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콘의 저녁

약이 된 독, 독이 된 편리

by박 스테파노
- 약이 된 독, 독이 된 편리
- 로켓배송이 감추어 온 노동의 민낯
- 넘치는 바카라 사이로 사라진 독자
- 가짜 이야기에 취한 탈진실의 시간
- 거울 속 나에게 다시 묻는 안부


그리스 신화 속 지혜의 신 테우트가 문자를 발명했을 때, 그것은 기억을 돕는 약이자 동시에 기억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독이었다. 자크 데리다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다시 읽으며 이 모순적 실체를 파르마콘이라 불렀다. 그가 주목한 것은 약과 독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라, 애초에 그 둘을 나눌 수 없다는 사실 자체였다. 파르마콘은 선택 이전에 이미 결정 불가능한 것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어떤 기술을 약이라 부르는 순간, 그 안에는 이미 독이 함께 접혀 들어가 있다.


작년 어느 날, 아내와의 오랜 검토 끝에 쿠팡을 탈퇴했다. 흐트러짐과 손실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 두려움은 결국 편리라는 말로 포장된 나태함에 지나지 않았다. 네이버 멤버십으로 이미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고, 네이버와 마켓컬리가 손잡은 사이트에서 손실 없이 대부분의 대체재를 구할 수 있었다. 배송은 오히려 더 촘촘했고, 늘 깨져 오던 계란도 온전히 도착했다. "아이 엄마라서 어쩔 수 없다"던 변명들이 그제야 핑계로 보이기 시작했다.


쿠팡이라는 규모의 경제가 내세운 최대 무기는 가난하고 빠듯한 이들에게 던진 '가성비'였다. 그러나 지난 10년, 다른 플랫폼의 가격도 이미 경쟁력을 갖추었음을 나는 애써 외면해 왔다. 그 외면을 지탱한 것은 익숙함이었고, 그 익숙함이야말로 쿠팡이 노린 진짜 승부처였다.




속도의 유토피아, 감시된 노동


쿠팡은 단순한 유통기업이 아니다. 데이터로 시공간을 재편하는 통치 기술이며, 쇼샤나 주보프가 감시 자본주의(監視 資本主義, surveillance capitalism)라 부른 체제의 한국적 축소판이다. 주보프는 인간 행동의 흔적, 즉 행동 잉여(behavioral surplus)가 상품이 되어 예측 시장에서 거래되는 구조를 지적했다. 로켓배송의 속도는 소비자의 편의가 아니라, 노동자의 동선을 초 단위로 채굴해 얻은 데이터의 산물이다.


물류센터의 노동자들은 AI가 산출한 UPH, 즉 시간당 생산량이라는 숫자에 포섭된다. AI는 조력자가 아니라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무시한 채 최적의 속도를 강요하는 절대적 감시자다. 걸음은 기록되고, 휴식마저 손실로 환산된다. 기술이 인간의 편리를 위해 꿈을 꿀 때, 정작 인간은 기계의 명령에 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 전도된 관계가 감시 자본주의의 완성형이다.


create-a-sophisticated-conceptual-editorial-illust (7).png▲ 속도의 유토피아는 누군가의 몸을 초 단위로 측정한 뒤에야 도착한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SPC 등의 불매운동에는 오히려 회의적이었다. 자영업자와 노동자, 개미주주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팡에서의 노동은 결이 다르다. 그 위의 소비는 일종의 편리 중독이며, 우리는 취업과 중지를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취해 있을 뿐이다. 예전 동네 중국집은 배달원을 직접 고용하며 숙식을 제공했고, 취업 장벽에 막힌 이들에게 슬롯 적응의 발판이 되었다. 지금 그 고용은 사라졌고, 그 자리는 이주노동자와 미등록 체류자의 몫이 되었다. 이 연쇄는 지금 청년들이 아우성치는 일자리 문제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150조 원 규모의 국부펀드로 과도기의 AI 인프라에 투자하느니, 기업가치 130조 원 안팎의 쿠팡을 인수해 국민 기업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40조 원의 직접 투입으로 최대주주가 되고, 전기·통신처럼 유통을 공공 인프라로 재편한다면, 쌓인 실제 데이터를 공공재로 열어 도메인 AI를 개발하는 일이야말로 진짜 AI 혁명에 가깝지 않을까.




닫혀가는 장(場), 사라지는 독자


이 감시된 노동의 풍경은 문화 산업에서도 낯설지 않다. 어느 글쓰기 플랫폼이 출판진흥과 지역서점 활성화를 내걸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시도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결과에는 큰 기대가 없다. 문제를 제대로 읽어내는 데 실패한 기획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동네 서점을 살리는 일을 독서 습관의 문제로 축소하는 인식은 안일하고 피상적이다. 진짜 문제는 사서 곁에 둘 바카라이 줄어드는 데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를 하나의 장(場, champ)으로 보았다. 저마다 다른 자본을 지닌 행위자들이 위치를 다투는 공간이며, 독자 역시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문화자본을 지닌 행위자로 기능한다. 그런데 지금의 출판 담론은 독자를 값싸고 즉각적인 오락을 원하는 존재로만 간주한다. 문해력이 낮아졌다는 진단, 교육이 실패했다는 진단, 스마트폰 탓에 종이바카라이 멀어졌다는 진단들. 이 모든 설명에는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가 빠져 있다.


create-a-sophisticated-conceptual-editorial-illust (8).png▲ 바카라은 넘치는데, 정작 곁에 둘 바카라을 만날 장(場)은 닫혀가고 있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출판을 설명하는 언어는 어느새 상거래적 용어로 수렴되어 버렸다. 경기 불황이 지갑을 닫게 하고, 게으른 자기계발이 안목을 둔하게 하고, 디지털 기술이 종이바카라을 밀어낸다는 식이다. 원인은 언제나 산업 바깥으로 떠넘겨진다. 정작 냉정히 보면, 지금 주목할 독자는 미래의 잠재 독자로 호출되는 젊은 세대가 아니라, 실제 독서력과 구매력을 함께 지닌 50대일 가능성이 크다. 출판계는 이미 오래전 이 세대를 시야 밖으로 밀어냈다.


읽고 싶고 곁에 두고 싶은 바카라을 만드는 일은 상당한 용기와 인내를 요구한다. 지식과 정보조차 구별 못한 채 소구력만을 좇는 흐름이 산업을 잠식하고 있으니, 이는 개별 출판사의 판단 착오가 아니라 장 전체가 앓는 구조적 빈곤에 가깝다.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지역서점 살리기의 방바카라으로 정부 구매 계약을 지역서점에 돌리자는 제안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사안이 침체가 아니라 총체적 난국에 가깝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스펙터클이 삼킨 진실


닫힌 장 안에서 사라지는 것이 독자만은 아니다. 진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실종된다. 기 드보르는 현대 슬롯를 스펙터클의 슬롯(société du spectacle)라 불렀다. 삶이 이미지로 재현되는 정도를 넘어, 이미지 자체가 실재를 대체해 버리는 상태다. 탈진실(post-truth)의 시대, 우리는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신념이 여론을 형성하는 풍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넷플릭스 영화 〈대홍수〉(김병우, 2025)를 떠올린다. AI 연구원 안나(김다미)는 재난 속에서 아들 자인을 지키는 일과 인류의 운명이 걸린 임무 사이에서 갈등한다. 최적의 판단을 계산하는 연구자이면서도 계산으로 환원되지 않는 모성이라는 잉여를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이다. 스펙터클이 삼키지 못하는 균열은 언제나 그 잉여에서 생겨난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더그 라이만, 2014)에서 빌 케이지(톰 크루즈)가 수만 번의 죽음을 반복하며 승리의 경로를 설계할 때, 관객은 실재와 시뮬레이션의 경계를 잊는다. 서사는 완결된 진실 대신, 기호에 맞춰 반복 재구성되는 스토리셀링만 남긴다. 〈오블리비언〉(조셉 코신스키, 2013)의 잭 하퍼(톰 크루즈)는 자신을 지구의 마지막 수호자라 믿지만, 실은 거대 권력이 양산한 복제본 중 하나이며 기억조차 시스템이 주입한 거짓이다. 이 복제의 변주는 〈미키 17〉(봉준호, 2025)에서도 이어진다. 죽어도 다시 인쇄되는 소모품 인간에게 '나'라는 고유성은 어디에 남는가.


create-a-sophisticated-conceptual-editorial-illust (9).png▲ 스펙터클은 거짓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때로는 진실이 있던 자리까지 아름답게 지워버린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트랜센던스〉(월리 피스터, 2014)가 그린 지능의 무한한 확장이 인간성을 상실한 유토피아로 귀결되듯, 무분별한 스토리셀링은 서사의 빈곤을 낳는다. 나사의 태양광 패널이 일본 물리학자 미우라 코료의 접이식 패턴으로 거대한 구조물을 작은 부피로 접었듯, 우리도 거대한 진실을 서사의 크기로 접어 넣는다. 그 접힘 속에서 본질은 생략되거나 왜곡된다.


이 왜곡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다. 종교학자 배철현은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를 진짜 나라고 착각하는 상태를 사이비(似而非)라 불렀다. 평생 일구어야 할 임무를 알지 못한 채 다른 누군가를 대행하는 삶이다. 사이비는 자신을 응시할 용기가 없기에, 남들이 좋아할 법한 허상을 빌려 스스로를 확신시킨다. 다식이 무식이 되는 순간이 바로 이때다. 많이 알수록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역설, 그것이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무식한 가짜들의 조건이다.




똥밭에서 다시 쓰는 문장


스펙터클과 사이비를 통과해 다시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예전 수영을 배울 때 자유형 호흡법, '음~파'가 그렇게 어려웠다. 비중격과 비강이 뒤틀려 코 한쪽은 늘 막혀 있었고, 나머지 한쪽도 성능이 6~7할에 불과했다. 코로 숨을 뱉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는 25미터 풀을 무호흡으로 완주하는 패기 어린 꼼수만이 가능했다. 그 기분이 드는 요즘이다.


글쓰기 플랫폼에 쓴 글이 1,000편을 훌쩍 넘었다. 필명 대신 실명을 적었던 시절도 있었다. 지나고 보면 멍청한 모범생 같은 짓이었다. 그럼에도 1,000이라는 숫자가 뿌듯했던 것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글쓰기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되는 순간, 그것은 괴로움이 된다. 지난 시간, 글을 쓰랬더니 사실은 똥을 싸고 있었다. 문장과 사유의 결을 따지지 않은 채 눈에 띄는 글자와 사진으로 채워 넣기 바빴던 날들이었다.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자, 아내는 조심스레 답했다. 지금의 고행이 없었다면 지금의 고뇌도 없었을 것 아니냐고, 갑작스런 곤궁이 사유라는 선물을 준 것일 수도 있지 않냐고. 그 말에 설움이 잦아들었다.


create-a-sophisticated-conceptual-editorial-illust (10).png▲ 천 개의 똥도 언젠가는 거름이 된다. 설움 끝에서 다시 문장을 쓴다. ⓒ Visual Concept & Art Direction: PSTPHNS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눈물이 더욱 그를 서럽게 만들었다. 그가 우는 것은 후회 때문도 아니었고 자바카라감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가슴이 찢어지도록 자기 자신이 비참하다는 느낌, 아무도 이해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자신만의 슬픔이 그를 울게 만들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똥구덩이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일어날 생각도 않고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가슴속에 있는 모든 슬픔의 덩어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울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그의 몸 안에 뭉쳐져 있던 슬픔, 어찌할 수 없는 허망함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고 울었다.

—이창동, 『녹천에는 똥이 많다』



똥밭에 주저앉아 우는 형 준식의 모습은 신세한탄의 곡소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고통스러운 질문이었다. 고담준론의 도식을 벗기고 나면, 남는 것은 처참하고 처절한 진짜 삶뿐이다. 이제 내게 글쓰기는 그런 일이 되었으면 한다. 처연한 진실이 삶의 무게를 늘려 가더라도, 마주 보고 느끼는 대로 써 내려가고 싶다.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간다. 파르마콘은 약과 독 사이의 결정 불가능성이었다. 쿠팡도, 출판도, 스토리셀링도, 지금 이 글쓰기도 모두 그 경계 위에 놓여 있다. 경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어느 쪽에도 투항하지 않은 채, 접혔던 진실을 다시 펴는 일. 언젠가 1,000개의 똥이 거름이 되어 밭이 되고, 그 곁에서 호박꽃 넝쿨이 엉겨 가기를 바란다. 설움 끝에 희망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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