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니 홉킨스의 두 번째 클래식 앨범 발매를 보고
- 60년 동안 발효된 홉킨스의 악보
- 명함이 결코 말해주지 않는 자기
- 정체성은 서사다, 명사가 아니라
- 가속슬롯가 놓쳐버린 시간의 결
세상에 ‘늦은 출발’이란 없다. 이미 출발한 것이 조금 늦게 도착할 뿐이다.
여든아홉의 노배우가 두 번째 클래식 앨범을 냈다. 앤서니 홉킨스 경(Sir Anthony Hopkins),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였고 〈더 파더〉의 스티븐이었던 그 얼굴이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앞에 악보를 펼쳤다. 2026년 8월 21일, 데카 클래식스(Decca Classics)에서 나온 이 음반의 이름은 『Life is a Dream』. 인생은 꿈이라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고백이었다. 그의 첫 클래식 앨범 『Composer』가 나온 지 열네 해 만이었다. 두 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가 뒤늦게 손댄 취미라고 하기엔, 이 음반에는 60년의 세월이 응축되어 있었다.
곡 하나는 쉰 해가 가깝도록 서랍 속에 있었다. 1964년, 스물여섯 청년 홉킨스는 왈츠 한 곡을 썼다. 세상의 평가가 두려웠다. "내가 쓴 음악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는 악보를 넣어두고 배우의 길을 걸었다. 47년이 흘렀다. 아내 스텔라 아로야브(Stella Arroyave)가 남편 몰래 그 악보를 앙드레 리우(André Rieu)에게 보냈다. 2011년 7월, 빈에서 앙드레 리우와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Johann Strauss Orchestra)의 연주로 「And The Waltz Goes On」이 세계 초연됐다. 객석의 노배우는 눈시울을 붉혔다. 스물여섯의 꿈이 마침내 도착한 자리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늦은 도전’이라 부르고 싶어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도전이 아니라 완성이다. 시작은 1964년에 이미 있었다. 다만 세상에 드러날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늦음이란 시간을 재는 우리의 방식이 만들어낸 착시다. 그 착시를 걷어내면, 다른 질문이 남는다. 나이가 정말 사람을 늦게 만드는가, 아니면 우리가 나이에게 늦음이라는 이름을 떠맡긴 것인가.
크로노스의 지연, 카이로스의 완성
그리스인은 시간을 두 이름으로 불렀다. 크로노스(χρόνος, chronos)는 해가 뜨고 지듯 균질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고, 인생은 태어나 늙고 죽는 순서를 따른다. 크로노스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반면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는 길이로 잴 수 없는 시간이다. 한순간이 응축되어 영원의 무게를 갖는 시간, 의미가 시간을 완성하는 시간이다. 크로노스가 달력과 시계의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비로소 열리는 문이다.
홉킨스의 47년은 크로노스로 재면 지연이다. 그러나 카이로스로 보면 발효다. 포도가 와인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을 지연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숙성이라 부른다. 예순 해 동안 그가 피아노 앞에서 남긴 스케치들, 서랍 속에서 침묵하던 왈츠는 무의미하게 소모된 시간이 아니라 응축되고 있던 시간이었다. 크로노스는 그것을 잰다. 카이로스는 그것을 안다.
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 1860~1961)는 일흔 후반, 관절염으로 바늘을 놓아야 했을 때 붓을 들었다. 정규 미술교육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여든에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고, 백한 살에 세상을 뜰 때까지 천 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다. 커널 샌더스(Colonel Sanders, 1890~1980)는 예순다섯에 수중에 슬롯보장금 105달러가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치킨 레시피를 들고 천 번 넘는 거절을 겪은 뒤에야 KFC의 기틀을 세웠다. 이들의 나이는 크로노스가 기록한 숫자일 뿐, 그들의 시간을 설명하지 못한다.
윤영주는 34대를 이어온 종가의 며느리로 살다가 예순에 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흔에 워킹을 배워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에서 우승했다. "못할 게 뭐가 있냐." 그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슬롯가 연로한 여성에게 강요해온 편견 앞에서, 그는 무대 위의 걸음으로 답했다. 크로노스는 그의 나이를 셌지만, 카이로스는 그의 걸음을 기억했다.
늦었다는 판단은 언제나 크로노스의 판단이다. 슬롯가 정해놓은 타임라인과 실제 삶의 시간을 비교할 때만 늦음이 발생한다. 그러나 삶은 타임라인을 따라 흐르지 않는다. 삶은 무르익는다. 무르익은 것은 도착이 늦었을 뿐, 결코 늦지 않았다.
페르조나 너머, 명함이 감추는 자기
한때 국경을 넘나드는 일을 하며 여러 나라 사람들과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어느 회의장에서 만난 아르헨티나인은 명함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피아노 치는 엔지니어.’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노래하는 의사’, ‘그림 그리는 변호사’. 처음엔 낯설었다. 그러나 곧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직함 하나가 한 사람의 전부를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융(C.G. Jung)은 슬롯가 요구하는 얼굴을 페르조나(persona)라 불렀다. 페르조나는 가면이다. 세상과 관계 맺기 위해 필요한 가면이지만, 가면과 얼굴을 착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융에게 개성화(individuation)란 그 가면을 벗고 자기(自己, Self)로 돌아가는 전 생애의 과정이다. 명함에 적힌 직함은 페르조나다. 밥벌이를 위해 세상에 내미는 얼굴이다. 그러나 그 얼굴 뒤에는 다른 얼굴이 있다. 명함은 다만 그 얼굴을 적을 칸이 없을 뿐이다.
문과와 이과의 소양을 고루 갖췄다는 말은 언뜻 칭찬 같다. 그러나 그 말은 동시에, 어느 하나도 특별히 잘하는 게 없다는 자백처럼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은 한 사람에게 하나의 이름표를 요구한다. 컨설턴트면 컨설턴트, 마케터면 마케터. 그 이름표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두 가지를 동시에 잘한다는 것은 어느 하나에도 전부를 걸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삶이 명함 한 장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은, 크게 넘어져본 사람만이 안다.
페르조나를 자기로 착각한 사람은 그 페르조나가 흔들릴 때 함께 무너진다. 직함을 잃으면 자신을 잃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개성화된 사람은 다르다. 그는 이미 알고 있다. 명함은 계약서일 뿐, 자기 자신에 대한 진술서가 아니라는 것을.
융은 이것을 자기소외라 불렀다. 슬롯가 기대하는 역할에 맞춰 살기만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겉으로는 성공한 얼굴이지만, 안으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얼굴이 된다. 아르헨티나인들이 명함에 두 개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놓은 것은, 어쩌면 그 소외를 미리 막아두려는 작은 저항이었을 것이다.
정체성은 명사가 아니라 서사다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정체성을 둘로 나눴다. 이뎀(idem)은 변하지 않는 동일성이다. 지문, 주민등록번호, 어제도 오늘도 같은 얼굴 같은 것들. 입세이테(ipséité)는 다르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도 약속을 지키는 자기, 변화 속에서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서사적 자기다. 이뎀은 명사이고, 입세이테는 이야기다. 리쾨르는 저서 『시간과 이야기』에서 인간이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이야기의 형식을 빌린다고 했다. 삶은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줄거리다. 줄거리에는 처음과 중간이 있을 뿐, 그 자체로 이르거나 늦은 지점은 없다.
명함의 직함은 이뎀에 가깝다. 고정되어 있고, 갱신되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나답다’고 부르는 것은 입세이테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잇는 서사이지, 어느 한 시점에 박제된 명사가 아니다. 스물여섯에 왈츠를 쓴 홉킨스와 일흔넷에 그 왈츠로 데뷔 앨범 『Composer』를 낸 홉킨스는, 이뎀으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마흔여덟 해의 시차, 배우와 작곡가라는 다른 이름표. 그러나 입세이테로 보면 이 둘은 같은 사람이다. 한 사람이 품었던 약속이 47년 뒤에 지켜졌을 뿐이다.
여기서 늦음이라는 개념은 설 자리를 잃는다. 늦음은 시간의 길이를 재는 개념이지, 서사의 진실성을 재는 개념이 아니다. 한 사람이 스무 살에 품은 마음이 여든에 이루어졌다면, 그는 예순 해를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예순 해 동안 하나의 서사를 지켜낸 것이다. 앞서 출발한 사람과 뒤늦게 도착한 사람이라는 구도 자체가 크로노스의 착시다. 서사 안에서는 앞섬도 뒤섬도 없다. 오직 지켜진 약속과 아직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 있을 뿐이다.
‘늦은 인생 2막’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표현은 마치 1막이 끝나고 뒤늦게 2막이 시작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실은 하나의 막이 처음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무대에 조명이 늦게 켜졌을 뿐이다. 조명이 켜지기 전의 시간을 우리는 공백이라 여기지만, 그 시간에도 배우는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마음속 깊이 품었던 것, 그 자체가 이미 출발이었다.
서랍을 다시 여는 시간
한병철은 『시간의 향기』에서 현대인의 시간이 노동의 인질이 되었다고 진단했다. 모든 시간이 일의 시간이거나 일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면서, 시간은 서사적 긴장을 잃고 원자화된 점(点)들로 흩어진다. 우리가 늦었다고 느끼는 감각은 바로 이 점-시간에서 나온다.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속도와 비교만 남는다. 옆 사람보다 늦었는가, 정해진 시간표보다 늦었는가. 질문은 언제나 비교로 시작해서 조급함으로 끝난다.
머무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병철은 말한다. 활동하지 않고 자기 안에 머무는 시간, 사색하는 시간이야말로 서사적 긴장을 되찾는 길이라는 것이다. 자본은 머무름을 가장 싫어한다. 무엇이든 당겨오고, 무엇이든 앞당기려 한다. 그런 세계에서 47년을 기다린 악보는 시대착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시대착오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이다. 서랍 속에 넣어둔 악보는 47년 동안 침묵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침묵의 시간이야말로 카이로스가 일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해 서랍을 너무 일찍 열거나, 아예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앙드레 리우는 전화를 걸어 물었다. "당신이 보낸 왈츠를 지금 막 오케스트라와 연습했습니다. 정말 환상적입니다!" 홉킨스는 되물었다. "네? 제 아내가 그걸 보냈다고요?" 47년 전에 쓴 곡이 그렇게 돌아왔다. 그해 가을 앙드레 리우는 이 곡을 표제곡으로 삼아 동명의 앨범을 냈고, 이듬해 1월 버밍엄 시티 교향악단이 연주한 홉킨스 자신의 첫 앨범 『Composer』에도 이 곡이 실렸다. 우리 각자에게도 그런 서랍이 있다. 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넣어두었던 것, 밥벌이에 밀려 뒤로 미뤄두었던 것. 그것은 죽지 않았다.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명함을 다시 들여다볼 때가 되었다면, 거기 적힌 직함이 아니라 그 뒤에 적히지 않은 것을 봐야 한다. 글 쓰는 컨설턴트든, 비평 쓰는 마케터든, 그 이름은 세상이 아직 마련해주지 않았을 뿐 이미 시작된 이름이다. 나답다는 것에는 앞섬도 뒤섬도 없다. 다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서사가 있을 뿐이다. 그 서사는 늦지 않는다. 도착할 때, 정확히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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