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근사하게 늙을까

프라이드 에이징에 관하여

by박 스테파노
- 상실과 고독을 견디는 노년의 품위
- 소멸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
- 젊음을 내려놓고 삶의 뼈대를 세우는 일


생의 이면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피렌체에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 윤희숙의 삶도 그랬다. 마흔의 길목에서 남편을 잃었다. 손에 쥐었던 붓 대신 호텔의 더티카트를 밀었다. 객실 시트를 갈고, 엉킨 청소기 호스를 풀었다. 매일 같은 방을 드나들며 소멸의 풍경을 마주했다.


노동은 정직했고 고단했다. 반복되는 룸키핑의 시간 속에서도 삶은 무너지지 않았다. 흐트러진 방을 다시 정돈하는 일은 비워진 자리에 내면의 층위를 쌓는 일이었다. 그녀는 낡아가는 손과 일터를 스마트폰 화면에 담았다. 사라진 옛 그림에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 지금 발 딛고 선 청소의 현장을 예술로 바꾸었다. 그 안에는 체념보다 삶을 다시 세우려는 의지가 남아 있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하나씩 잃어가는 일이다. 젊음이 떠나고 직업이 바뀌고 익숙한 환경이 무너질 때 사람은 흔들린다. 세상은 그것을 실패라 부른다. 그러나 윤희숙의 삶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세월이 가져오는 변화를 숨기지 않는 태도. 그 무게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문학평론가 김성신은 이를 "프라이드 에이징(Pride Aging)"이라 불렀다.


프라이드 에이징은 늙어감을 성취와 실패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는 마음이다. 주름진 얼굴과 거칠어진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이다. 변화한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나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다. 젊음을 흉내 내거나 과거의 영광에 매달리지 않는다. 흐르는 시간의 결을 몸으로 견디며 살아내는 존엄이다.


어떻게 근사하게 늙을 것인가. 그 대답은 거창한 성공에 있지 않다. 윤희숙이 밀던 더티카트처럼, 단조로운 반복 속에서도 내면의 구조를 다시 세우는 일에 있다. 무너진 일상 위에서 묵묵히 빗자루를 드는 일에 있다. 늙어감은 쇠락만이 아니다. 삶의 가장 깊은 층위를 완성해 가는 축적이다. 프라이드 에이징은 다가오는 소멸 앞에서도 끝내 품위를 잃지 않겠다는, 인간의 조용하고 단단한 선언이다.


윤희숙 작가의 네 번째 개인전 『베큠하셨어요? Did you vacuum?』가 서울 종로구 구기동 서울자브종에서 오는 30일까지, 교수신문, 윤희숙



바삭한 노년의 마음


월간 중앙 전수진 기자의 <어떻게 늙을 것인가>가 기억난다. 그 컬럼처럼, 어느 서점가에서 울퉁불퉁한 근육을 과시하는 70대 노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상의를 벗은 채 이두박근을 들어 올린 노구(老軀). 그 아래에는 "멋진근육, 늦은 나이라는 것은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세상은 그것을 당당함이라 부를지 모른다. 노화를 극복한 인간의 승리라고 찬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 풍경이 오래 서글펐다. 육체의 쇠락을 끝내 부인하려는 몸짓. 나이 듦을 극복해야 할 적(敵)으로 삼는 강박이 그 근육 뒤에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늙어서까지 젊음의 흉내를 내야 안심하는 것일까.


나이 듦을 밀어내려는 세상의 안간힘은 늘 서글픈 분비물을 남긴다. 컬럼이 소개한 일본의 작가 사카이 준코는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사카이 준코, 2015)에서 스스로 중년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의 불안과 추함을 매섭게 짚었다. 젊음이라는 흘러간 물을 붙잡으려 할수록 삶은 질척이고 비루해진다. 사카이는 그 욕망의 분비물을 씻어내고 마침내 "바삭한 노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바삭하다는 것은 습기를 걷어낸 상태다. 미련과 탐욕의 물기를 말리고, 남은 생의 외피를 가볍고 담백하게 다듬는 일. 그것이 노년의 품위다.


그러나 바삭해지는 길은 순탄하지 않다. 나 역시 노년의 초입에서 크게 고꾸라졌다. 몸은 병들었고, 글을 쓰는 손끝은 예전 같지 않았다. 청춘의 들판을 뛰던 다리는 지상의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꺾였다. 넘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육체라는 성벽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병상에 누워 굳어가는 관절을 바라보는 일은 고독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컬럼을 통해, 로마의 정치가이자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만났다. 기원전 45년, 그는 두 번의 이혼을 겪었고 목숨보다 아끼던 딸을 잃었다. 정치적으로도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인생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키케로는 『노년에 대하여』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기원전 45)를 썼다. 최악의 해에 그가 남긴 조언은 단단하다. 그는 "육체적 한계를 받아들여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육체의 쇠락을 한탄하는 대신 "몸이 아닌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라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일은 부러진 다리에 청춘의 근육을 덧붙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노년의 재생은 육체의 복원이 아니라, 무너진 뼈대 위에 마음의 근육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키케로는 인생의 신맛과 쓴맛을 모두 지난 뒤에야 "노년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라고 말할 수 있었다. 탐욕이 걷힌 자리에 남는 영혼의 투명함 때문이다.


『노년에 대하여』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기원전 45). ChatGPT generated by ParkStephanus


글을 쓰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병든 작가에게, 그리고 노년의 문턱에서 비틀거리는 나 자신에게 나는 윤희숙의 더티카트와 작가들의 문장을 빌려 조용한 응원을 보낸다.


손에서 붓을 놓지 않으려 애쓰기보다 생계를 위해 호텔의 더티카트를 밀었던 화가 윤희숙의 삶은 프라이드 에이징의 정수에 가깝다. 그녀는 달라진 직업과 거칠어진 손을 숨기지 않았다. 룸키퍼의 단조롭고 고단한 노동 속에서도 삶을 실패라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복 위에 새로운 내면의 층위를 쌓아 올렸다. 나이가 들어 환경이 바뀌고 처지가 달라지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새로운 계절이다.


프라이드 에이징은 상실을 품어 안는 태도다. 젊은 날의 빛나던 문장과 예리한 감각이 무뎌졌다고 해서 작가의 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앞선 컬럼에서 소개한 작가 임경선은 『태도에 관하여』 (임경선, 2015)에서 늙어감을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투덜대거나 까탈스럽게 굴지 않으며,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가능한 한 계속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무리지어 나대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일. 노년의 품위는 어쩌면 그 고요한 지속 속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바래지 않는 시간의 뼈대


근사하게 늙는다는 것은 젊음을 연장하는 일이 아니다. 멋지게 소멸할 준비를 하는 과정에 가깝다. 화려한 색이 빠져나간 겨울나무처럼 삶의 에센스만 남기는 일. 넘어진 자리는 부끄러운 얼룩이 아니다. 그곳은 내가 대지와 가장 가까이 닿았던 정직한 자리이며, 육체의 한계를 온몸으로 승인한 성소(聖所)다.


그러니 병든 손으로 다시 펜을 쥔다. 문장은 간결해질 것이다. 수식어는 잎처럼 떨어져 나갈 것이다. 어쩌면 헤밍웨이의 문체처럼 뼈대만 남은 단단한 글이 될지도 모른다. 프라이드 에이징은 그런 태도다. 주름과 질병을 억지로 감추지 않고, 흐르는 세월의 결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내는 존엄.


습기를 걷어낸 "바삭한 노인"이 되어, 무의미한 불평 없이 좋아하는 글쓰기를 끝까지 이어가는 일. 걸음은 느려지고 뼈마디는 시리겠지만, 내 나이와 상처를 온전히 긍정하며 걸어가는 노년은 고독해도 외롭지 않다. 그것이 내가 끝내 완성하고 싶은 생의 품격이다.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뼈아프다. 몸의 기력이 쇠하고 병상에 눕게 되자, 나는 귀 끝에 오래 남는 노래 한 자락을 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면 되살아나는 옛 노랫말처럼, 노년의 고독은 예고 없이 방안을 채운다. 평소에는 분주한 일상에 가려 있던 고독이 육체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2018)에서 고독이 늘 그 자리에 있는 본질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고독하지 않다고 믿었던 젊음의 시간들이야말로 잠시 머물렀던 착각이었을지 모른다.


인생의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면 삶은 간이역의 코스모스처럼 쓸쓸해진다. 빛나던 문장과 예리한 감각은 흐려지고, 후회만 남은 듯 느껴질 때가 있다. 병든 작가의 손은 갈 곳을 잃고 떨린다. 그러나 그 쓸쓸한 간이역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세월의 무게는 억지로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시간에 몸을 기대는 일이라는 사실을. 연습 없이 밀려온 세월만큼 우리가 외로운 존재임을 인정할 때, 노년의 정직한 품위가 시작된다.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의 한 장면. 그린나래 미디어


시간의 풍화 앞에서도 바래지 않는 인간의 품격을 나는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 (폴 맥기건, 2017)에서 보았다. 은막의 스포트라이트를 뒤로한 채 삶의 끝자락을 맞이하던 여배우 글로리아 그레이엄(아네트 베닝)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네 번의 이혼을 겪고, 섹시 아이콘이라는 왕년의 수식어 속에 갇혀 있던 그녀는 나이 듦 앞에서 흔들렸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연극 「유리 동물원」을 준비하던 그녀의 주름진 눈가와 거칠어진 손길은, 세월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병들고 낡아가는 내 삶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년은 비극만은 아니었다. 그녀 곁에는 스물아홉 해의 나이 차를 넘어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 연인 피터(제이미 벨)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눈 감정은 단순한 열정이 아니었다. 마모되어 가는 존재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시간을 견뎌내는 일이었다. 젊은 날의 화려한 성공은 모두 사라졌지만, 병든 몸으로 연인의 등에 기대어 통증을 견디던 침묵의 순간은 오히려 가장 단단한 해피엔딩으로 남았다. 늙어감은 그렇게 내 삶의 서사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조용히 안착시키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흔히 사랑의 정점을 뜨거운 입맞춤이라 말한다. 그러나 노년의 사랑이 도달하는 끝은 고요한 돌봄의 형식에 가깝다. 피터가 그녀의 굽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릴 때, 그 손길에는 연민을 넘어선 유대가 있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차 한 잔을 내어주고, 사랑하는 이의 거친 숨소리를 묵묵히 지켜보는 시간. 화려한 무대는 저물었지만, 서로를 깊이 알아본 이들이 나누는 그 지속 속에서 사랑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것이 내가 도달하고 싶은 프라이드 에이징의 모습이다. 프라이드 에이징은 늙어가는 육체를 부끄러워하며 숨기는 일이 아니다. 세월이 남긴 주름과 질병의 흔적을 삶의 정직한 훈장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걸음은 느려지고 뼈마디는 시려오겠지만, 남은 시간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내는 일. 연인의 품에 기대어 마지막 숨을 고르던 여배우처럼, 우리 역시 세월이라는 단단한 뼈대에 기대어 남은 생을 견뎌갈 수 있다.



겨울나무의 문장


어떻게 근사하게 늙을 것인가. 이제 그 대답은 조금 선명해진다. 젊음을 연장하려는 미련을 내려놓고, 탐욕의 물기를 말린 "바삭한 노인"이 되어가는 것. 변해버린 내 모습과 멀어진 인간관계까지도 조용히 기억하며, 흐르는 시간 위에 영혼을 가만히 얹어두는 일이다.


그러니 병든 손으로 다시 펜을 쥔다. 수식어는 겨울나무의 잎처럼 떨어져 나갈 것이다. 앙상한 뼈대만 남은 문장일지라도, 그 안에는 삶의 가장 솔직한 층위가 남을 것이다. 넘어진 자리는 상처의 얼룩이 아니다. 대지와 가장 가까이 맞닿았던 정직한 성소다. 세상이 하얗게 저물고, 덤처럼 주어진 하루가 고단할지라도 나는 이 시간에 기대어 나만의 글쓰기를 이어갈 것이다. 소멸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 그것이 내가 끝내 붙들고 싶은 생의 품격이다.


바삭하게 늙어 가는 것. 그것이 근사하게 늙는 것이 아닐까. GENTLEJAZZ


대지의 중력을 견디지 못해 고꾸라졌던 자리마다 굳은살이 박인다. 젊은 날의 문장이 화려한 축제였다면, 노년의 문장은 뼈대만 남은 겨울나무의 독백에 가깝다. 더는 타인의 시선에 매달리지 않는다. 상실의 흔적을 감추려 애쓰지도 않는다. 지워지지 않는 주름과 병마의 자국은 내가 이 세상에 끝내 부딪히며 살아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늙어감은 존재의 퇴화가 아니다. 생의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본질만 남기는 침묵의 시간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흐른다. 소멸의 벼랑도 끝내 찾아온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에 몸을 기댈 줄 아는 사람은 그 끝에서도 초조하지 않다. 옛 노래의 잔향처럼, 연인의 등을 쓸어내리던 돌봄의 손길처럼, 삶의 마지막 품격은 세월을 거스르는 데 있지 않다. 움켜쥔 손을 풀고 시간의 결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탐욕의 물기가 마른 자리에는 비로소 맑은 여백이 남는다.


근사하게 늙는다는 것은 결국 다가오는 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걸음은 느려지고 등은 굽겠지만, 프라이드 에이징의 마음으로 덤처럼 주어진 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것. 세상이 끝내 희미해지는 순간까지, 나는 남은 잉크로 내 생의 가장 담백한 문장을 써 내려가고 싶다.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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