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라는 베스트셀러, 증오라는 스테디셀러
- 마음의 서가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름들
- 혐오는 '표지', 증오는 반복된 '서사'
- 문학의 쓸모, 응시와 연민의 문장
- 청룡기 고교야구 혐오 응원 논란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82
베스트셀러는 계절을 탄다. 잠시 팔리고, 잠시 화제가 된다. 계절이 바뀌면 매대에서 밀려난다. 스테디셀러는 다르다. 서가 한쪽에 오래 꽂혀 있다. 해마다 누군가의 손에 다시 뽑혀 나온다. 유행을 좇지 않는다. 오히려 유행을 낳는다. 광고가 없어도 팔린다.
지금 우리의 감정에도 그런 두 권의 바카라이 있다. 혐오는 베스트셀러다. 오늘 태어나 내일 다른 화제에 밀려난다. 증오는 스테디셀러다. 절판되지 않는다. 서점이 바뀌고 매대가 바뀌어도 늘 같은 자리에 꽂혀 있다.
최근 청룡기 고교야구대회에서 배재고등학교 응원단은 광주제일고등학교를 향해 "가야지 가야지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 데이"를 외쳤다. 얼마 전 한 기업의 마케팅에서 슬롯적 공분을 샀던 5·18 희화화 논란의 멸칭이, 고교 야구장이라는 공적 공간으로 그대로 옮겨왔다. 청춘의 낭만이 머물러야 할 자리가 역사의 죽음을 조롱하는 놀이터가 되었다. 이것이 이번 계절의 베스트셀러다. 신간처럼 화제를 모으고, 다른 사건이 오면 잊힐 것이다.
그러나 이 신간의 출처를 묻는다면, 서가 깊은 곳에서 오래 살아남은 스테디셀러 한 권이 모습을 드러낸다. <PD수첩> 1511회(2026년 6월 16일 방영)는 "일베 이즈 백"이라는 부제로, 과거 특정 커뮤니티의 전유물이던 극단적 혐오가 어떻게 새 얼굴로 돌아왔는지를 추적했다. 과거의 일베가 익명의 장막 뒤에 숨어 있었다면, 오늘의 10대에게 그것은 유튜브와 숏폼, 릴스를 타고 퍼지는 유머가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일을 비하하는 '중력절', 참사 희생자를 빗댄 '호떡절' 같은 말이 교실을 떠돈다. 죄의식은 사라지고 웃음만 남았다. 신간은 오래된 원고를 다시 찍어낸 재판본이었다.
문명이 쌓아 올린 인간 존엄의 예의와 역사 앞의 성찰이, 재미라는 한마디 앞에서 허물어진다. 혐오를 만들고 소비하는 일이 또래 집단 안에서 권력이 된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 슬롯의 윤리적 방어선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죄를 짓는다는 자각 없이 죄를 배운다. 그 배움의 교재는 오래 절판되지 않았다. 증오는 늘 가장 오래 살아남는 스테디셀러였다.
표지와 서사 사이
혐오라는 글자를 들여다보면 비린내가 먼저 올라온다. 싫어할 혐(嫌), 미워할 오(惡). 그 뿌리는 도덕보다 육체에 가깝다. 썩은 것 앞에서 몸이 먼저 물러서는 감각, 라틴어 디스구스투스(disgustus, 구토)가 가리키던 거부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혐오를 자아의 경계가 흔들릴 때 일어나는 감정이라 말했다.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불안이 혐오를 낳는다. 혐오는 표지와 닮았다. 자극적이고 즉각적이다. 눈길을 붙잡도록 만들어진다. 배재고의 구호도, 교실의 '중력절'도 그 표지 위에 웃음을 인쇄한 문장이었다.
증오는 다르다. 증오(憎惡)는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품는다. 증오가 대상을 끝까지 응시하며 칼을 가는 감정이라면, 혐오는 대상을 불결한 것으로 몰아세우고 등을 돌리는 몸짓이다. 증오에는 뜨거운 열기가 있다. 적과 나를 또렷이 가른다. 혐오는 차갑다. 끈적한 냉소로 먼저 인간의 존엄을 허문다.
그러나 그 온도 차는 오래가지 않는다. 벌레라 부르고 오물이라 부르던 혐오의 말은, 저 불결한 것을 세상에서 치워야 한다는 증오의 의지로 자란다. 밀어내던 손은 어느새 겨누는 손이 된다. 혐오는 증오로 건너가는 가장 정교한 징검다리다. 표지가 사람을 매대 앞으로 불러 세우면, 본문은 그 사람을 오래 붙잡아 둔다. 베스트셀러의 자극이 사라질 무렵, 독자는 이미 스테디셀러의 첫 장을 넘기고 있다.
르네 지라르는 이 이행의 문법을 오래전에 읽어냈다. 공동체가 갈등으로 흔들릴 때, 서로를 향하던 증오는 힘없는 개인과 소수 집단으로 방향을 바꾼다. 공동체는 희생양에게 죄를 떠넘기고 잠시 평화를 얻는다. 그러나 위기는 다시 찾아온다. 그때마다 새로운 희생양이 필요하다. 증오는 늘 다른 표지를 달고 같은 이야기를 다시 찍어낸다. 스테디셀러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바뀌는 것은 표지뿐이다. 본문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폐허 위의 깃발
가자지구의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와 그 사이를 적신 핏자국은 오래된 서사의 끝이 어디에 닿는지를 보여준다. 혐오는 사람을 인간의 자리에서 밀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치워야 할 대상으로 바꾼다. 장벽을 세우고 봉쇄를 이어가는 폭력은 영토만 둘러싼 분쟁이 아니다. 상대의 실존을 지우려는 의지다. 가자라는 거대한 수용소 안에 타자를 가두려는 문명화된 야만이다.
혐오는 법과 제도의 옷을 입는다. 그 옷은 폭압에 합법이라는 이름을 입혀준다. 서가에서 이 바카라은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개정판만 거듭 나온다. 표지는 새로운 뉴스로 갈아 끼우지만, 본문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는다.
그 오래된 서사를 흔든 것은 뜻밖에도 초록빛 잔디 위의 몸짓이었다. FC 바르셀로나의 라민 야말이 우승의 환호 속에서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었을 때, 그 펄럭임은 한 국가를 향한 연대를 넘어 증오의 사슬을 끊으려는 몸짓이었다. 모로코와 적도기니의 피를 이어받아 이민자의 경계에서 자란 소년은, 혐오가 사람을 규정하고 밀어내는 방식을 누구보다 먼저 몸으로 배웠을지 모른다. 그가 높이 들어 올린 네 빛깔의 깃발은 폭격 아래 찢겨 나가는 동시대 타자의 고통을 경기장 한가운데로 불러들이는 조용한 제의였다.
축구공이 구르는 잔디는 국경과 인종의 경계가 잠시 멈추는 땅이다. 그 위에서 흔들린 천 조각 하나는 말보다 오래 남았다. 아무리 견고한 증오의 성벽도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인간의 연민까지는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가장 잘 팔리는 서사 곁에서, 한 소년은 말없이 반품을 요구하는 깃발을 들어 올렸다.
웃음이 향하는 곳
이 반품의 몸짓이 드물다는 사실이 지금의 유통망을 말해준다. 대부분의 독자는 진열대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손에 닿는 바카라을 그대로 집어 든다. 조롱은 혐오와 증오를 가장 빠르고 값싸게 실어 나르는 물류다. 조롱할 조(嘲)는 입과 아침이 만난 글자다. 재잘거리는 입술의 경멸을 뜻한다. 희롱할 롱(弄)은 두 손으로 옥을 받들고 노는 모습이다. 사람을 인격이 아니라 장난감으로 다루는 뜻을 품고 있다.
그러나 조롱이 처음부터 이런 얼굴이었던 것은 아니다. 「봉산탈춤」에서 말뚝이가 양반을 조롱할 때, 그 웃음은 권력을 흔드는 가장 낮은 자의 무기였다. 미하일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적 세계관도 거기에 있다. 높은 것을 낮추고, 굳은 권위를 뒤집는 웃음이었다. 웃음에는 본래 방향이 있었다. 언제나 위를 향했다.
해학과 풍자는 조롱과 다르다. 해학은 삶의 균열 앞에서 끝내 사람다움을 놓지 않으려는 힘이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민초들이 비극 속에서도 농담을 잃지 않는 까닭이 그렇다.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반지하 가족이 계단의 높이를 웃음으로 견디는 장면도 그렇다. 그 웃음은 누구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함께 아파한다.
풍자 또한 방향이 분명하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소인국의 전쟁 놀음을 그렸을 때, 화살은 정치의 허영을 겨눴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기계에 삼켜지는 노동자의 우스꽝스러움도 자본주의 체제를 향한 고발이었다.
카메라는 언제나 구조를 응시했다. 조롱은 다르다. 대상을 낮추는 일 자체가 목적이다. 강자가 약자를 향해 웃고, 다수가 소수를 향해 웃을 때, 그 웃음을 해학이나 풍자라 부르는 순간 언어는 폭력을 감춘다.
지금의 웃음은 방향을 잃었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에서 아서 플렉은 세상의 조롱 속에서 무너진다. 끝내 자신을 조롱하던 세상을 향해 같은 웃음을 되돌려준다. 그 웃음은 해방이 아니다. 공감을 잃은 영혼의 비명이다. 풍자는 권력을 향해야 한다. 그 돌이 아래를 향하는 순간, 풍자는 끝나고 폭력이 시작된다.
정치 유튜브는 상대 진영의 실수를 낄낄거리며 반복 재생한다. 예능은 누군가를 '당하는 역할'에 묶어 두고 그 웃음을 친근함이라 부른다. 내 편의 허물에는 맥락을 보태고, 남의 허물에는 조롱을 얹는다. 그 이중의 잣대가 조롱을 풍자로 둔갑시킨다. 그렇게 아래를 향해 던져진 돌은 차곡차곡 쌓여 다음 계절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 진열 방식은 정치 콘텐츠에서 더욱 선명하다. 진보 진영의 양대 유튜브 채널은 스스로를 권력 감시자라 말한다. 그러나 그 웃음의 중심에는 상대 진영의 실바카라을 두고 터뜨리는 박장대소와 편집된 장면의 반복이 놓여 있다. 풍자는 구조를 겨눈다. 조롱은 얼굴을 겨눈다. 지지자들은 그 웃음을 정의의 확인처럼 소비한다.
레거시 예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국민 MC라 불린 진행자의 방식에도 특정 출연자를 '당하는 사람'으로 굳히는 문법이 스며 있다. 그것은 친근함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용인되었다. 그동안 누가 웃음을 만들고, 누가 웃음의 재료가 되었는지를 묻는 목소리는 드물었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일이 어떻게 공감을 마비시키는지 물었다. 조롱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콘텐츠가 되어 반복될 때, 만든 사람의 선의는 결과를 면제하지 못한다. 좋은 사람도 나쁜 구조를 작동시킬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신화라 불렀다. 오래 사랑받은 얼굴과 오래 신뢰받은 이름은 어느새 자연이 된다. 비평조차 금기가 된다. 그러나 신화는 깨질 때 비로소 생각이 시작된다. 불편함은 비평을 멈추라는 신호가 아니다. 다시 묻고 다시 읽으라는 신호다. 서가 앞에서 우리가 멈춰 서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아직 남아 있는 서가
베스트셀러는 계절이 지나면 잊힌다. 그러나 스테디셀러는 해마다 다시 서가에서 꺼내 읽힌다. 무서운 것은 그 오래됨이다. 배재고의 구호도, 일베의 유행어도 언젠가는 화제를 잃고 매대에서 내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기대고 선 이야기는 남는다. 사람을 불결한 것으로 규정하고, 끝내 지워야 할 적으로 세우는 서사는 좀처럼 절판되지 않는다. 표지만 갈아입은 채 다음 세대의 손으로 다시 건너간다.
비평이 이 이름들을 부를 때, 어떤 사람은 먼저 불편함을 말한다. 왜 하필 그 사람인가. 더 나쁜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시대 감정의 구조를 보여준다.
비평은 공격이 아니다. 생각을 멈춘 자리를 다시 열어 보려는 일이다. 그런데 비평을 곧장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특정한 이름들을 비판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왔는지를 스스로 드러낸다. 서가 앞에서 느끼는 그 불편함을 견디는 일이 문화의 깊이를 가른다. 조롱이 타인을 소비하는 언어라면, 비평을 막으려는 충동은 생각을 소비의 바깥으로 끌어내지 못하게 하는 힘이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크지 않다. 다만 그 서가에 다른 바카라 한 권을 조용히 꽂아 두는 일이다. 오래 바라보는 문장, 연민을 잃지 않는 문장. 웃음이 사람을 베는 칼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온기가 되는 문장이다. 그런 바카라은 대개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한다. 화제를 만들지도 못하고, 순위표를 오르내리지도 못한다. 그러나 누군가 그 바카라을 조용히 꺼내 드는 순간, 오래 팔려 온 증오의 서사도 조금은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절판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한 사람이 다른 바카라을 집어 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서가는 아직 넓다.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과, 아직 읽히지 않은 연민을 위해 비워 둔 자리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