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냄과 채워짐의 미학

조각과 소조로 읽는 글쓰기

by박 스테파노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194

- 더함과 덜어냄, 글쓰기의 두 가지 방법론
- 조형예술의 두 길로 읽는 창작과 수정


하나의 형상이 세상에 태어나는 길은 둘이다. 거대한 돌덩어리의 내부로 파고들어 불필요한 살을 깎아내는 조각(彫刻)의 길, 그리고 텅 빈 허공에 찰흙을 붙여가며 형태를 부풀리는 소조(塑造)의 길. 이 두 조형의 방법론은 백지 위에 문장을 얹어 하나의 세계를 완성해가는 글쓰기의 도정과 닮아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때로 내 안의 과잉을 도려내는 조각의 노동이며, 때로는 결핍을 메워가는 소조의 여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을 질료(質料)와 형상(形相)으로 나누어 보았다. 대리석은 질료다. 그 안에 잠재된 형상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태(可能態, dynamis)로 잠들어 있다. 조각가의 정과 망치는 그 가능태를 현실태(現實態, energeia)로 끌어올리는 도구다. 형상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이 오래된 형이상학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편의 글 역시 처음부터 완성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작가의 머릿속, 혹은 세상의 사건들 속에 가능태로 잠겨 있을 뿐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 잠재된 형상을 현실의 언어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가능태와 현실태. Gemini generated by ParkStephanus


조각가와 소조가에게는 작업장이 있다. 돌가루가 켜켜이 쌓인 바닥, 마르지 않게 덮어둔 천. 작가의 작업장은 바카라상 하나, 화면 하나로 좁아졌지만 본질은 같다. 그곳에서도 무언가는 쌓이고, 무언가는 깎여 나간다.


글을 쓰는 일은 여러 말로 불린다. 글쓰기와 글짓기의 오래된 다툼, 글을 빚고 만들고 엮는 일, 글을 다듬고 깎고 벼리는 일까지. 아무 것도 없던 자리에서 이야기와 정보가 피어난다. 그 이야기가 의미를 낳고, 의미는 다시 사유를 부른다. 그렇게 쓰인 글자들을 다시 덜어내고 줄이고 깎아 더 단단한 알맹이로 만든다. 생성과 삭감, 두 개의 손이 번갈아 움직이며 한 줄의 문장을 완성해간다.


손은 두 기예의 공통된 도구다. 조각가의 손은 정과 망치를 쥐고 돌을 향해 내려친다. 소조가의 손은 점토를 어루만지고 누르고 비빈다. 작가의 손 역시 다르지 않다. 자판 위를 두드리는 손가락은 어느 순간 정이 되고, 또 어느 순간 점토를 매만지는 손가락이 된다. 메를로-퐁티는 손이 세계를 만지는 동시에 세계로부터 만져진다고 했다. 글 쓰는 손도 그렇다. 문장을 만들어내는 손은, 동시에 그 문장에 의해 다시 빚어진다.



소조, 공허를 채워가는 생성의 서사


소조는 철저한 더하기의 예술이다. 조각처럼 단단한 물질의 저항을 받지 않는다. 유연한 찰흙과 납을 쥐고, 빈 허공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나간다. 시간이 흐르면 부피가 자라나고 형상이 팽창한다. 살아있는 유기체가 태어나는 방식을 닮았다.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귀스트 로댕은 실은 조각가가 아니라 소조가였다. 그는 매끄러운 표면보다 내부에서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중시했다. 손가락 끝으로 찰흙을 짓이기고 덧붙이며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는 말했다.


조형각가는 공간 속에 부피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형태는 작가가 내부의 진실을 밀어 올릴 때 비로소 겉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로댕에게 소조란 내면의 뜨거운 에너지를 점토라는 매개로 외부에 확장하는 행위였다. 그의 손끝에서 자란 〈칼레의 시민들〉이나 〈생각하는 사람〉은 매끈한 완결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근육의 긴장을 그대로 간직한 채 멈춰 있다. 표면의 거친 흔적조차 지우지 않았다. 그것이 살아 있음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조의 도정은 초고 쓰기의 과정과 닮아 있다. 백지는 깊은 심연이자 공허다. 작가는 그 적막한 공간에 인물이라는 뼈대를 세우고, 사건이라는 살을 붙이고, 감정이라는 온기를 불어넣는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스스로 자라나는 경험, 인물이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경험은 찰흙의 촉감과 같다. 마르지 않은 점토는 손가락의 압력에 즉시 반응한다. 초고의 문장도 그렇다. 쓰는 순간 다음 문장을 부르고, 다음 문장은 또 다른 사유를 끌어온다.


로뎅이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모습. NewYotk Art


초고를 쓰는 작가는 종종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손이 먼저 움직이고 의식은 뒤따라온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들은 이것을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이라 불렀다. 의식의 검열을 끄고 손이 가는 대로 글자를 받아 적는 방식이다. 소조의 손 역시 그렇다. 점토를 쥔 손은 머리보다 먼저 형태를 안다. 미리 그려둔 도면 없이도, 손끝의 감각이 다음 동작을 결정한다. 초고의 부피는 이렇게 자란다. 의도보다 빠르게, 계획보다 무성하게.


소조로서의 글쓰기는 완벽을 전제하지 않는다. 점토가 마르기 전까지는 언제든 덧붙이고, 뭉개고, 형태를 바꿀 수 있다. 끊임없이 생각을 확장하고 기억의 파편을 끌어모아 서사의 부피를 키워가는 유연함. 그것이 소조가 가진 생성의 서사다. 다만 그 풍성함에는 위험이 함께 자란다. 살을 너무 많이 붙인 형상은 본래의 뼈대를 잃는다. 부풀어 오른 점토는 제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기도 한다. 생성은 절제 없이는 비대해질 뿐이다.



조각, 본질을 찾아가는 덜어냄의 침묵


반면 조각은 철저한 빼기의 예술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유 안에서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 단 하나의 본질을 구출해내는 일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조각에 대해 불멸의 일화를 남겼다. "다비드 상은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그는 담담히 답했다.


간단합니다. 대리석 내부에서 다비드를 보았고, 그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다비드가 아닌 돌의 표면을 깎아냈을 뿐입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란 돌 속에 갇혀 숨 쉬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행위였다. 완성된 형태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작가의 몫은 본질을 가리는 완고한 외피를 거둬내는 일에 불과했다.


노자는 『도덕경』 사십팔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배움의 길은 날마다 더하는 것이고, 도의 길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 더함이 끝없이 계속되면 지식은 쌓이지만 본질은 흐려진다. 덜어냄이 극에 이르면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무위(無爲)에 닿는다. 퇴고는 위도일손의 노동이다. 문장에서 하루에 하나씩 덜어내는 일, 그것이 글을 도에 가깝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초고를 쓴다는 것은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를 눈앞에 가져다 놓는 일과 같다. 그 안에는 정제되지 않은 감정, 과시적인 수식어, 불필요한 부사들이 뒤엉켜 있다. 작가는 미켈란젤로의 정을 들어야 한다. 문장의 뼈대를 흐리는 군더더기를 가차 없이 쳐내고, 단어가 품은 진짜 의미만을 남겨두는 작업이다.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Agony and Ecstasy(1965)'의 한 장면. 20세기 폭스


레이먼드 카버의 편집자로 유명한 고든 리시는 카버의 문장에서 살을 깎아내어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만들었다. 원고의 절반이 사라진 자리에서, 오히려 침묵이 말보다 크게 울렸다. 프랑스의 문호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외친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 하나의 사물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신념 역시 조각의 정신과 통한다. 글을 조각한다는 것은 문장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일이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를 향해 묵묵히 칼을 움직이는 침묵의 노동이다.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조각에서 형태를 점점 더 단순한 알로 환원시켰다. 새의 형상은 마침내 날개도 부리도 없는 매끈한 곡선 하나로 응축되었다. 그는 본질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버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도 같은 자리에 선다. 글에 쓰인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작가가 알고 있으나 쓰지 않은 칠분의 육이 수면 아래서 문장을 떠받친다. 보이지 않는 덜어냄이 보이는 문장의 무게를 결정한다.


하이데거는 진리를 알레테이아(aletheia), 곧 은폐되어 있던 것이 벗겨져 드러나는 사건이라 불렀다. 미켈란젤로가 돌의 표면을 벗겨 다비드를 드러낸 것처럼, 퇴고는 문장을 가리고 있던 거짓과 과잉을 벗겨 진실을 드러내는 알레테이아의 작업이다. 진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작가가 할 일은 다만 가리개를 걷어내는 일뿐이다.



깎아내며 채워지는, 글쓰기라는 조형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두 극단 사이의 중용(中庸)이라 했다. 넘침도 모자람도 아닌, 그 사이의 한 점이다. 소조가 넘침의 위험을 안고 있다면 조각은 모자람의 위험을 안고 있다. 너무 깎아낸 문장은 뼈만 남아 온기를 잃는다. 글쓰기의 중용은 미리 정해진 고정된 좌표가 아니다. 채움과 비움 사이를 끝없이 오가며, 매번 새로 찾아내야 하는 균형이다.


프랑스의 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형태의 상상력보다 물질의 상상력이 더 깊은 곳에서 작동한다고 말했다. 돌의 단단함, 점토의 무름, 이 물질적 저항과 순응이야말로 창조의 일차적 조건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언어는 물질이다. 단단한 관념어는 정으로 깎아야 하고, 무른 감정어는 손으로 빚어야 한다. 언어마다 다른 질감과 저항이 있다는 것을, 좋은 작가는 손끝으로 먼저 안다.


결국 좋은 글이란 조각과 소조라는 두 행위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완성되는 하나의 유기적 조형물이다. 우리는 로댕처럼 뜨거운 심장으로 백지 위에 생각을 덧붙여가며, 동시에 미켈란젤로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문장의 과잉을 깎아내야 한다. 소조 없는 조각은 깎아낼 재료가 없어 시작조차 할 수 없고, 조각 없는 소조는 거대한 진흙더미에 불과하여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위학과 위도, 더함과 덜어냄, 그 둘은 글쓰기라는 하나의 몸에 붙은 두 개의 팔이다.


러시아의 조형예술가 나움 가보와 그의 작품 Head No.2(1916). 위키 커먼스


러시아의 조각가 나움 가보는 "공간은 돌이나 진흙처럼 실재하는 재료다"라고 말했다. 작가에게는 침묵과 여백 역시 하나의 실재하는 재료다. 문장을 채워 넣는 소조의 순간과, 여백을 남기기 위해 문장을 지워내는 조각의 순간이 만날 때, 글은 비로소 단순한 텍스트를 넘어 영혼을 담는 그릇이 된다. 채움이 없으면 깎을 것이 없고, 깎음이 없으면 형상은 드러나지 않는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오늘도 우리는 모니터 앞에 앉아 보이지 않는 정과 망치를 든다. 때로는 점토를 쥔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인다. 정과 망치는 소리를 낸다. 돌가루가 날린다. 점토는 소리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두 소음과 두 침묵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한 줄의 문장을 완성하고 또 무너뜨린다. 완성과 무너짐의 반복, 그것이 글을 쓰는 자의 하루다.


더하고 덜어내는 두 손의 반복 속에서, 우리가 쓰고자 했던 단 하나의 진실이 서서히 그 실루엣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실루엣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다만 우리가 너무 늦게 보았을 뿐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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