화자의 몸을 통과해야 흔적이 된다. 흔적이 있어야 비로소 바카라임을 물을 수 있다. AI가 쓴 문장은 유려할 수 있다. 정확하고, 매끄럽고, 때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문장은 누구의 밤도 통과하지 않았다. 체험하지 않은 슬픔을 정제하고, 앓지 않은 불면을 요약할 뿐이다. 정교하게 조립된 침묵의 모조품, 그것이 기계가 줄 수 있는 최대치다.


semi-flat-editorial-vector-illustration--screen-pr (3).png▲ 마주함이 빠진 자리에, 결과만 남는다. 서명이 빠진 자리에, 상품만 남는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사재기된 문장과 기계가 쓴 문장은, 얼핏 무관해 보이지만 실은 한 뿌리에서 갈라진 두 가지다. 하나는 자본이 대신 증명한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가 대신 체험한 문장이다. 둘 다 저자의 몸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같다. 순위를 산 손과 침묵을 위탁한 손은, 결국 같은 손이다. 레비나스가 얼굴이라 부른 그 마주함, 도망칠 수 없는 대면의 순간이 두 경우 모두에서 지워졌다. 이기주는 독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대신 순위표의 숫자를 마주했다. 기계에 문장을 맡긴 이들은 자신의 침묵을 마주하는 대신 완성된 문장을 받아 들었다. 마주함이 빠진 자리에, 결과만 남는다. 서명이 빠진 자리에, 상품만 남는다.




끝내, 나로 쓴다는 것


법정은 이기주 작가의 사재기에 바카라임을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 판결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순위 제도를 손보고 유통 구조를 개혁해도, 위탁하려는 마음까지 고칠 수는 없다. 그 마음은 제도 바깥, 한 사람의 바카라상 앞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쓴다는 것은 결국 그 바카라상 앞에 혼자 앉는 일이다. 아무도 대신 겪어주지 않는 밤과, 아무도 대신 앓아주지 않는 문장을 마주하는 일이다.


사재기는 순위를 대신했다. AI는 체험을 대신했다. 방법은 달랐지만 방향은 같았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바깥으로 밀어낸 것이다. 그러나 끝내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자신의 문장 앞에서 자신이 정직했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쓰는 사람 자신뿐이다. 언어의 온도를 말하기는 쉽다. 그 온도를 실제로 견디는 일은 다르다.


semi-flat-editorial-vector-illustration--screen-pr (4).png▲ 아무도 대신 답해줄 수 없는 물음 앞에, 매번 다시 앉는 일.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결국 남는 것은 잘 팔리는 문장도, 매끄럽게 다듬어진 문장도 아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끝까지 감당한 문장, 그것 하나뿐이다. 문장은 짧아도 좋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것이 나의 몸을, 나의 밤을, 나의 침묵을 통과했는가. 그 물음 앞에서만은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누구도 대신 답해줄 수 없는 이 하나의 물음, 그 앞에 매번 다시 서는 일이야말로 쓰는 자의 유일한 자존이다. 그러니 이렇게 쓴다. 나는 쓴다. 끝내, 나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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