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동 할머니의 500만원 뉴스를 보고
- 난곡동 할머니가 짊어진 오래된 빚
- 엠마오로 다시 되돌아가는 발걸음
- 뿌리 뽑힌 시대의 작은 회심
- 욕망을 거슬러 걷는 은총의 무게
신문지에 싸인 지폐는 무겁다. 종이의 무게가 아니다. 세월의 무게다. 영등포역 매표 창구 너머로 그것을 밀어 넣은 손은 늙었고, 그 손이 넘겨준 오백만 원은 이자보다 더 오래된 무엇을 품고 있었다. 이름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돌아선 발걸음. 사람들은 그것을 속죄라 부르고 참회라 부른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귀환이다. 오랫동안 비켜서 있던 자리로, 마침내 되돌아가는 몸짓이다.
회개와 회심을 우리는 종종 거창한 사건으로 그린다. 벼락처럼 내리치는 깨달음, 무릎을 꿇리는 극적인 전환. 그러나 난곡동 할머니의 이야기는 다른 문법을 보여준다. 회심이란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자신을 다시 놓는 일이다. 훔친 것을 되돌려 놓고, 빠져나온 자리로 되돌아가고, 등 돌렸던 방향으로 다시 걷는 것. 그 단순함이 오히려 이 시대에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정치인들은 저마다의 진영에서 제 몫을 키우느라 뉴스를 도배하고, 전쟁을 일삼는 권력자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큰 무력을 쌓는다. 기술자본은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를 퍼뜨린 뒤, 그 공포를 달래는 척 다시 손을 내민다. 모두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 방향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찾는 일은 왜 이렇게 힘겨운가.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 베유는 이 물음에 오래전 하나의 언어를 마련해 두었다. 그가 남긴 문장들이 오늘의 소란을 유난히 정확하게 비추는 까닭은, 그 역시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 물음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력의 법칙
베유는 유고집 『중력과 은총(重力과 恩寵, La Pesanteur et la Grâce)』에서 인간의 영혼에도 물질계의 중력 법칙과 닮은 법칙이 있다고 썼다.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면 영혼은 언제나 아래로, 자기 자신 쪽으로 끌려간다. 소유하려는 힘, 증명하려는 힘, 남보다 앞서려는 힘. 이 모든 것이 중력이다. 은총은 그 법칙의 유일한 예외다. 스스로를 비우는 힘, 자기중심을 내려놓는 힘만이 아래로 향하는 흐름을 거스른다.
이 낡은 은유는 오늘의 풍경 앞에서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상대를 향해 화살을 돌리는 정치인의 언어는 중력의 가장 익숙한 표현이다. 사과의 문장조차 다음 선거를 위한 전략으로 계산될 때, 중력은 가장 세련된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국경 너머의 고통을 계산기 위의 숫자로 바꾸어 전쟁을 지속시키는 권력자들 역시 같은 낙하 위에 서 있다. 그들은 지키기 위해 무너뜨리고, 안전을 말하며 위협을 늘린다. 인공지능을 앞세운 기술자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미래의 공포를 정교하게 설계하여 퍼뜨린 뒤, 그 공포를 잠재울 열쇠마저 자신이 쥐고 있다고 속삭인다. 두려움을 만들고, 그 두려움을 다시 상품으로 되파는 구조. 이보다 완벽한 중력의 순환은 없다.
문제는 이 낙하가 대개 악의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난곡동 할머니가 젊은 날 검표구를 넘었던 것도 악의가 아니었다. 어린 자식을 먹여야 했던 가난이 그를 아래로 끌어당겼을 뿐이다. 중력은 늘 그런 식으로 온다.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안보라는 이름으로. 베유가 무서워했던 것은 악인의 존재가 아니라, 누구도 예외 없이 끌려 내려가는 이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뿌리 뽑힌 자리
베유는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또 하나의 원고를 런던에서 써 내려갔다. 사후에 『뿌리내림의 필요(L'Enracinement)』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 글에서 그는 뿌리내림이야말로 인간 영혼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무시되어 온 욕구라고 말한다. 한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실제로, 능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비로소 뿌리를 가진다. 그리고 전쟁과 정복, 돈에 대한 숭배는 이 뿌리를 뽑아내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난곡동 할머니의 무임승차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것은 도덕의 결함이기 이전에 뿌리 뽑힘의 흔적이다. 산동네와 도심을 오가며 몇 푼의 차비조차 감당하지 못했던 그 시절, 할머니는 이미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밀려나 있었다. 가난은 사람을 공동체의 가장자리로 내몬다. 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규범은 버거운 사치가 된다.
오늘의 권력은 이 뿌리 뽑힘을 더 정교한 방식으로 반복한다. 전쟁은 국경 너머의 사람들을 삶의 터전에서 물리적으로 뽑아낸다. 정치인들이 선동하는 진영 논리는 이웃을 적으로 재편하며 공동체의 결을 끊어낸다. 세대와 지역과 신념으로 사람을 가르는 혐오의 언어 역시, 뿌리내림을 말하면서 실은 또 다른 뽑아냄을 실행한다. 인공지능을 앞세운 자본은 노동의 자리를 흔들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게 만든다. 사람들은 국적과 직업과 관계라는 뿌리를 하나씩 잃어 가면서도, 정작 자신이 뽑혀 나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뿌리 뽑힌 영혼은 어디로도 돌아갈 자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회심이 어려운 까닭은 분명해진다. 돌아가려면 돌아갈 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 자리 자체를 끊임없이 지워 나간다. 할머니가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을 돌아 다시 영등포역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에 자리 하나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기억하는 일, 그것이 뿌리내림의 시작이다.
눈이 열리는 자리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도 스무 해 만에 고향에 이르렀을 때 곧바로 알아보아지지 않았다. 발을 씻기던 늙은 유모가 오랜 흉터를 보고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챈다. 알아봄은 이렇게 몸에 새겨진 흔적을 통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뒤늦게 도착한다.
루카복음이 전하는 엠마오 이야기에도 같은 문법이 흐른다.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등지고 걷는다. 희망이 꺾인 자리에서 등을 돌리는 걸음이었다. 낯선 이가 다가와 나란히 걸어도 그들의 눈은 가리어져 있었다. 곁에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 그것은 뿌리 뽑힌 자의 흔한 증상이다.
낯선 이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다만 묻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고. 그 질문이 두 사람의 슬픔을 밖으로 이끌어낸다. 이어 그는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풀어낸다. 두 제자는 훗날 이렇게 고백한다. 길에서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이미 타오르고 있었다고. 그러나 타오르는 마음과 열리는 눈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이해는 먼저 도착하고, 알아봄은 뒤늦게 온다.
날이 저물자 두 제자는 낯선 이를 붙든다. 저희와 함께 머무르시라고. 그 청함이 없었다면 눈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은총은 스스로 밀고 들어오지 않는다. 초대를 기다린다. 식탁에서 그가 빵을 떼어 건네는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열린다. 그리고 그는 사라진다.
여기서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을 택한다. 눈이 열린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이미 어두워진 길을, 그들은 되짚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방금 등지고 떠나온 그 자리로. 회심은 여기서 완성된다. 믿음이 생겨나는 사건에 그치지 않고, 걷는 방향이 뒤바뀌는 사건으로. 등 돌렸던 발이 다시 제자리를 향해 놓이는 순간, 비로소 눈뜸은 삶이 된다.
신문지 속의 은총
난곡동 할머니가 영등포역 창구에 밀어 넣은 오백만 원도 다르지 않다. 아들을 먼저 보낸 어머니는 오래전 자신이 비켜섰던 그 자리를 기억해 냈다. 세월의 이자를 넉넉히 더해, 그는 자신이 뽑혀 나왔던 자리에 스스로를 다시 심었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걸음이었다. 법도 제도도 그 빚을 청구하지 않았다. 오직 뿌리내림을 향한 영혼의 갈증만이 그를 그 창구 앞으로 이끌었다.
영등포역이 보여 준 응답 또한 은총의 다른 얼굴이다. 규정대로라면 출처 불명의 현금은 돌려보내거나 방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무원들은 그 돈에 담긴 마음을 정당한 운임과 반성금으로 받아들이고, 대합실 벽에 편지를 내걸었다. 할머니의 슬픔이 죄가 아니었음을, 아들의 죽음이 할머니의 업보가 아니었음을 알리는 편지였다. 낯선 이가 두 제자를 알아봐 주었듯, 역은 얼굴 없는 한 사람을 알아봐 주었다. 알아봄은 이렇게 언제나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이 작은 사건은 오늘의 세상을 향해 조용히 되묻는다. 자기 몫을 지키려 뉴스를 도배하는 정치인들에게, 안보를 명분으로 전쟁을 이어 가는 권력자들에게, 공포를 설계하고 그 해독제까지 팔려는 기술자본에게 물을 수 있는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지금 어느 자리에서,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중력은 언제나 손쉬운 방향을 가리킨다. 아래로, 더 아래로, 자기 자신 쪽으로. 그러나 그 낙하를 거스르는 힘이 인간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다.
거창한 혁명이나 극적인 전향이 아니어도 좋다. 신문지에 싸인 오백만 원처럼, 낯선 이를 붙드는 짧은 청함처럼, 회심은 아주 작은 걸음에서 시작된다. 등 돌렸던 곳으로 다시 발을 옮기는 일, 뽑혀 나왔던 자리에 스스로를 다시 심는 일. 욕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그 걸음은 여전히 무겁고, 여전히 드물다. 그러나 그 드묾이야말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아직 이 세상에서 완전히 뽑혀 나가지 않았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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