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하고 다섯에 바라보는 마흔에게
- 금요일, 완성 직전의 시간
- 반사광의 계절, 금요일이 도착하는 방식
- 마흔이라는 착각, 자기애라는 고독한 사랑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21
금요일은 묘한 요일이다.
영어로 Friday. 북유럽 신화의 여신 프리그(Frigg) 또는 프레이야(Freyja)의 이름에서 왔다. 사랑과 풍요, 결혼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독일어로는 Freitag. 라틴어 계열 언어에서는 Venus의 날, 곧 금성(金星)과 비너스의 요일이다. 프랑스어 vendredi, 스페인어 viernes, 이탈리아어 venerdì가 모두 그 계통에 속한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金曜日, 금(金)의 요일이다. 오행(五行)에서 금은 결실을 뜻한다. 서쪽을 가리키고, 계절로는 가을에 해당한다. 수확과 마무리의 기운이다.
어느 언어로 부르든 금요일에는 사랑과 완성의 기색이 스며 있다. 한 주의 끝이면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날. 무언가를 정리하지만 쉬지는 못하는 날. 그 어정쩡한 자리가 묘하게 인간적이다.
[뜻밖의 금요일]은 그런 날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싣는다. 정치와 경제, 슬롯의 소음이 한 주 내내 귀를 채웠다면 금요일 오후만큼은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수치 너머의 사람, 사건 뒤편의 마음, 뉴스 바깥의 내면. 이 코너는 그 자리를 마련하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출발했다.
오늘은 마흔에 대한 이야기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마흔이었던 나에 대한 이야기다.
금요일, 완성의 착각
마흔 즈음에는 묘한 도취가 찾아온다. 긴 어둠을 지나 빛 속으로 걸어 나온 듯한 감각이다. 살아온 날들이 앞으로 남은 날들보다 많아졌다고 느끼는 시기. 군대식으로 말하면 '꺾인 짬밥'의 시간이다. 그 경계에서 사람은 경험을 통찰로 착각하기 쉽다.
마흔이 되면 세상이 보이는 듯하다. 젊음의 어리석음을 넘어섰다는 말도 쉽게 입에 오른다. "마흔까지 살아보니 젊음이란 이렇더라." 그런 말들은 어느새 인생 전체를 규정하고 품평한다. 경험의 결은 통찰의 언어로 바뀌고, 모호함은 지워진다. 삶은 마치 완결된 교훈처럼 봉합된다.
그러나 인간은 지구상 어떤 종보다 오랫동안 미성숙 속에 머무는 존재다. 반려견은 두 살이면 성체가 되어 제 삶을 살아가지만, 인간은 스무 해가 지나도 자아의 미발현 주변을 맴돈다. 성장의 완결이란 애초에 허상에 가깝다. 기대수명은 길어졌고, 자본의 격차는 독립의 시점을 뒤로 밀어냈다. 성숙은 과거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다.
그런데도 마흔 언저리에는 세상의 이치를 다 헤아린 듯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십여 년 전, 세상과 자신을 동시에 깨달은 듯한 허세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조급함이었다. 통찰이 아니라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미완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 완성된 척했던 나날들. 마흔이라는 숫자가 준 착각은 삶의 중턱이 아니라 또 다른 유년기의 문턱이었는지도 모른다.
전문적 글쓰기에서는 화자의 흔적이 지워진다. 논리와 논거가 전면에 서고, 필자의 삶은 뒤로 물러난다. 글쓴이가 아니라 문장이 남고, 말하는 주체보다 사유가 오래 남는다. 반면 자기중심의 이야기는 훨씬 노골적인 질감을 지닌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유형이 있다. '등장인물 가득한 일상의 나열'이다. 그런 글에서 타인은 늘 수식어와 함께 등장한다. "유명한", "성공한", "평가받는", "한 자리하는" 사람들. 화려한 이름들을 걷어내고 나면 글에 남는 것은 많지 않다.
내가 마흔이던 시절, 나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이 그 병에 깊이 빠져 있었다. 명함의 무게와 잔고의 숫자가 자존감의 단위가 되던 때였다. 친구의 개업식에서 그가 우리를 소개하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은사와 업계 인사들을 거쳐 초등학교 친구인 우리에게까지 수식어가 붙었다. "서울대 법대 출신 변호사", "의대 나온 성형외과 원장", "대기업 임원." 어느 이름에도 '친구'라는 말은 없었다.
그때 느꼈던 묘한 감정은 오래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와 돌아보면 나 역시 그 소개를 못마땅해하면서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 빛이 내게까지 비치는 듯한 착각. 내가 속한 이름과 직바카라으로 존재를 부풀리던 시절. 저물어가던 선배들을 향해 은근한 연민과 우월감을 품었던 기억. 잠깐의 반짝임을 전능함으로 오해했던 그 시절의 나.
금요일, 거울 속의 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모두 자기애(自己愛)의 다른 얼굴이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관계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는 욕망. 그 욕망이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변명하고 싶지만,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 반사광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자기애라는 말에는 미묘한 함정이 있다. 겉으로는 자존감의 다른 이름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스스로를 둘러싼 환상의 막이 얇게 드리워져 있다. 오토 컨버그(Otto Kernberg)가 말했듯, 자기애적 인격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에 둔다. 스스로를 과도하게 확장된 존재로 느끼고, 타인의 찬사를 갈망한다. 그 모순된 욕망 속에서 완벽함을 믿고 싶어 하며, 그 믿음이 흔들릴 때 분노와 절망 사이를 오간다. 의기양양함에서 실망과 우울, 그리고 '자기애적 격노'(narcissistic rage)라 불리는 파괴적 분노에 이르는 감정의 스펙트럼. 그것이 병리적 자기애의 강도다.
이 성향은 종종 헌신과 희생의 얼굴을 쓴다. 사랑의 이름으로, 돌봄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다가가지만 시선의 초점은 끝내 자신에게 머문다. 내가 얼마나 베푸는 사람인지, 얼마나 순수하게 헌신하는지, 그것을 통해 얼마나 특별한 존재가 되는지가 중요해진다. 그래서 자기애적 사랑은 가장 위험한 형태의 사랑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언어를 빌려 자기 자신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내 선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 거울에 금이 가는 순간 사랑은 곧장 분노로 변한다. 결국 자기애는 타자를 향한 시선으로 가장한 자기 응시이며, 헌신의 얼굴을 한 자기 도취다. 그것은 사랑의 탈을 쓴 고독이다. 타인에게 닿는 듯하지만 끝내 닿지 못하는 손. 그 손끝에 남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나'의 흔적이다.
사랑과 존중, 헌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애는 결국 자신을 증명하려는 몸짓이었다. 허상의 열기가 식고 난 뒤 남은 것은 부끄럽지만 한결 선명해진 자화상 한 장뿐이었다.
금요일, 거울의 끝에서
정신분석학에서 자기애는 단순히 자신을 사랑하는 성향이 아니다. 자기를 유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구조에 가깝다. 프로이트는 「자기애 서설」(1914)에서 자기애를 자기보존적 본능과 성적 본능이 만나는 지점으로 설명했다. 인간의 자아는 타인과의 동일시를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자기애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정신적 거울이다. 그러나 그 거울이 지나치게 자신 쪽으로 기울어질 때, 타인은 내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의 설명은 더욱 섬세하다. 자기애적 인격은 근본적으로 '자기대상'(selfobject)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자기대상은 유년기의 자아가 자신을 비추어 세우는 대상이다. 충분한 공감과 반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성인이 된 뒤에도 그 결핍을 타인을 통해 보상하려 한다. 이때 상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결핍을 메워줄 거울이 된다. 그러나 타인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현실 또한 깨진 거울처럼 자신을 비춘다. 여기서 자기애는 사랑으로 가장된 결핍의 순환을 낳는다. 사랑은 타자를 향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결핍된 자기를 수선하려는 무의식의 의례에 가깝다.
이 구조는 자아의 안정과 관계의 불안을 함께 품는다. 자기보존을 위한 방어체계인 동시에, 진정한 만남을 가로막는 투명한 벽이다. 문제의 핵심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맞닿아 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타인을 통해 '나'를 유지하려는 욕망. 그래서 자기애는 사랑의 실패라기보다 사랑을 통해 자기 구조를 지키려는 마지막 저항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에게 도달한다. 자기애가 위험한 이유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타인을 통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미숙한 사랑을 지나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랑에도 닿을 수 없다. 모든 사랑은 처음에 자기애에서 출발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내가 너를 통해 나를 완성하고 싶다"는 욕망이 숨어 있다. 그 욕망을 자각하는 순간, 사랑은 비로소 타자를 향한 길 위에 선다.
SNS의 언어는 고백의 형식을 띤다. 그러나 그 안에서 타인은 대개 조연에 머문다. "나는 느꼈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사랑했다." 이 고백들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하지만, 실은 거울을 향한 독백에 가깝다. 반사된 빛은 늘 왜곡된다. 자기애의 구조가 그러하듯, 타자를 향한 시선은 끝내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금요일, 부끄러움의 나이
인간의 성숙은 시간의 누적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결핍의 자각에서 시작된다. 나이만큼 쌓이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상처의 결이다. 그 결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성숙의 깊이를 가른다.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에 가깝다. 안다는 것은 아는 척을 멈추는 일이다.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설파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다.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함을 품는 일이다. 완결된 문장보다 미완의 침묵을 견디는 능력. 거기서 나이의 무게가 생긴다. 젊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대어 있다면, 마흔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착각에 머문다. 노년은 비로소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는 자리로 나아간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타자에게 닿는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하나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그 상징에 기대어 세상을 재단하고 타인을 가르치려 했던 시절의 나. 이제 쉰을 넘어 그 시간을 돌아보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은 작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직시하는 행위이며, 타인의 얼굴을 처음으로 또렷하게 바라보는 순간이다.
마흔의 허세는 부끄러운 과오라기보다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거쳐 가는 통과의례에 가깝다. 그 시절의 자기애가 없었다면 지금의 성찰도 없었을 것이다. 미숙했던 날들이 있었기에 성숙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됐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늦게 깨닫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진실하게 부끄러워할 수 있느냐다.
마흔이라는 경계에서 내가 배운 것은 사랑과 자기애가 단절된 두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둘은 서로를 통과하며 순환한다. 자기애를 부정한다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그림자를 끝까지 직면할 때 비로소 타인의 얼굴이 보인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지나야만 타자에게 닿는다. 그것은 인간의 구조적 비극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이다.
삶은 언제나 미완으로 남는다. 완성은 신에게나 허락된 일이다. 인간은 끝내 부서지며 배워가는 존재다. 마흔이든 쉰이든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그 사랑을 타인에게 건네는 법을 익힌다. 그 배움이 곧 인간의 시간이다.
자기애는 버려야 할 결함이 아니다.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첫 번째 벽이다. 그 벽을 지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말할 수 있다.
금요일이 또 온다.
사랑의 여신이 이름을 빌려준 그 날. 한 주의 끝이면서도 끝이 아닌 날. 나는 그 어정쩡한 시간에 이 부끄러운 자화상을 꺼내놓는다. 마흔의 당신에게, 지금의 내가 말한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의 절반은 아직 모르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