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은 왜 만능키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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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시대의 검약성, 그 함정
- 단순함이라는 유혹, 복잡함이라는 진실
- 복잡성의 숲에 들어선 시대
세상은 복잡하다. 그런 세상에 여간 복잡한 인간이라는 개개인이 산다. 그렇기에 세상은 더욱 복잡하다.
그런데도 모든 일을 단칼에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복잡한 사안 앞에서 먼저 칼을 꺼낸다. 얽힌 실타래를 풀지 않고 잘라낸다. 맥락과 시간의 층위를 걷어내고, 인간의 모순과 흔들림을 군더더기처럼 도려낸다. 그리고 남은 토막을 들어 보이며 진실이라 부른다.
그들의 말은 명쾌하다. 명쾌함은 사람을 안심시킨다. 세상은 복잡한데 설명은 단순할수록 잘 팔린다. 한 줄 요약, 짧은 영상, 선악의 구도와 적대의 언어는 긴 사유보다 훨씬 빠르게 귀와 눈을 점령한다. 사람들은 이해했다고 믿고, 말하는 이는 통찰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계산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선택에는 그가 살아온 시간과 실패, 욕망과 두려움이 함께 묻어 있다. 슬롯도 그렇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역사, 제도와 감정이 서로 얽혀 움직인다. 원인을 하나로 단정하는 순간, 우리는 설명을 얻는 대신 현실을 잃는다.
자칭 지식인과 인플루언서들이 즐겨 서는 자리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들은 복잡함을 견디지 못한다. 아니, 견디게 해서는 안 된다. 복잡함은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확신은 상품이 되지만 질문은 상품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답을 준비한다. 아직 논쟁이 끝나지 않은 문제에도, 누구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안에도, 마치 정답 채점기처럼 점수를 매긴다. 세상은 그들의 입에서 언제나 쉽고 분명해진다.
그러나 쉬운 설명이 반드시 옳은 설명은 아니다. 때로는 가장 그럴듯한 단순함이 가장 위험한 오만이다. 그 칼의 이름은 흔히 '오컴의 면도날'이다.
면도날의 그림자, 단순함의 유혹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진실은 단순하다고.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말의 매혹을 사랑해 왔다. 단순함은 명쾌했고, 명쾌함은 아름다웠다. 오컴의 면도날도 그 믿음 위에서 태어났다. "필요 이상으로 존재를 상정하지 말라(Entities should not be multiplied beyond necessity)." 중세 신학 논쟁에서 나온 이 명제가 훗날 과학의 원리가 되리라고 누가 짐작했겠는가.
수도사 윌리엄 오컴이 남긴 문장은 중세 형이상학의 숲을 베어내고 근대의 명징한 정신으로 나아가는 도끼였다. 과학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효율의 이름으로 이 도구는 쉼 없이 사용되었다. 뉴턴은 우주의 운동을 몇 개의 수학 공식 안에 담았고, 데카르트는 세계를 기하학적 질서 속에 배열했다. 20세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가능한 명제만을 남기려 했다. 감정과 종교, 윤리의 언어는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주변부로 밀려났다. 단순함은 진실의 형식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면도날에는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절제를 위한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상실을 남기는 칼날이다. 간결함은 혼란을 정리하지만, 설명되지 않은 것들을 침묵 속으로 밀어 넣는다.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려다 아직 이해되지 않은 것들까지 함께 지워버리는 역설, 그것이 면도날의 그림자다.
20세기 철학은 그 칼날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칼 포퍼는 단순함 자체를 과학의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의 우아함이 아니라 반증 가능성이었다. 아무리 간결한 설명이라도 현실과 맞부딪혀 시험받지 못한다면 과학이라 부를 수 없었다. 포퍼가 요구한 것은 경제성이 아니라 개방성이었다. 완결된 체계보다 반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취약함이었다.
토머스 쿤은 과학사를 하나의 직선으로 보지 않았다. 과학은 면도날로 다듬어진 진보의 행렬이 아니라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 교체되는 불연속의 역사였다. 단순성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었다. 특정 시대의 과학 공동체가 공유한 취향과 기대, 훈련의 결과였다. 가장 급진적인 목소리는 폴 파이어아벤트에게서 나왔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Anything goes)." 그의 눈에 면도날은 논리의 도구라기보다 학문 공동체가 불편한 이론을 배제하는 장치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오컴의 명령은 진리를 향한 길인가. 아니면 허용된 앎의 경계를 긋는 통제의 기술인가. 불필요한 존재자를 제거하라는 명령은 너무 쉽게 불편한 존재자를 배제하는 논리로 바뀐다. 간명함이라는 이름 아래 세계의 주름은 펴지고, 설명하기 어려운 삶의 결은 삭제된다.
세계는 언제나 설명보다 넓다. 진실은 때로 단순할 수 있어도 현실은 좀처럼 단순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예리한 면도날이 아닐지 모른다. 복잡함을 견디는 인내다. 잘려 나간 자리의 침묵에 귀 기울이는 겸손이다.
칼날과 알고리즘, 지워지는 것들의 목록
오늘날 오컴의 검약성(儉約性) 원리는 철학자의 서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알고리즘 설계자의 코드 안에, 데이터 과학자의 모델 선택 기준 안에, AI 윤리학자의 지침 안에 스며들어 있다. 복잡한 모델은 비용이 크고 해석은 어렵고 판단은 느리다. 그래서 우리는 더 빠르고 더 명료한 체계를 원한다. 이 시대의 칼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코드 속에 숨어 있고, 데이터의 형식으로 작동한다.
자연어처리 모델은 가능한 한 효율적인 구조를 지향한다. 간결함이 학습과 추론의 속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무엇이 사라지는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언어는 본래 맥락적이고 다의적이다. 모순과 여백, 침묵과 암시까지 품고 있다. 그것은 언어의 결이며 인간성의 흔적이다. 지나친 정제는 정확함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단절의 학습일 수 있다.
더 위험한 장면은 예측 기반 AI가 현실의 의사결정에 개입할 때 나타난다. 범죄 예측 알고리즘 PredPol은 과거의 범죄 데이터를 바탕으로 특정 지역과 인물의 범죄 가능성을 계산한다. 수치만 보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 계산은 과거의 편향을 현재에 옮겨 적는 일에 가깝다. 가난한 지역, 소수 인종, 젊은 남성은 이미 편향된 기록 속에서 다시 위험한 존재로 분류된다. 기계는 중립을 가장하지만 데이터에 새겨진 오래된 그림자를 반복한다. 면도날은 이제 사람을 향한다.
IBM의 Watson은 의료 영역에서 놀라운 효율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효율은 단순화를 요구한다. 생물학적 조건과 슬롯적 환경, 심리적 상태가 뒤엉킨 인간의 삶은 표준화된 데이터로 환원되기 어렵다. 기계는 빠르게 계산하지만 생명은 느리게 흔들린다. 생명은 예외로 이루어져 있다. 그 예외를 품지 못하는 시스템은 환자의 가능성을 확률로 축소하고, 때로는 치료의 우선순위 밖으로 밀어낸다.
AI 시스템의 단순화는 종종 설명 가능성(explainability)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 요구는 중요하다. 그러나 설명 가능성이 인간 경험의 복잡함을 삭제하는 명분이 될 때 문제가 시작된다. 감정의 흔들림과 삶의 사정, 구조적 폭력의 맥락은 계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주변부로 밀려난다. 인간성은 해석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시스템 밖에 남겨진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중립적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기술은 언제나 선택의 결과다. 선택은 배제를 낳는다. 복잡함을 제거하려는 의지는 불편함을 제거하려는 욕망과 닮아 있다. 갈등은 숨겨지고, 차이는 지워지며, 정상으로 간주되는 것들만 중심에 남는다. 예측은 기술일 수 있다. 그러나 선별은 정치다.
복잡함의 편에 서기 위하여
복잡성을 경시하는 검약성의 원리는 더 이상 우리 시대의 해답이 되기 어렵다. 파이어아벤트가 외친 "방법에 반대한다"는 선언은 오늘 더욱 무겁게 들린다. 하나의 방법론, 하나의 기준, 하나의 설명을 향한 집착은 이제 의심받아야 한다. AI가 인간 삶의 결정적 국면에 개입하는 시대라면 더욱 그렇다.
의료와 치안, 금융과 교육은 숫자로만 환원될 수 없는 영역이다. 환자의 병력과 삶의 이력, 슬롯적 약자가 짊어진 현실의 무게는 하나의 변수로 정리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다층적 이해다. 그것은 모델의 비가시성에서 오지 않는다. 드러난 복잡함을 인간이 함께 해석하고 숙고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설명 가능성만이 아니다. 때로는 설명할 수 없음을 견디는 힘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인정하는 태도다. 인간은 본래 완결된 존재가 아니다. 불완전함과 애매함 속에서 살아간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철학적 겸손이며 윤리적 바카라임이다.
오늘날 한국 슬롯의 풍경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문학이 변두리로 밀려나고 인문학이 취향이나 장식으로 소비된다. 문학은 본래 불편한 질문을 품는다. 인물의 모순과 시대의 균열,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잔해를 끌어안는다.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정답을 주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 쉽게 정답이라 불리는 것들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내려야 할 진정한 오컴의 면도날은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어야 한다. 검약성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하나의 도구다. 문제는 그 도구를 쥔 손이다.
진실은 명쾌한 직선으로 오지 않는다. 모호하고 중첩되며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비로소 형체를 드러낸다. 복잡성은 현실의 속성이다. 단순성은 해석의 전략이다. 전략은 유용할 수 있으나 현실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인간과 AI의 공존은 복잡성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다. 끌어안는 일이다. 우리가 진실이라 부르는 것은 결국 그 복잡성의 깊은 곳에서 어렵게 모습을 드러낸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