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것들에 대하여

드라마 '허수아비' OST <잊혀지는 것>

by박 스테파노
- 카비티나 현의 울림이 묻는 ‘성장의 유통기한’
- 무해함의 역설, 경쟁이 사라진 시대의 사유
- 슬픔과 기쁨을 관조하는 응시의 힘


ENA 월화드라마 <허수아비>는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이 미제에서 종결로 넘어온 시대 위에 방영되고 있다. 내 세대에게 그 사건은 어린 시절의 공포이자,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한국 슬롯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미제 사건의 대명사’였다. 드라마는 실화를 바탕으로 익숙한 설정과 사건들을 따라간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짜 힘은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이야기의 틈에서, 오래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는 데 있다.


사건의 중심과 가장자리에는 의심과 오해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를 촘촘히 메우는 것은 인연과 관계, 사람과 사람이 남긴 흔적들이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곁에 머물렀던 시간들. 드라마는 그 미세한 감정의 결을 조용히 끌어올린다. 그래서 화면 속 인물들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언젠가 실제로 스쳐 지나갔던 이웃처럼 다가온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1980년대 서울 외곽 변두리 농촌의 풍경이다. 로케이션과 세트, 소품 하나까지 기억의 질감을 세심하게 복원해낸다. ‘800원’이라 한자로 적힌 중국집 짜장면 가격표, 구리 동전 두 개로 안부와 위급을 전하던 빨간 전화통, 만남의 장소이자 분실물 보관소 같았던 동네 바카라방. 그 풍경들 사이로 동물원의 <잊혀지는 것>이 천천히 스며든다.


https://youtu.be/gs1DV5CEgPQ?si=fl5booJFk42MVCnZ



<잊혀지는 것>은 대학생 밴드 동물원의 서툰 아마추어리즘으로 먼저 사랑받은 노래였다. 이후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를 거쳐 더 널리 알려졌고, 여러 후배 가수의 목소리로도 오래 불렸다. 그러나 이 노래는 지나치게 완성된 가창보다, 어딘가 조금 부족한 숨결 속에서 가장 깊어진다. <허수아비> OST에서 박해수가 들려주는 목소리가 유난히 오래 남는 이유도 그 때문일 터다. 매끈하지 않기에 오히려 진심에 가까운 떨림.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서툰 마음이 그 안에서 다시 깨어난다.


사랑이라 말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
뜻 모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속삭이던 우리
황금빛 꿈결 속에 부드러운 미풍을 타고서
손에 잡힐 것만 같던 내일을 향해 항해 했었지

- 동물원 <잊혀지는 것>


어디에도 힘을 주지 않은 이 노래는 지금 들어도 이상하리만치 따뜻하다. 슬롯로 나가기 직전, 마지막 골목에서 나누던 숨 같은 음악. 어설펐지만 진심만은 또렷했던 목소리들. 그것이 동물원이라는 이름의 첫 호흡이었다. 담백함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결로 남았고, 그 결은 세월 속에서도 잔잔한 파문을 만든다.


음악은 때때로 지나간 시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체온 자체를 되돌려놓는다. 가장 바빴고 가장 메말라 있던 순간들 한가운데로 스며들어, 잊힌 줄 알았던 마음의 표면을 다시 흔든다. <허수아비>가 끝내 붙들고 있는 것도 어쩌면 사건의 진실보다,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온도인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오래전 잃어버린 그 따뜻함을, 너무 쉽게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현(絃)의 그림자와 소년기의 밤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고단하다. 영광보다 상처가 많았던 필부범인(匹夫凡人)의 기억 속에는 흐뭇한 회상보다, 한밤중 문득 몸을 뒤척이게 만드는 낭패와 후회가 더 오래 남아 있다. 그럼에도 삶은 이상하게도 순수하고 서툴렀던 시절의 희미한 온기로 버텨진다. 이유도 조건도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던 마음, 세상이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고 믿던 감각. 그 막연한 기억이 때때로 비루한 하루를 견디게 만든다.


고교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야간 자율학습과 독서실의 공기다. 형광등 아래 문제집을 넘기던 밤들. 95.9MHz에 주파수를 맞춘 채 들었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프로그램 후반부에 흘러나오던 <카바티나(Cavatina)>의 기타 선율이 하루의 끝을 알렸다. 그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었다. 지친 감각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사람인지를 묻게 만드는 시간의 숨결에 가까웠다.


스탠리 마이어스가 작곡하고 존 윌리엄스가 연주한 <카바티나>는 영화 <디어 헌터>를 넘어선 정서의 이름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을 지나온 대한민국의 중고생들에게 그 선율은 일종의 비밀스러운 통행증처럼 남아 있다. 밤 11시, 이문세의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흐르던 MBC 라디오의 끝자락에서 기타 소리가 시작되면 바카라상 앞의 공기마저 달라졌다. 그것은 휴식의 신호라기보다, 입시라는 거대한 압박 속에서 잠시 숨을 멈추고 스스로를 바라보게 만드는 짧은 사색의 틈이었다.


카바티나는 원래 짧고 서정적인 성악곡 형식을 뜻한다. 그러나 이 곡의 진짜 미학은 절제와 여백에 있다. 감정을 몰아붙이지 않은 채, 호수 위에 던져진 작은 돌 하나처럼 잔잔한 파문만 남긴다. 영화 속에서도 이 음악은 전장의 참혹함과 고향의 평화 사이를 잇는다. 베트남전이라는 극단의 폭력 앞에 놓인 청춘들의 상실과 허무가 그 고요한 선율 안에 천천히 스며 있다.


'별밤지기' 이문세의 모습, 존 윌리엄스의 '카바티나' 음반 재킷. MBC, Cube Record


당시의 학생들에게도 이 곡은 비슷한 역할을 했다. 학교라는 이름의 거대한 병영 안에서 전국 학력고사라는 단 한 번의 승부를 위해 삶을 유예당했던 아이들. <카바티나>는 그 속에서 잊혀가던 ‘나’라는 존재를 잠시 환기시키는 통로였다. 빽빽한 교실에서 70명이 넘는 급우들과 경쟁해야 했던 세대에게 그것은 결국, 지나가버린 소년기에 대한 조용한 애도이기도 했다.


70년대생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높은 인구 밀도를 견뎌낸 세대다. 초등학교에서는 오전·오후반 수업이 이어졌고, 고등학교 교실은 통로조차 비좁았다. 경쟁은 선택이 아니라 공기처럼 주어진 환경이었다. 1989년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가 거대한 공감을 얻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독서실 칸막이 안에서 워크맨 이어폰을 꽂고 별밤을 듣던 소년과 소녀들에게, 세상은 오직 등수라는 숫자로만 존재의 가치를 매겼다.


사랑이라 말하며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기고
길 잃은 아이처럼 울먹이며 돌아서던 우리
차가운 눈길 속에 홀로 서는 것을 배우며
마지막 안녕이란 말도 없이 떠나갔었지

— 동물원 <잊혀지는 것>


그 시절의 학교는 통제의 공간에 가까웠다. 소풍과 수학여행은 분위기를 흐린다는 이유로 축소되었고, 점심시간 운동장 위의 축구조차 체력 낭비로 여겨졌다.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쓰라림마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빽빽한 시간 속에서 세대는 단단해졌다. 결핍을 견디며 살아가는 법을 익혔고, 서로 부딪치며 타인과 공존하는 감각을 체득했다. 그들에게 <카바티나>의 선율은 잔혹한 시스템 안에서 겨우 허락된 고독의 권리였다. 이 경쟁의 끝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인가. 그 오래된 물음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서늘하게 떨리던 현(絃)의 울림처럼, 지금도 마음 어딘가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침묵하는 운동장 앞에서


요즘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공 차는 소리가 사라지고 있다. 소음 민원과 안전사고 바카라임론에 밀려 축구 금지 표지판이 세워진 자리에는, 정적만이 길게 눕는다. 소풍과 수학여행은 자취를 감추고, 승패를 가리지 않는 무승부 운동회가 그 빈자리를 대신한다. 위험 관리라는 이름 아래 교육의 풍경은 점점 위축되고, 성장의 필수였던 경쟁과 극복의 서사는 유년의 기억에서 천천히 지워지고 있다.


그 기저에는 효율과 바카라임 회피를 우선하는 관리 편의주의가 놓여 있다. 체험학습 안전 매뉴얼이 촘촘해질수록, 사고의 무게는 교사 개인의 법적·행정적 부담으로 되돌아간다. 학교는 어느새 모험이 제거된 공간이 되었고, 아이들은 공동체의 활력을 경험할 기회를 잃었다. 실패를 견디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울 자리가 함께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것은 단순한 행사의 중단이 아니다. 한 세대가 공유하던 감각, 곧 상식(Common Sense)의 붕괴다. 함께 땀 흘리며 골을 넣던 순간, 낯선 여행지에서 밤새 나누던 이야기, 승리의 환호와 패배의 분함. 그런 기억들은 훗날 슬롯적 연대의 밑바탕이 되는 감정의 자산이다. 그 자리를 개인화된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철저히 통제된 안전 구역만이 대신한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잃고 있는가.


지금 필요한 것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통렬한 애도다. 그러나 그 애도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살아 있음의 역동성을 되찾으려는 의지여야 한다. 안전은 생존의 조건일 뿐, 교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텅 빈 운동장과 멈춰 선 수학여행 버스는, 우리 슬롯가 아이들에게 어떤 성장의 계절을 빚지고 있는지 묻는 서글픈 자화상처럼 서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운동장. Gemini generated by ParkStephanus prompts


수험생이 100만에 육박하던 경쟁의 시대를 살아온 내 세대 역시 금지의 날들 속에서 자랐다. 두발 단속과 복장 검사, 소지품 검사까지 이어지던 야만의 끄트머리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전국교사노동협동조합이 발족하고 교육 당국과 긴장 어린 신경전이 이어지는 동안, 학생들은 늘 고래 싸움의 새우였다.


8학군 가장자리, 개교한 지 5년도 채 되지 않은 공립학교에는 유독 젊은 교사들이 많았다. 80년대 한복판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그분들은 전교조 창립에 열성이었고, 기성 교사와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을 감당해야 했다. 강제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을 둘러싼 대립이 첨예하던 시절, 첫 부임한 고2 담임 공업·기술 선생님은 자율학습 시간에 학급 전원을 운동장으로 내보냈다. 운동 부족이니 뛰어다니라고. 이미 체육 시간은 체력장 오래달리기 중 사망 사건과 과열된 입시 경쟁 속에서 또 다른 자율학습으로 변해 있었다. 결국 교장은 축구 금지령을 내렸다.


그 시절의 축구 금지령과 지금의 수학여행 실종, 무승부 운동회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나, 닮은 침묵을 품고 있다. 운동장 아이들 소리를 소음으로 듣는 각박함은 새롭지만, 경쟁을 지우는 방식은 결국 성과주의의 또 다른 그림자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희망을 위해, 지금 여기에서만 가능한 우연과 행복을 자꾸 뒤로 미루고 있다. 텅 빈 운동장은 그 사실을 말없이 증언하며, 우리에게 묵도(默禱)를 청하고 있다.



무균실의 교실과 사라진 상처


오늘날의 교육 현장은 30~40년 전과 전혀 다른 듯하면서도 기묘하게 닮아 있다. 학급당 학생 수는 급격히 줄었고, 학생의 인권과 심리적 안정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승패 없는 운동회가 열리고, 모두가 상장을 받는 풍경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소풍과 수학여행은 안전사고와 민원 부담을 이유로 교사와 교직원 스스로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무해함과 무경쟁을 지향하는 시대.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여전히 타인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이 조용히 숨어 있다.


경쟁을 제거한 교육이 과연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갈등이 사라진 진공의 교실이 세상이라는 거친 파도 앞에서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는가.


눈부신 햇살 아래 이름 모를 풀잎들처럼
서로의 투명하던 눈길 속에 만족하던 우리
시간은 흘러가고 꿈은 소리없이 깨어져
서로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멀어져 갔지

— 동물원 <잊혀지는 것>


경쟁은 본질적으로 냉혹하다. 그러나 동시에 자아를 발견하고 타자와의 거리를 배우게 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패배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회복 탄력성을 익힐 기회를 잃는다. 승패 없는 운동회는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노력 끝에 얻어낸 기쁨과 실패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숙함까지 함께 지워버린다.


1980년대 고등학교 교실 모습. 강진신문


과거의 교육이 팽창의 압력 속에서 개인을 짓눌렀다면, 지금의 교육은 무균실 안에서 면역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70년대생들이 겪었던 수학여행 취소와 각종 통제가 국가와 학교의 폭력적 억압이었다면, 오늘의 무경쟁은 아이들이 세상과 맞설 용기 자체를 차단하는 또 다른 형태의 연성 통제에 가깝다.


<카바티나>의 마지막 음이 희미해질 즈음, 라디오 DJ의 마감 멘트가 흘러나오면 우리는 다시 영어 단어장을 펼치거나 캄캄한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공기, 눅눅한 독서실 바카라상의 감촉. 그 음악이 마음 한구석을 시리게 할수록 우리는 조금씩 생각하는 인간으로 자라났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잔인했던 경쟁 시스템 자체가 아니다. 그 숨 막히는 시간 속에서도 자기 내면을 끝내 놓치지 않으려 했던 치열한 사유의 흔적이다. 지금의 교육에 필요한 것은 무해함이라는 포장지가 아니다. 갈등을 통과하고 패배를 견디며,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드는 의미 있는 고난의 공간이다.


삶은 결코 무해하지 않다.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만의 선율을 지키며 걸어가는 힘이다. 그것은 빽빽한 교실의 고독을 견뎌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오래된 훈장인지도 모른다. 80년대의 그 음악이 지금까지도 유효한 이유 역시 단순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일의 무게를, 다시 조용히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빛바랜 사진과 플랫폼의 그림자


숨 가쁜 생활 속에 태엽이 감긴 장난감처럼
무감한 발걸음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우리
시간은 흘러가고 빛바랜 사진만 남아
이제는 소식마저 알 수 없는 타인이 됐지

— 동물원 <잊혀지는 것>


숨 가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끝까지 태엽이 감긴 장난감처럼 살아간다. 무표정한 하루와 기계적인 걸음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을 돌아볼 틈도 함께 사라진다.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장면들은 서서히 빛을 잃고, 낡은 사진 몇 장만이 한때 서로의 안부를 건네던 시간을 겨우 증명한다. 그렇게 가까웠던 사람도 어느새 연락처 속 이름 하나로 남고, 끝내 소식조차 알 수 없는 타인이 된다.


사랑을 말하던 순간들은 분명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현실의 무게 앞에서 조금씩 흐려졌다. 바쁘다는 말은 진심이면서도 동시에 변명처럼 들렸고, 우리는 그 틈에서 서로의 소중함을 무심히 놓쳐버렸다. 그럼에도 <잊혀지는 것>은 투박한 호흡과 담백한 음정만으로 이상하리만큼 깊은 곳을 건드린다. 화려한 기교 대신, 살아가는 사람의 사유와 체온이 조용히 스며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묻는다. 잊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를 잊어버린 채 살아왔는가. 서둘러 지나친 얼굴들, 한때 삶의 가장 환한 자리를 차지했던 이름들, 그리고 스스로에게조차 희미해진 감정의 잔향까지. 노래는 그 질문을 소리 높이지 않은 채 오래된 기억과 현재 사이의 틈으로 밀어 넣는다. <잊혀지는 것>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조용한 거울로 남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살아가는 얘기, 변한 이야기, 지루했던 날씨 이야기. Gemini generated by ParkStephanus prompts


동물원의 또 다른 노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를 떠올리면, 사람들 사이를 미세하게 흔들리며 지나가는 공기의 결이 먼저 다가온다. 지하철역은 늘 바쁘고, 모두가 어딘가로 향하며, 멈추지 않는 발걸음의 소음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 소란 한가운데에서 오히려 오래된 침묵을 끌어올린다. “살아가는 얘기, 변한 이야기, 지루했던 날씨 이야기”라는 무심한 문장들 사이로 끝내 전하지 못한 마음들이 희미하게 배어 나온다.


우리는 그런 순간을 알고 있다. 예상치 못한 재회 앞에서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얇게 번져오는 순간. 노랫말 속 그녀는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그 미소에는 삶의 무게와 시간을 견뎌온 흔적이 함께 서려 있다. 반면 화자는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허탈한 고백을 건넨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온 세월이 같은 플랫폼 위에 잠시 멈춰 선다.


이 짧은 재회의 힘은 안부 자체에 있지 않다.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에 빛나는 열매를 보여준다 했지”라는 대목은 청춘이 남겨둔 약속의 잔광이 아직 마음 깊은 곳을 떠돌고 있음을 일깨운다. 삶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굽이쳐 흘렀지만, 언젠가 빛나는 무언가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절의 호기로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래 침잠해 있을 뿐이다.


이 노래들을 이 시대의 삭막함 속에 고른 이유도 거기에 있다. 화려한 멜로디도, 감정을 밀어붙이는 절규도 없다. 오래전의 약속과 지금의 현실이 스쳐 지나가는 아주 미세한 틈. 동물원은 그 흔들리는 순간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붙잡아낸다. 그리고 바로 그 틈에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며 자꾸 잃어버리는 빛나는 열매의 자리가 조용히 남아 있다.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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