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생각하는 '최적'과 '최선'의 그 어딘가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무엇의 기원인가
-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가 지운 것
- 아껴둔 시간이 앗아간 삶의 온기
- 적당함은 계산이 아니라 태도다
추석이 오면 사람들은 같은 말을 되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절제를 노래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뿌리를 캐어보면 사정이 다르다. 한가위는 신라 유리왕 때의 길쌈 놀이인 가배(嘉俳)에서 왔고, 가위는 가운데를 뜻한다. 크다는 뜻의 '한'이 앞에 붙어 한가위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속담은 적당함을 구하는 말이 아니었다. 결핍 없는 충만을 구하는 말이었다. 더도 덜도 없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한가위처럼 풍성하기를 바란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최적화 속에 산다. 다만 이름이 달라졌을 뿐이다. 기상 시간과 수면 시간을 앱에 기록하고, 하루의 동선을 알고리즘에 맡기고, 갓생이라는 말로 촘촘한 루틴을 자랑한다. 최적화는 더 이상 공장의 언어가 아니다. 삶 전체를 설계하는 문법이 되었다. 그런데 묻고 싶다. 잘 최적화된 하루가 잘 산 하루와 같은가. 그것은 목적을 묻지 않는다.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산출을 내라고 명령할 뿐이다. 그 명령 앞에서 삶은 관리해야 할 지표로 쪼그라든다. 무엇을 위해 최적화하는가. 이 질문을 잃어버린 최적화는 방향 없는 질주에 가깝다.
여기서 하나의 균열이 생긴다. 우리는 흔히 최적(最適)과 최선(最善)과 적당(適當)과 중용(中庸)을 같은 자리에 놓고 쓴다. 그러나 이 넷은 서로 다른 말이다. 최적은 계산이 도달하는 극점이고, 최선은 도덕이 요구하는 정점이다. 적당은 그 사이 어디쯤에서 멈추는 감각이고, 중용은 매번 다시 찾아야 하는 균형이다. 한가위의 속담이 감춘 충만은 이 넷 중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 계산의 끝도 아니고 도덕의 정점도 아니다. 나눔으로만 완성되는 자리다.
명절이 다가오면 잔소리가 예고편처럼 따라붙는다. 취업은 했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아이는 왜 안 낳느냐. 이 질문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저마다 자기 기준의 '최선'을 남에게 들이민다는 것. 최선은 원래 개인이 자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것이 타인을 향한 잣대가 될 때, 최선은 폭력이 된다. 최적이 계산의 언어라면 최선은 흔히 강요의 언어로 변질된다. 그 자리를 찾아가는 길에 두 편의 소설과 두 사상가가 서 있다. 하나는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를 그린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마저 계산하려 한 세계를 그린 소설이다. 그 곁에 고대의 중용론과 현대의 의사결정 이론이 나란히 놓인다. 둘은 결국 같은 것을 말한다. 최적은 선이 아니다.
메소테스의 자리, 소마가 지운 것
올더스 헉슬리는 1932년 『멋진 신세계』에서 완벽하게 설계된 슬롯를 그렸다. 이 슬롯는 인간을 알파와 베타와 감마와 델타와 엡실론이라는 계급으로 나누고, 유전자 조작과 수면 중 조건화 교육으로 각 계급을 제 자리에 최적화한다. 슬픔도 고통도 없다. 불쾌한 감정이 올라오면 소마(soma)라는 약이 즉시 지운다. 시스템의 눈으로 보면 이곳은 완전한 선이다. 불행이 없으니 악도 없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야만인 구역에서 온 존은 이 완벽함에 맞서 선언한다. 불행해질 권리, 늙고 추해질 권리, 셰익스피어를 읽으며 괴로워할 권리를 달라고. 그는 효율이 아니라 고통을 원한다. 고통이야말로 그가 인간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슬롯의 또 다른 인물 버나드는 남들보다 열등하게 태어났다는 열패감에 시달린다.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에서조차 서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최적화는 평등을 약속했지만, 실제로 내놓은 것은 또 다른 위계였다. 존은 끝내 이 세계에 동화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최적화된 슬롯는 그의 죽음마저 통계 한 줄로 흡수해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이 장면을 어떻게 읽었을까.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中庸, mesotes)을 말했다. 중용은 과도와 부족의 산술적 중간이 아니다. 매 순간, 매 상황에서 다시 찾아야 하는 질적 균형이며, 이를 찾아내는 능력을 그는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 phronesis)라 불렀다. 실천적 지혜는 정답지가 아니다. 판단하는 힘이다. 신세계의 최적화는 이 판단하는 힘을 통째로 삭제한 자리에 세워졌다. 판단할 필요가 없으니 지혜도 필요 없다.
오늘의 추천 알고리즘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무엇을 볼지, 무엇을 살지, 심지어 누구를 만날지까지 계산이 대신 골라준다. 편리함의 대가로 우리는 조금씩 판단하는 근육을 내려놓는다. 중용은 근육이다.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 소마의 자리에 오늘은 무엇이 있는가. 손가락 하나로 넘기는 피드, 끝없이 이어지는 짧은 영상. 불쾌한 순간마다 우리는 화면 속으로 도피한다. 헉슬리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약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헉슬리가 그린 디스토피아의 진짜 공포는 고통의 제거가 아니라 판단의 제거다. 완벽하게 계산된 선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선택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는 인간에게 덕은 없다. 덕이 없는 곳에 중용도 없다.
충분화의 지혜, 회색 신사의 계산
미하엘 엔데는 1973년 『모모』에서 다른 대상을 겨냥했다. 이번엔 시간이었다. 회색 신사들은 사람들을 찾아가 속삭인다. 수다 떠는 시간, 창밖을 보는 시간, 늙은 부모를 돌보는 시간은 낭비라고. 그 시간을 시간저축은행에 맡기면 삶이 넉넉해진다고. 사람들은 설득당한다. 더 바빠지고, 더 많이 처리하고, 시계를 보는 시간이 늘어난다.
그런데 삶은 풍요로워지기는커녕 메말라간다. 회색 신사들이 요구한 것은 언제나 최적해였기 때문이다. 최적해를 좇는 삶에는 여백이 없다. 여백이 없는 삶에는 우연도, 온기도, 머무름도 없다. 호라 박사가 지키는 시간의 꽃이 하나둘 시들어가는 것은 그래서다. 모모의 친구인 거북 카시오페이아는 늘 반걸음 늦게, 그러나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 나타난다. 서두르지 않고도 늦지 않는 존재. 엔데는 그 느린 걸음에 지혜라는 이름을 붙였다.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 1916~2001)은 1956년 이 여백에 이름을 붙였다. 충분화(satisficing). 인간은 모든 정보를 계산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최적해가 아니라 목표 수준을 넘어서는 '충분히 좋은 해'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라 불렀고, 이 공로로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사이먼은 이 문턱을 열망 수준(aspiration level)이라 불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문턱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좋은 선택지가 쉽게 나타나면 문턱은 올라가고, 찾기 어려우면 내려간다. 오늘의 자기계발 담론은 이 문턱을 끝없이 밀어 올리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사이먼의 통찰은 정반대였다. 어떤 순간에는 문턱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합리적 선택이라는 것.
최적화가 모든 가능성을 계산한 끝에 하나를 고르는 일이라면, 충분화는 문턱을 넘는 순간 멈추는 일이다. 모모가 지켜낸 것이 바로 이 충분화의 자리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다. 그 비효율 속에서 사람들은 빼앗긴 시간을, 그리고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이먼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최적을 포기할 때, 비로소 충분함에 닿는다.
가배, 나눔이 완성하는 중용
고속도로는 해마다 막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굳이 그 길을 간다. 최적의 경로 안내를 무시하고, 몇 시간을 더 써서라도 고향으로 향한다. 효율로 따지면 명백한 손해다. 그러나 그 손해를 우리는 기꺼이 감수한다. 거기 이미 답이 있다.
헉슬리의 소마와 엔데의 회색 신사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같은 말을 한다. 완벽한 설계는 인간에게서 판단과 여백을 함께 거두어 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 사이먼의 충분화도 서로 다른 시대의 언어이지만 같은 것을 가리킨다. 선은 계산의 끝에 있지 않다. 선은 매번 다시 찾아야 하는 자리에 있다.
그렇다면 한가위는 무엇을 기원한 말인가. 가배는 나눔의 놀이였다. 두 편으로 나뉘어 한 달 내내 길쌈을 겨루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회소곡을 불렀다. 승부의 끝은 축제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의 진짜 뜻은 아마 이랬을 것이다. 넘치더라도 나눌 사람이 있기를. 모자라더라도 나눌 마음이 있기를. '적당함'은 계산이 도달하는 지점이 아니다. 나눔이라는 태도로만 완성되는 자리다.
차례상 음식은 늘 조금 남거나 조금 모자란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상차림은 없다. 그런데도 그 자리가 넉넉하게 느껴지는 것은, 남으면 이웃과 나누고 모자라면 서로 양보해온 오래된 습관 때문이다. 계산이 아니라 습관이 중용을 만든다. 올해 한가위, 밥상 앞에 둘러앉은 이들을 보라. 거기 최적은 없다. 최선을 다투는 이도 없다. 다만 알맞게 나눈 저녁이 있을 뿐이다. 그 저녁이야말로, 문학과 철학이 오래도록 찾아 헤맨 중용의 얼굴이다. 가장 알맞은 저녁은 계산되지 않는다. 나누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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