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여 따르라, 오월의 푸른 경계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의 정치미학

by박 스테파노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059

- 금지된 노래, 살아남은 목소리
- 사랑받고 혐오받은 네 마디
- 오월, 성모성월과 헤일메리


푸르름이 짙어가는 창밖 풍경에 자꾸만 시선이 머문다.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길을 바라보던 어느 날처럼, 오늘의 빛은 유난히 환하다.


봄꽃은 이미 지나갔다. 향기까지 남김없이 거두어간 자리마다 초록 잎들이 번져 있다. 잎사귀들은 서로 앞서려는 듯 가지 끝마다 몸을 펼친다. 손바닥 하나가 허공을 밀어 올리듯, 힘차고도 싱그럽다.


문득, 참 오래 기다려온 계절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아마 어느 해의 봄을 통째로 흘려보낸 탓일지도 모른다. 봄과 여름 사이, 이 짧고 푸른 시간을 나는 오래 그리워해왔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다림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 동안 마음과 몸속에는 오래 어지러운 바람이 지나갔다. 그 흔들림 속에서는 창밖 한 번 천천히 바라볼 틈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1980년 5월24일 계엄군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 모인 광주시민들. 5·18조사위



오월의 몸, 가장 약한 자를 향한 기도


오월은 눈부시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햇빛이 짙을수록 그늘은 더 깊어진다. 오월의 아름다움은 그 아래 묻힌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연둣빛 잎사귀가 빛을 받아 투명해지는 계절,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가정의 달이라는 다정한 이름 아래, 어버이날의 카네이션 아래, 어린이날의 풍선 아래 — 한국의 오월은 오래된 피의 기억을 품고 있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썼다. 언어는 칼이 닿지 않는 곳까지 닿는다고. 그러나 오월의 어떤 말들은 칼날보다 먼저 죽어 있었다. 광주의 거리, 총성이 새벽을 찢던 그날에 말은 이미 봉쇄되었다. 계엄군의 장갑차가 금남로를 누비던 1980년 5월, 방송은 침묵했고 신문은 거짓을 실었으며 도시는 섬이 되었다. 한반도의 한 귀퉁이에서 시민들이 죽어갔고, 대한민국의 나머지는 그것을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역사는 달력 위에서 잔인하게 되풀이된다. 4월 혁명의 함성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5월은 또 다른 군홧발을 불러들였다. 그 발자국은 꽃 위를 지나갔다. 1960년 4월, 이승만 독재에 맞서 거리로 나온 학생들의 피가 봄비처럼 스며들었다. 그리고 20년 뒤 5월, 전두환 신군부는 탱크를 앞세워 다시 꽃의 계절을 피의 계절로 바꾸었다. 한국 현대사는 유난히 봄에 많은 것을 잃었다. 봄은 희망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희망이 있는 자리에서만 절망은 완성된다.


2014년 4월, 세월호는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오월이 되도록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하늘은 여전히 눈부셨고 바다는 잠잠했다. 정부의 말은 더디고 적었다. 봄의 잔인함은 바로 그 무심한 아름다움에 있다. 세상이 무너지는 날에도 벚꽃은 핀다. 그리고 진다.


가톨릭은 오월을 성모성월이라 부른다. 마리아의 달. 그러나 마리아가 누구였는지를 떠올리면, 이 명명은 단순한 종교적 의례를 넘어선다. 그 안에는 오래된 역설이 있다.


마리아는 권력의 중심에 선 인물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변방, 팔레스티나의 작은 마을 나자렛 출신의 가난한 여성이었다. 동정 수태는 그녀를 당대의 질서 바깥으로 밀어냈다. 남편 없이 잉태한 여자. 당시의 율법 아래서 그것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혐의였다. 메시아의 어머니는 이처럼 체제의 중심이 아니라 의심과 불안의 그늘 속에서 역사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아들은 사랑받다가 미움받았고, 환호받다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어머니는 그 십자가 아래 끝내 남아 있었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한 장면. 소니 픽쳐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이 오래된 기도문의 이름을 빌려온다. 경기 종료 직전, 승산 없는 상황에서 적진을 향해 공을 던지는 절박한 투사(投射). 헤일 메리. 그것은 기적을 향한 간구다. 인간이 계산을 내려놓고 절박함 하나로 내던지는 마지막 시도다.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일 또한 그러했다. 하느님이 너무 멀거나 너무 두려울 때, 사람들은 그 아들의 어머니에게 먼저 갔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낸 여인, 상실과 고통의 언어를 아는 어머니에게.


오월의 한국에서 간구의 대상은 언제나 약자였다. 죽은 자들, 침묵을 강요당한 자들, 이름조차 온전히 불리지 못한 이들. 광주의 주검들 앞에서 사람들은 기도했다. 세월호 가족들 곁에서 사람들은 무릎을 꿇었다. 권력을 향해서가 아니라 희생된 자들을 향해서였다. 마치 마리아에게 헤일 메리를 외치듯, 이길 수 없는 경기와 이미 끝난 듯한 국면 속에서도 마지막 공을 던지듯.


약자에게 기도하는 일은 패배의 징표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를 가장 정직하게 바라본 끝에 도달하는 인식이다. 역사의 진실은 언제나 강자의 기록 속보다 약자의 몸에 더 깊이 새겨진다. 상처는 기억이다. 흉터는 역사다. 그리고 오월은, 그 몸의 기억을 잊지 말라고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온다.



죽은 자들의 결혼식과 산자들의 행진곡


1980년 12월, 백기완은 서대문구치소 독방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었다.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구속된 뒤였다. 그의 손에는 종이도 펜도 없었다. 그는 입으로 시를 지었고, 잊지 않기 위해 주문처럼 되뇌었다. 몸은 갇혀 있었으나 언어만은 벽을 넘어갔다. 그렇게 태어난 시가 〈묏비나리 —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었다.


그 언어 속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었다. 투쟁과 애도, 짓밟힌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의 숨결이 있었다. 고문의 기억과 분노와 슬픔이 서로 엉겨 리듬이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시작되었다.


1981년, 소설가 황석영과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음악인 김종률, 그리고 광주 지역 노래패 열다섯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이 만들려 했던 것은 노래극이었다. 제목은 〈넋풀이 — 빛의 결혼식〉.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라남도 도청을 끝까지 지키다 계엄군 총탄에 쓰러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그리고 1978년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노동운동가 박기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위한 헌정이었다.


살아서 맺지 못한 인연을 죽음 이후에라도 이어주려는 의식(儀式). 그 의식을 위해서는 노래가 필요했다.


1981년 김종률이 쓴 〈님을 위한 행진曲〉의 악보.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김종률은 황석영의 광주 자택에서 곡을 썼다. 가사는 백기완의 시에서 가져왔고, 황석영이 다시 다듬었다. 그렇게 노래극의 마지막 합창으로 탄생한 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이 노래는 본래 결혼 행진곡이었다. 그러나 그 결혼식의 주인공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죽은 이들의 혼을 이어주는 노래. 그것은 엄혹한 시대에 스러진 꽃들을 위한 애도였고, 끝내 꺼지지 않는 축복이었다.


노래는 악보 없이 번져나갔다. 군사정권 아래에서 유포와 가창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곡을 전했다. 카세트테이프는 복사본 위에 또 다른 복사본을 남겼다. 그 과정에서 가사와 가락은 조금씩 달라졌다. 기억이 전해질 때마다 미세하게 변형되듯, 노래 또한 부르는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금지된 노래는 오히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억압은 언제나 반대편에 저항의 불씨를 남긴다.


이 노래를 둘러싼 풍경은 한국 현대사의 균열을 그대로 비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울려 퍼졌다. 거리와 광장, 대학 강당과 구치소 안에서까지. 이 노래를 부르는 일 자체가 저항이었다. 노래를 안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1987년 6월항쟁의 열기 속에서도, 1990년대 노동 현장에서도 사람들은 이 노래에 발을 맞추어 걸었다.


그러나 시간은 노래를 단순한 추모의 자리에만 머물게 두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이념 갈등이 거세지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또 다른 전장(戰場)이 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이 노래를 제창할 것인가, 합창단만 부르게 할 것인가를 두고 정부와 유족, 시민슬롯가 해마다 충돌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공식 제창이 배제되었다. 노래는 어느 순간 '종북'의 상징으로 호명되었다. '임'이 윤상원이 아니라 김일성이라는 주장까지 공공연히 떠돌았다.


일부에서는 작사에 관여한 황석영의 행적을 근거로 그런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이 곡의 제목과 헌정 대상은 황석영 개인의 창작이 아니었다.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준비하던 자리에서, 열여 명의 문인들이 5·18 희생자 전체를 '님'으로 부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한 것이었다.


1980년 5월 14일 ‘민주화성회’를 앞두고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경향신문


노래 하나가 이토록 깊게 슬롯를 갈라놓는다. 바로 그 사실이 증언이다. 한국 슬롯의 균열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그 균열이 역사 해석의 가장 아래층까지 스며들어 있음을.


5·18에 대한 혐오는 전라도와 좌파, 민주화에 대한 혐오와 얽히며 결국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정서적 거부로 번져갔다. 노래를 미워하는 일은 기억을 미워하는 일이다. 기억에 대한 혐오는 죽은 자들에 대한 혐오와 다르지 않다. 죽은 이를 끝내 애도하지 못하는 슬롯. 그것이 오늘 우리가 지나고 있는 오월의 한 풍경이다.


201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제37주년 기념식에서 9년 만에 공식 제창이 다시 이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날 말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오월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입니다."


우리는 그 9년의 공백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그 제창의 재개 앞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던 반발의 목소리 또한 기억해야 한다. 기억은 언제나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행진, 끝나지 않은 노래


이제 노래의 구조 자체를 들여다볼 차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후렴은 이렇게 말한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작곡가 김종률에 따르면, 원작시의 표현은 본래 '앞서서 가나니'였다. 그 문장의 뜻은 분명하다. 먼저 간 죽은 자들이 앞에서 걷고, 살아남은 이들이 그 뒤를 따른다는 것. 이 노래의 행진은 단순한 투쟁의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애도의 형식이다. 먼저 쓰러진 이들을 끝내 잊지 않겠다는 맹세. 남겨진 자들이 그 걸음을 이어 걷겠다는 다짐이다.

어쩌면 그것은 헤일메리의 기도와도 닮아 있다. 승산 없는 자리에서, 이미 패배한 듯 보이는 순간에도 끝내 공을 던지는 일. 인간은 그렇게 죽음에 맞선다. 계산으로가 아니라, 행진으로.


그러나 오늘의 오월에서 그 행진은 하나로 이어지지 못한다. 같은 날, 같은 거리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노래를 부른다. 걸어가는 방향도 다르다. 광장의 증오는 SNS로 옮겨가며 더 정교해졌고, 더 잔인해졌다. 이념의 양극화는 이제 역사적 사실조차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같은 오월을 두고도 누군가는 민주화의 달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불순한 폭동의 기억을 말한다. 같은 노래를 두고도 어떤 이들은 해방의 찬가를 듣고, 또 다른 이들은 이적(利敵)의 흔적을 본다. 이 갈라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오월은 눈부시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마리아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왔다. 세상의 규범 밖에 서 있었고, 아들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떠나지 않았다. 헤일 메리란 결국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미 늦은 듯한 자리에서, 이미 패배한 것 같은 시간 속에서도 끝내 등을 돌리지 않는 것.

백기완은 독방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입으로 시를 외웠다. 황석영은 그 언어를 노래의 형식으로 빚었다. 김종률은 거기에 곡을 얹었다.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다시 사람들에게 건넸다. 악보도 없이, 레코드도 없이, 오직 몸으로 기억하며.


군사정권 아래에서 유포와 가창이 금지되었기에, 노래는 주로 구전으로 전해졌다. 사람에 따라 가사와 가락이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바로 그 미세한 흔들림이 이 노래의 생명이었다. 완벽히 보존된 노래가 아니라, 불완전하게 이어지며 살아남은 노래. 흠집은 역사가 되었고, 변형은 전파가 되었다.


오늘의 한국 슬롯는 깊은 혐오와 양극화 속에 놓여 있다. 정치의 언어는 적대로 가득 차 있고, 세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지역과 계층, 성별과 이념의 단층선이 교차하며 공동체를 잘게 갈라놓는다. 이 쪼개진 슬롯에서 오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먼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이념 이전에 삶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 거창한 사상보다 먼저 내일의 밥과 일상을 원했던 사람들. 아이들이 무사히 학교에 가기를 바랐던 사람들. 그 평범한 바람 끝에서 죽음과 마주했던 사람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속의 마리아. 20세기 폭스 코리아


그 죽음들은 이념보다 앞선다.

그 앞에서 우리가 다시 헤일 메리를 외친다면, 이미 갈라진 듯한 시대를 향해 마지막 공을 던진다면, 그 기도의 내용 또한 분명해야 한다. 죽은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들이 무엇 때문에 먼저 갔는지를 잊지 않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을 두고 서로 다투는 대신, 함께 짊어진 채 걸어가는 것.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 문장은 명령이라기보다 간청에 가깝다.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처럼, 먼저 떠난 이들이 남겨진 자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부탁.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 우리가 걸었던 길을 끝내 끊지 말아 달라.


오월의 녹음은 날마다 짙어진다. 그 푸름 아래 묻혀 있는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는가. 그리고 기억한다면, 그 기억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행진 또한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임을 위한 행진곡, 1982



죽은 자들을 따라 걷는 계절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오래 흔들렸다.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제 눈을 뜨지 못한 채 살아낸 시간이었다. 진심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이 끝내 얇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 다리가 꺾이는 듯한 무력감이 몸 안으로 밀려왔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넘어졌을지언정 끝내 진실을 보았으니.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것처럼 느껴지는 아이들의 환한 웃음을 저 푸른 산등성이 위에 겹쳐본다. 바람이 지나가는 초록의 결 사이로 작은 미소 하나가 번진다. 그 미소를 품은 채, 앞으로 걸어갈 날들을 조용히 그려본다.


5·18민주화운동 제46주기인 18일 오전 광주 동구 5·18기념광장에서 열린 5·18 제46주년 정부기념식에서 옛 전남도청 복원을 축하하는 기념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뉴시스


시간은 대부분의 것들을 바꾸어 놓는다. 어떤 것은 자라고, 어떤 것은 쇠락한다. 어떤 마음은 성숙하고, 어떤 믿음은 끝내 도태된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이름은 잊힌다. 거울 속의 나는 매일 시간이라는 손이 그려내는 희비의 곡선을 바라본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제대로 가늠하기도 전에 이 땅에서 벌어졌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 금이 간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이어지는 살풀이 같다. 지워지지 못한 슬픔이 시대의 바닥을 천천히 떠돌고 있다.


언제쯤 이 땅의 슬픔이 모두의 가슴 안에서 함께 품어질 수 있을까. 누구의 고통은 기억되고 누구의 고통은 외면되는 일이 더는 없을 수 있을까.


털끝만 스쳐도 아파오는 끈적한 멜랑꼴리를 잠시라도 털어내고 싶다. 그리고 오늘 하루만큼은,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깊고 조용하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을 끝내 잊지 말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하루이기를.


산 자의 몫으로.

죽은 자들을 따라 걸으리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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